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우연히 듣는다 해도 모른 채 지나갈 수 있을 노래를, 그때 그때의 사소한 기분 같은 건 기억조차 나지 않을 노래를, 함께한 시간도 장소도 마음도 기억나지 않을 그런 노래를 나에게 주고 싶다고 한다. 그런 보편적인 노래를.  

 

 

 

 

  

나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에 아무 사연이 없기를 항상 바란다. 즐겁거나 슬프거나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고 오로지 그 노래만 좋아할 수 있기를. 그래야 어느날 불쑥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해도 별다른 동요 없이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노래란 참 이상해서 좋아하기 시작하면, 하다못해 그 노래를 한참 듣던 계절이 언제였는지라도 꼭 같이 생각이 나게 마련이다. 마치 그런 내 바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이들은 말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건 너무 슬프지만) 그때 그때의 사소한 기분 같은 건 기억조차 나지 않는 보편적인 사랑의 노래, 보편적인 이별의 노래를 나에게 주고 싶다고. 가만. 정말 좋은 예술은 자신만의 사사로운 가치에서 걸어나와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누가 그러던데. 이 젊은이들은 벌써 그 의미를 알아버린 걸까. 나는 이제야 겨우 깨치기 시작했는데.  

'브로콜리 너마저'의 첫번째 정규앨범 "보편적인 노래"를 듣는다. 친구가 불쑥 이 음반을 내게 내밀었을 때 나는 무척 당황했다. 나 역시 이 밴드의 소박한 멜로디와 일상의 감각이 묻어나는 가사를 좋아하지만, 차마 이 앨범을 사지는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토록 피하고 싶은, '사연'이 있는 곡이 이 앨범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주일이 넘도록 앨범을 듣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다. 사연이 있는 노래란 건 정말 골치 아프다. 나는 어쩌자고 이렇게 소심하고, 불필요한 기억은 이렇게 섬세한 것이냐. 그러다 주말에 집에 온 손님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이 앨범을 들었다. 예상대로 아름다웠고, 예상대로 마음 한 구석에 특별한 신호가 왔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노래 역시 '보편적인 노래'가 될 것이라고 믿고 바란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새벽이 시작되었다. 지난 한 해 동안 네꼬 씨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나. 어떤 책은 무지 기대하고 읽었는데 더없이 지루했고, 별 생각 없이 보러 간 영화에서 머리가 어질어질한 감동을 받기도 했다. 모르고 산 세월이 억울한 음반을 듣기도 했고, 덕분에 친구의 청춘을 엿보기도 했다. 회사 일은 무척 바빴고, 동료와 다투기도 했다. 때로 과음을 했고 좋아하는 친구들과 여행을 다녔고, 엄마와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엄마에게 서운해 엉엉 울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촛불을 들었고, 내친 김에 정당에 가입했다. 새 잡지를 구독했다. 한동안 잊기 어려울 것 같은 남자를 만나기도 했고 덕분에 끝에서 두번째 남자는 깨끗하게 잊었다(끝에서 세번째는 누구였는지 생각도 안 난다). 너무 재미있어서 끝나가는 게 아쉬운 소설도 읽었고, 치과 의자에 누워서도 폭소를 참기 어려울 웃기는 책도 읽었고, 책장을 덮고도 눈물이 멎지 않아 고생할 만큼 슬픈 책도 읽었다.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먹고, 누군가의 집에서 고양이와 놀기도 했다. 가벼운 교통사고도 있었는가 하면, 땅끝마을까지 왕복으로 운전도 했다. 비행기도 탔고 기차도 탔다. 커피를 마셨고 고기를 구워 먹었고 이따금 일기를 썼다.  

지내는 동안은 유난히 즐겁거나 외로웠는데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참 보편적인 한 해였다. 지나가고 나면 그게 2007년의 일인지 2008년의 일인지도 또 가물가물해질. 그렇게 특별할 것 없었던 한 해가 간다.     

내년에는 네꼬 씨가 좀더 보편적인 사람이 되기를. (어렵겠지만) 일희일비에 힘을 덜 쓰는 의연한 사람이 되기를. 뜨겁지 않은 대신 오래도록 따뜻한 마음으로 평온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기를. 그것이 2008년을 보내는 나의 보편적인 이별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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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12-31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마지막 새벽, 마지막 문단에 공감을 보내요. 꼭 그리 되길 바랍니다.^^

네꼬 2008-12-31 01:41   좋아요 0 | URL
깐따삐야님, 안 주무셨네요. 오래간만이에요. 악수 흔들흔들. 내년에 더 보편적인 고양이가 되어 깐따삐야님 서재에도 자주 들락거리겠습니다. 격려 고맙습니다. :)

2008-12-31 0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31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파피필름 2008-12-31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안녕하세요.. 마지막 문단.. 저도 그렇게 되고 싶네요. ^^

네꼬 2008-12-31 13:02   좋아요 0 | URL
스파피필름님, 안녕하세요. 내년에는 더 자주 만나요. 스파피필름님도 따뜻한 날들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

코코죠 2008-12-31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마지막 날에 네꼬님 글을 읽을 수 있어 기뻐요. 네꼬님 글을 읽으면, 뭔가 배가 부르는 느낌이랄까. 저도 막 글을 쓰고 싶어지고. 지난 한해는 네꼬님을 만나 행복했지요. 부디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꼬 2008-12-31 13:03   좋아요 0 | URL
올해의 마지막 날에 오즈마님에게 이런 메모를 받으니 저야말로 기뻐요. 끝을 알 수 없는 오즈마님의 다정+씩씩 에너지를 내년에도 많이많이 보여주세요. 우리 더 즐겁게 지내요. 착한 고양이가 되겠습니다. :)

