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있는 고양이 많이있어와 루돌프 한림 고학년문고 9
사이토 히로시 글, 스기우라 한모 그림, 고향옥 옮김 / 한림출판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우동'이었다. うどん. 식당 이름은 잊었지만, 간판 한쪽에 조그맣게 쓰여 있던 うどん이 내가 교재 밖에서 처음으로 읽은 일본어였다. 한겨울 종로바닥에서 우. 동. 이라고 소리 내는 순간, 그 소리가 어떤 사물을 가리키는지 내가 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따끈한 국물을 마신 것처럼 몸이 갑자기 따뜻해졌다. 가벼워졌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날아갈 것 같았다. 그래, 이제 일본어를 읽을 수 있어! 그 일 년 전 선배들을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일본 여행을 갔을 때, 말을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히라가나 가타가나를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뒤늦게 얼굴이 하얘져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선배에게서 10쎈티도 안 떨어지려고 징징 울며 쫓아다녔던 나다. 일본어 학원에 등록을 해놓고 먼저 히라가나라도 외우기로 결심했는데 그게 쉬울 리 없었다. 나는 조그만 카드에 히라가나를 한 글자씩 쓰고 뒷면에 "카" "키" "쿠" 등 발음을 적었다. 그러곤 (무작위로) 카드를 뒤집으면서 내가 읽은 게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카드를 다 뒤집은 다음에는 "카"라고 쓰인 카드를 보고 연습장에 'か'라고 써본 다음 카드를 뒤집어 그게 맞는지 확인했다. 이 단순한 암기를 위해 이 나쁜 머리를 얼마나 굴리고 이 둔한 손을 얼마나 고생시켰던가. 그랬던 내가 드디어 "우동"을 읽은 것이다. 이제 됐다. 당장 일본으로 뛰어갈 테다. 맨 처음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우동을 주문해야지. 이제부터 나는 우동을 제일 좋아할 테다. 불끈.

그랬던 나이기 때문에, 『교양 있는 고양이 많이있어와 루돌프』에서 루돌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인간의 글자를 익히고 있을 고양이들은 빼고.) 루돌프는 고양이다. 생선가게 주인에게 쫓겨 도망가다가 도쿄로 가는 트럭에 올라타는 바람에 떠돌이 신세가 되기 전까지는, 사람의 집에서 사람과 함께 사는 고양이였다. 낯선 곳에서, 그것도 완전히 집 밖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막막한 처지이지만 루돌프는 기죽지 않는다. 뒤에서 날아드는 돌멩이가 얼마큼 멀리 가는지 만으로도 던지는 사람의 상태를 짐작해 뛰면서도 전략을 짜고, 음식을 먹기 전 안전한 장소인지 먼저 살피는 것이 몸에 배어 있을 정도로 제 몸 하나 건사할 능력이 되는 '고양이'인데다가 도쿄에 정착한 첫 날 알게 된 고양이 '많이있어'가 든든한 형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이 이상한 이름에 나는 사실 불만이 좀 있다. "나는 루돌프다. 넌?" "나 말이냐? 내 이름은 말야, 많이 있어." "뭐? 이름이 '많이있어'야?" 이런 대화 끝에 루돌프가 많이있어를 많이있어라고 부르게 된 것인데, 아무래도 좀 어색하다. 아마도 작가는 무언가 사연이 많은 고양이라는 의미로 이런 이름을 붙였을 테니, 누구 말대로 '파란만장'이나 '잔뜩이' 같은 이름으로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하지만 다른 대목에서는 모두 번역이 아주 재미나므로 통과.)

많이있어는 다른 고양이들보다 덩치가 큰데다가 싸움을 아주 잘해서 근방의 고양이들이 벌벌 떤다. 그런 많이있어의 카리스마를 완성하는 것은 바로 그가 글자를 읽을 줄 안다는 것. 전 주인이 그를 두고 외국으로 떠나기 전에 글자를 가르친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고양이가 글자를 익혔는지 안 익혔는지 주인이 정확히 알 수는 없었겠지만 어쨌든 끈기 있는 반복 학습 끝에 많이있어는 '신문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게 그의 길고양이 생활에 많은 도움을 준단다. 루돌프는 많이있어에게 글자를 배우기로 하고 날마다 모래밭에 글자 쓰는 연습을 한다. '앞발이 먹먹'해지도록. 카드를 뒤집으면서 히라가나를 외웠던 내가 그 위로 겹쳐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참, 머리말에서 루돌프가 말하길, "인간이 인간의 글을 배우는 데도 고생고생하는데, 하물며 고양이가 인간의 글을 배우는 건 더 힘들지 않겠니?" 네에.

