일 년쯤 전이던가, 우연한 기회에 저명한 심리학자가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나의 성향을 알아볼 수 있다길래 약간은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설문지에 답을 적어냈다. 나의 성향은 '아이디얼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요약되었고, 그가 내게 세상을 잘 살기 위해 해주었던 조언은 '네 정체를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였다. 언제나 가면을 몇 개 이상 준비해서 되도록 치밀하고 자연스럽게 그 가면을 쓰며 살지 않으면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 섞인 충고. 나는 10분이 조금 더 걸리는 설문지 한 장으로 그가 내게 내린 진단에 굴복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재미있는 놀이 정도로 생각한 참이라 그런 얘기를 듣고 잠깐은 '모든 심리학자는 사기꾼'이라는 말을 떠올리기도 했다는 걸 굳이 숨길 생각이 없었지만, 파하하 크게 웃으며 '네네 조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디얼리스트가 아니라 해도, 현대 사회에서 내 정체를 섣불리 알리는 짓은 자폭이라는 점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모든 관계가 위선이 되지 않겠느냐고? (혹은 위악) 그래도 할 수 없다. 내가 우선 살고 봐야 하니까. 1은 2가 되지 못한다. 1은 2가 될 거라는 불가능의 끝을 향해 가지만 사실 0이 되지 않기 위한 불안에만 사로잡히는 운명인 걸. 0이 된다면 살 수 없다. 살지 않아도 될 때, 우리는 이 불안과 우울의 일생을 끝내고 조용히 내 정체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데서 오는 고독을 어떻게 회피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로칼랭(격렬한 포옹이라는 뜻이다). 내 팔이 길면 길 수록 좋다. 사랑할 대상이 있으면 그를 껴안고 대상이 있어도 가까이 할 수 없으면 나를 껴안는다. 이 때의 고독은, 적들에게 정체를 알리는 것보다 훨씬 안온하고 감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