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사 음식을 좋아한다. 특히 전이 좋다. 시댁에서는 감자와 고구마, 연근을 쪄서 식힌 다음 전을 부치기 때문에 겉이 바삭하고 속은 잘 익은 전을 먹을 수 있다. 부추전(현지 명칭은 정구지전)도 고소하고 특히 꼬치전(?맞나?)이 좋다. 맛살과 햄과 단무지와 쪽파를 꼬치에 끼우고 있으면 이건 정말 전통과는 한참 멀구나 싶지만, 여기에 계란물을 입혀 부쳐 놓으면 보기에도 예쁘고 맛도 좋아서 자꾸만 손이 간다. 파뿌리, 양파 껍질, 무 껍질 등과 함께 푹 삶은 수육도 좋다. 특히 문어 숙회는 썰면서 집어먹고 싶은 걸 늘 간신히 참는다. 고사리를 비롯한 각종 나물을 넣고 비빈 제삿밥은 그야말로 정점. 소고기와 무, 두부를 듬뿍 넣고 끓인 탕국과 함께 먹으면 몇 그릇이고 먹을 수 있다. 이렇게 쓰면서도 먹고 싶다. (옆길로 새고 있다...) 사과, 배, 한과로 디저트까지 먹고 나면 염분과 지방에 대한 걱정도 가라앉는다. 오히려 제사상이 사실은 균형잡힌 식단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나이므로 음식을 하는 것도, 차리고 나르는 것도, 설거지도, 별로 힘들지 않다. 어머님과 형님이 어려운 걸 다 해주시기도 하고, 남편도 아주버님도 빼지 않고 일하는 덕도 크다. 아버님 제사를 위해서 다른 친척들이 와주시는 것도 보기 좋다. 친척 어른들이 "오느라고 고생했다, 와서 얼굴 보니 좋다."고 말씀해주시면 왠지 어깨가 으쓱하고 마음도 푸근해진다. 제사는 좋다. 다만 나는 나도 절을 하게 해달라는 거다. 왜 여자는 절을 안 시켜주는가! 그것이 불만이다. 나의 경우는 제사 음식을 준비하거나 뒷정리를 할 때보다, 남자들이 절하는 동안 얌전히 물러 서 있는 순간에 확실한 부엌데기가 된다. 나도 절을 하고 싶다. 나도 돌아가신 아버님께 인사 드리고 싶고, 세상을 떠난 가족을 잊지 않는 따뜻함을 다른 가족들과 나누고 싶다. 같이 준비했으니까 나도 그럴 자격이 있다.


같이 일하고 같이 절하자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한 가지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제사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의견을 내는 것이 주저되었다.


다른 예로 수십 년 전(수십 년 전....) 내가 다닌 대학에서는 '빨간 립스틱은 페미니즘의 적'이라는 식으로 여성의 섹시함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천박하게 여기는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짧은 치마가 좋았고 하이힐을 신으면 허리가 잘록한 기분이 들어서 좋아하는 아가씨였으므로 그런 분위기가 싫었다. 그러면서 '어머니 대지'라는 추상적인 명명으로 여성성과 생태주의를 연결하는 것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페미니즘이란 여성의 성을 지우는 것도 아니고, 강조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배우지 못했다. 페미니즘은 모든 성별을 존중하는 것이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약자가 없게 만들기 위한 것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모두가 잘 살아야 되니까 생태주의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걸 수십 년 지나서 깨닫게 된 것은 단지 내가 공부를 못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전혀 아니라고는 못함.) 아마 당시의 여성주의 교육에서는 그게 한계였을 것이다.


그 시절 나에게는 잘 짚어서 가르쳐주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게 이 책인 것 같다.

















나는 제사를 좋아하는 페미니스트다. 그래서 같이 절할 권리를 달라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다. 나는 쉬폰 드레스를 좋아하고 반짝이는 목걸이를 좋아하고 빨간 색을 좋아하는 페미니스트다. 우리나라의 결식 어린이와 먼 나라의 저체온증 어린이를 위해 세이브더칠드런 캠페인에 동참했지만 '개념녀' 운운하는 홍보에 질려 항의하고 매몰차게 후원을 끊은 페미니스트다. (어린이들에 대한 죄책감은 그들의 몫이므로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교육에는 엄격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보수적인 사람으로서 젠더의 평등 역시 확고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즘에는 여러 길이 있다. 모든 성별에 공정하고 모두의 행복에 관심이 있으니 당연히 그렇다. 페미니즘에 막연한 불편, 나아가 공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이 보면 좋겠다. 다정하고 친절하면서도 단호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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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2-18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네꼬 2016-02-18 14:38   좋아요 0 | URL
동지! 덥석