그런데 고양이가 글자를 알아서 좋은 게 뭐가 있을까? 두 고양이가 들락거리는 초등학교의 급식실 메뉴판을 읽어서 스튜가 언제 나오는지 알아두는 것도 물론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바람에 날려 온 포스터를 읽어 집으로 돌아갈 단서를 얻는 것처럼 중차대한 일에도 쓸모가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교양'을 쌓는다는 것이다. 많이있어와 루돌프가 말하는 교양은 책에 나와 있으니 내가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 두 고양이조차 모르는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이들이 글자를 알게 되면서 생각과 생활과 모험의 범위가 넓어지고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고 끝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이건 한 편의 좋은 동화가 한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과 일치한다.) 물론, 인간의 글자 따위를 모른다고 해서 고양이들이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긴 하지만.


그런데 '글자를 배우는 고양이'라는 건 이 책에 들어있는 촘촘한 모험담의 일부에 불과하다. 고양이 눈에 비친 인간 군상, 많이있어의 숨은 상처, 그를 견제하는 무서운 개 데블, 그 둘 사이의 다툼이 가져온 뜻밖의 결과, '미련한 자는 절망을 안고 사는 법', 루돌프의 마지막 결정, 그리고 다음과 같은 중요한 대목이 결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나는 말할 수 없다.


   
 

"야! 비둘기 너! 한입 거리도 안 되는 자식이 까불고 있어. 한 번만 더 이 부근을 얼쩡거려 봐라. 그땐 두 귀때기를 싹둑 잘라 도라에몽 얼굴로 만들어 주겠다, 알았냐!"
그렇게 말하고 비둘기를 노려보니, 비둘기는 귓불이 없어서 원래부터 도라에몽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둘기는 "꾸우." 하고 한 번 울고는 날아가 버렸다. 나는 좀 머쓱해서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야, 이 멍청아, 꼴좋게 됐다!"
하고 누가 멍청인지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소리쳐 보았다.

 
   

마지막 한 페이지까지 손을 떼지 못하게 이어지는 사건들이 얼마나 개연성 있는지, 잊을 만하면 한번 씩 나오는 유머가 얼마나 귀여운지 나는 글로 설명을 할 재간이 없다. 다만 이 책이 (필시 사연이 있을 것이나 납득하기가 어려운 표지에도 불구하고) 바로 네꼬 씨가 뽑은 '올해의 책'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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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11-30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글 안 써주신다고 징징 댄 보람이 있군요. 역시 네꼬님은 최고.

네꼬 2008-12-02 22:01   좋아요 0 | URL
하하 어디서 징징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치니님이었군요. 으하하. 좋아라. 고맙습니다. (쓰다듬을 강요하며 머리를 들이밀고 있음.)

도넛공주 2008-11-30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네꼬님 리뷰 중에서 상당히 어려운 축에 속하는 듯...그래도 책은 웃긴다 이 말이지요?

네꼬 2008-12-02 22:02   좋아요 0 | URL
ㅠㅠ 어려운 리뷰로 보였다면 (역시) 제가 막 어수선하게 써서 그런 거예요. 이 책은 아주 단순하며 가지런하면서도 개성이 있고 꽉 짜였으면서 유머가 있어요. 그러니까... 제 리뷰하고는 정반대. (왜 이리 슬플까요.)

하이드 2008-12-01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의 고양이는 네꼬님과 닮았...
재미있을 것 같아요. 보관함으로 슝-

네꼬 2008-12-02 22:03   좋아요 0 | URL
아니아니 하이드님 저 고양이와 제가 어딜 봐서 닮...
보관함으로 슝-보다 어째 하이드님이 슝-하고 도망가시는 것 같은데요. 어딜!

L.SHIN 2008-12-01 0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 먼저 인사부터 하고, "나의 네팡, 안녕! 오랜만입니다! 웡웡~!! ^^"

제가 처음에 히라가나를 배울 때는, 가르치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50분 주겠다. 외워"
그 선생이 조금 무서웠기 때문에 저는 미친듯이 그 시간 안에 외웠습니다만은,
도무지 가타가나는 안되더군요.ㅡ.,ㅡ (지금도 가타가나는 싫다눈..)

그런데, 이 리뷰, 참 마음에 드는군요.(웃음)

한,두 달 전이었던가.
밤에, 짚 앞에서 길 잃은 새끼 고양이를 보았습니다.
처음 봤는데도 저를 무척 따르더군요. 솔직히 말해 키우고 싶었습니다만은..
같이 사는 S의 반대로..너무 가슴 아파 하며 집 앞에 우유만 놓고 복도에 숨었습니다.
그렇게 수십 분, 고양이가 저를 찾아 우는데도 저는 조용히 창문에서 처다만 보았는데,
지금도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프군요.
그냥 내가 좀 강하게 키우자고 우길걸..하는 후회도 해봅니다.(씁...)

네꼬 2008-12-02 22:05   좋아요 0 | URL
왈왈왈! 아니아니 쿠션님. 우리 너무 오래간만이잖아요. (나도 쿠션님도 우리가 함께도!) 저도 왕왕왕이에요.

아니 히라가나를 어떻게 50분만에 외우셨어요. 강하게 배우셔서 일본어에 강하시구나. 저는 더듬더듬 배운 덕에 여전히 더듬더듬 하고 있어요. (핑계는!) 그 고양이도 꼭 자길 데려다 길러달라기보다 알아봐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그렇게 야옹거렸을 거예요. 음... 그런 의미에서 아쉬운 대로 저를 데려다 기르시는 건 어때요?