순오기 2008-12-31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올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군요~~ 네꼬님, 해피 뉴이어~~
해마다 한 살 더 먹으면 달라질까 기대하며 살고 있는...^^

네꼬 2008-12-31 13:0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올해에는 순오기님과도 특별한(!) 인연을 맞이했었죠. 고맙습니다. 지금도 훌륭하시니 내년에 굳이 더 좋아지시려고 하지 마세요. 저희 기죽어요. ^^

L.SHIN 2008-12-31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팡, 당신은 이미 충분히 따뜻한 사람인걸요.
꽁꽁 언 차가운 발을 뜨거운 물에 담글 때, 나는 굉장히 행복하답니다.
네팡의 서재는, 글은 마치 그런 기분입니다.(웃음)

네꼬 2008-12-31 13:05   좋아요 0 | URL
쿠션님, 내년에는 서재에서 더 많이 만나요. 뜨거운 물은 아니더라도 그대의 언 발을 덮는 따뜻한 방석 정도는 되도록 애써볼게요. 한 해 동안 고마웠어요. 새해 따뜻하게 시작해요, 우리. ♣

마늘빵 2008-12-31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씨 연애했던거에요? ^^ 새해엔 좋은 사람 만나시고, 또 페이퍼질도 많이 해주세요. 시청에서 촛불 들며 만나기보다는, 따스하고 아늑한 카페에서 만나기를! 아니면 네꼬씨 좋아하는 술을!

네꼬 2008-12-31 13:06   좋아요 0 | URL
아니. 연애를 못 한 거죠. (-_-) 아프님의 응원에 힘 입어 좋은 사람도 만나고 페이퍼도 리뷰도 열심히 써볼게요. 술도 차도 좋지만 꼭 필요하다면 우리 내년에도 촛불 들고 만나요. (이런 신년인사라니..!)

무스탕 2008-12-31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그러니까 내년에 네꼬님께선 내 옆에 더 자주 계시길..
아니, 내가 네꼬님 옆에 더 자주 있을수 있길..

네꼬 2008-12-31 13:07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 내년에는 저 초록 문 앞에서 더 많이 야옹거리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반겨주세요. 지성과 정성에게도 고양이의 안부를 전해주세요. :)

비로그인 2008-12-3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시기를..
하하


네꼬 2009-01-07 17:55   좋아요 0 | URL
한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호홋

치니 2008-12-31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의 글이 있어서 2008년에 제 행복지수가 쪼금 더 올랐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요.
내년에도 잘 부탁 드립니다요.

네꼬 2009-01-07 17:56   좋아요 0 | URL
저는 하린 군의 노래가 있어서... (하핫. 농담이에요. 거기에 치니님까지 있어서 행복지수가 올라갔죠!) 올해에도 우리 아주 아주 사이 좋게 지내보아요. 늘 고맙습니다.

Mephistopheles 2008-12-3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그러고 말고요..우리 모두 내년엔 조금 보편적인 삶을 살았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덜 화내고 덜 짜증나고 덜 아프고 덜 피곤한 삶...^^
(앨범 노래가사에 혹시 "고등어"가 들어가나요?)

네꼬 2009-01-07 17:57   좋아요 0 | URL
네 메피님. 아주 아닐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덜 화내고 널 짜증내고 덜 피곤해하면서 살 수 있기를 같이 바라 보아요. (고등어라니 고등어라니 파르르)

노이에자이트 2008-12-31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도 건강하고 멋진 네꼬 님이 되십시오.

네꼬 2009-01-07 17:57   좋아요 0 | URL
노자님, 올해에도 좋은 글 많이 부탁 드려요. 저도 건강하고 멋있어지겠습니다. (어떤 노력을 해야 멋있어질지는 좀더 고민을.)

paviana 2008-12-31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과 함께라면 촛불도 좋아요.^^
그래도 술(!)부터 시작했음 좋겠어요.
올 한해 감사했어요.정말로요..
네꼬님같이 이쁜 글을 쓰는 분이 제 방명록에 불쑥 놀러오시면 깜짝 놀라면서도 무지 행복하답니다.ㅎㅎ

네꼬 2009-01-07 17:58   좋아요 0 | URL
파비아아님 퍼스나콘은 불쑥 나타나서 저를 막 웃게 해요. 언제나 고맙습니다. 우리 올해에도 서로를 막 놀래키면서 지내보아요. 하하핫.

아영엄마 2008-12-3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들수록 좀 더 의연해져야 하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여전히 일희일비하고 있으니 철은 언제 들라나 모르겠습니다. 의연해지는 길을 발견하시거든 네꼬님이 비법 전수를 해주소서~. 내년에도 계속 뵈어요~ 새해에는 소망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시기를~ ^^

네꼬 2009-01-07 18:02   좋아요 0 | URL
앗 아영엄마님, 오래간만이어요. 올해에도 엘리자베스 브라운의 왕성한 독서력을 보여주실 거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정말 의연해지는 좋은 방법을 알게 되면 꼭 동네방네 소문낼 테니(왜 아니겠습니까) 걱정 마세요. :)

마노아 2009-01-01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은 보편적인 단어를 특별하게 느끼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그 잔잔하게 서술하는 일상 속에서 스펙터클함을 느끼게 만들지요. 이 글은 2008년도의 마지막 날 쓰였지만, 2009년도의 새해 첫날 읽는 글로서 아주 행복한 힘을 갖고 있어요. 그 글을 오늘 읽어서 나는 무척 기뻐요. 나의 네꼬님!

네꼬 2009-01-07 18:04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지?' 하게 하시잖아요. 새해 격려로 해주시는 말씀인 줄 알면서도 그냥 저는 또 좋다고 웃습니다. (속이 없어 속이.) 마노아님, 새해에도 부빗부빗. 아시죠?

2009-01-01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7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4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7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