cyrus 2016-02-18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부장 중심 문화가 강한 대가족은 여전히 남자들만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두 다 그런 게 아닙니다. 지역마다 문화가 차이가 있듯이 제사 방식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제 친가에서는 남자 친척 분들만 제사를 지내고요, 외가에서는 오히려 남자 친척 분들이 여자 친척 분들에게 같이 제사 지내자고 말합니다. 처음에 외가 쪽도 남자들만 했는데, 시대가 바뀌니까 같이 지내는 분위기로 형성되어 제사를 지냅니다. 정확히 어느 지역에서 남자와 여자와 같이 제사를 지내는지 잘 모르지만, 시대가 변한만큼 제사를 준비하는 여자들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집안은 다 같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 있을 겁니다.

다음 명절 때 제사를 지내기 전에 가족들이 모여 있을 때 여자들도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건의하듯이 말해보면 어떨까요? 저는 외가 친척들이 제사 지내는 풍경을 선호합니다. 모두가 같이 제사상을 준비하고, 제일 중요한 제사는 한 사람 빠짐없이 지내는 것, 정말 보기 좋은 모습이거든요. ^^

네꼬 2016-02-18 17:08   좋아요 0 | URL
네, 저 역시 (가톨릭 식이라 단촐했지만) 함께 제사 준비하고 절하는 집에서 자랐습니다. 지역에 따라서라기보다 집집마다 분위기가 다르겠지요. 저도 그래서 처음에 놀랐고요.

변화의 속도도 집집마다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세대부터 남자들이 장을 봐오고 음식을 만들고 나르고 정리하는 것, 제사 전후로는 외식하면서 피로 푸는 것 등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각 세대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변하는 것도 의미 있겠지요. 건의로 해결될 만큼 단순하진 않으니까요.

moonnight 2016-02-18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으로 백만번 좋아요를 누릅니다^^ 제 큰집에서도 남자여자 다함께 절해요. 다들 그러면 좋겠어요. 제사음식 준비와 뒷정리가 힘들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네꼬님은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새애기^^

네꼬 2016-02-18 18:06   좋아요 0 | URL
어이쿠 백 만 번이나요. 저는 제가 먹은 거 치운다고 생각하면 억울하지 않거든요;;;; (진짜로 많이 먹음) 그나저나 새애기라고 하기에는 약간.... =_=

꿈꾸는섬 2016-02-18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처럼 `나는 페미니스트다`하고 당당히 외치고 싶은데 요샌 제 정체성조차 혼란스러워서 당당하지 못한 것 같아요. 책을 먼저 읽어봐야겠어요.^^

네꼬 2016-02-19 17:18   좋아요 0 | URL
뭘요. 당당하다기보다는.. 한편으로는 모든 성별이 평등하다는 게 너무 당연한 말이어서 따로 말 안 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랬고요.

무스탕 2016-02-1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사..살롱해요, 고릉고릉고릉~~~♡

네꼬 2016-02-19 17:19   좋아요 0 | URL
살롱이라니, 살롱이라뇨. 사랑아니고? (왜 당당히 말을 못해! ㅋㅋ)

2016-02-18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9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족 2016-02-19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음. 과거에 남녀협상같은 데 제가 여성대표로 참석하면, 읭 그래, 니들 그거 해-추상적이고, 모호한 것들-, 나는 밥해서 먹이는 일을 하지,라고 협상을 마쳤을 거 같아요.
처녀 적에는 그게 되게 힘든 일이고, 싫은 일이고, 고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는 남편에게 `네가 사람노릇하려고 결혼했지? 여자사람 데려가서 일 시켜먹을라고`라고도 했었는데. 지금은 맛없다고 타박하지만 않으면 먹이는 거 너무 즐거워요.

네꼬 2016-02-19 18:17   좋아요 0 | URL
음, 그러니까 뭔가 먹을 것을 만들어 주는 걸 좋아하신다는 거죠?
저도 좋아해요. 누구든 제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면 좋고요.
저 역시 남이 만든 것 엄청 잘 먹고요.
먹는다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삼천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