L.SHIN 2008-12-03 07:18   좋아요 0 | URL
좋죠.
'아쉬운대로'가 아니라 '기쁘게도' 데려다 기르겠습니다. ㅡ_ㅡ (훗)
그 전에..방 청소 좀 하고요..ㅋㅋㅋ

네꼬 2008-12-03 08:39   좋아요 0 | URL
하핫. 이 쿠션 저 쿠션 먼지 나게 뛰어다녀야지. ㅋㅋ

보석 2008-12-01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시 사연이 있을 것이나 납득하기가 어려운 표지에도 불구하고" 낄낄. 뭐..디자이너에게도 일러스트레이터에게도 사연은 있겠지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네꼬 2008-12-02 22:07   좋아요 0 | URL
낄낄. 하핫. (디자이너에게 미안한 마음.) 본문의 일러스트는 좀 예스럽긴 해도 귀엽고 좋아요. (해석이 좋아요 해석이.) 찾아본 건 아닌데 아마 저 표지가 일본 원서의 표지 그림을 그대로 가져온 게 아닌가 싶어요. 그게 계약 조건이었을 수도 있고... 그래도 이건 뭔가 아닌 것 같은. (책은 정말 재밌다고요.)

다락방 2008-12-01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게 바로 네꼬님의 올해의 책이로구나! 으응. 기다렸어요, 올해의 책 발표를. 이것이었군요, 이것이었어.


그나저나 나는 글로 설명을 할 재간이 없다, 니. 벌써 이렇게 글로 다 설명해놓고! 아주 맛있게 써놓고서는. 네꼬님은 겸손쟁이. 내가 좋아하는 겸손쟁이.
:D

네꼬 2008-12-02 22:09   좋아요 0 | URL
겨울이에요, 다락님. "다락방"이라는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 계절, 따뜻하고 아늑한 다락방에서 뒹굴뒹굴 노는 노란 줄무늬 고양이가 되고 싶사와요.

(생각만으로 몽롱)

올해의 책들이라면 여러 권이 있겠지만 올해의 "책"은 바로 이거예요. 아주 동화다운 동화를 만났어요. 아주 좋은 동화를. 사람으로 치자면 다락님만큼이나 좋은 동화를. (아흣. 간만에 느끼한 말 하니까 속 시원하고 좋다.)

웽스북스 2008-12-03 02:58   좋아요 0 | URL
느끼하면서 속시원하기로는
소고기 무국만한게 없지요. ㅎㅎ

다락방 2008-12-03 08:34   좋아요 0 | URL
버섯전골이 먹고 싶어졌어요. 뜨거운 소주와 함께. 므흣 :)

네꼬 2008-12-03 08:39   좋아요 0 | URL
좋은 코스가 생각났어요. 우리 셋이 만난다면 홍대 앞에서 맛있는 버섯 매운탕과 소주를 마시고 1) 맥주를 마시거나 2) 더 맛있는 안주가 나오는 술집에 가는 거예요. 와, 생각만 해도 흐믓한 풍경. (송년신년 모임으로 어때요?)

코코죠 2008-12-01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나의 네꼬님 글을 읽으니 오즈마의 마음이 그만. 아직 한번도 후후 불지 않은 몹시 뜨거운 우동국물같아졌어요. 저는 네꼬님 글을 너무 너무나 좋아하는 것 같애요. 서둘러 읽을까봐 스크롤을 함부로 내리지 못하고 아주 천천히 움직였어요. 아아, 나는 네꼬님 글을 너무 너무나 좋아해요 정말.

네꼬 2008-12-02 22:11   좋아요 0 | URL
오즈마님이 "마음이 그만... 뜨거운 우동국물같아졌어요"라고 하면 정말 얼마나 귀엽고 웃긴지 몰라요. 하하하. 오즈마님은 어쩐지 우동을 좋아하실 것 같아요. 통통 쫄깃 탱탱한 면발과 멸치다시마 진한 국물, 신선한 쑥갓. 아아. 저는 우동을 아주 좋아해요. 하지만 오즈만님만큼 좋아하진 않아요. 오즈마님이 저한테 이렇게 하트를 쏘아주시는 것 때문에 막 기분이 좋은 것 만큼, 그렇게 좋진 않아요, 우동 정도는!!!

웽스북스 2008-12-03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올해의 책. 우와 우와, 뽑혔구나.
나도나도 읽어봐야지. ㅎㅎ

나는 '많이있어'의 누나 '많이먹어'에요 ㅎㅎㅎ

다락방 2008-12-03 08:34   좋아요 0 | URL
저는 '많이먹어'의 언니 '더많이먹어' 에요 ㅎㅎㅎ

네꼬 2008-12-04 09:07   좋아요 0 | URL
으하하. 많이먹어와 더많이먹어 너무 맘에 든다. (내가 먼저 말할걸! 배가 아플 정도예요.) ㅋㅋ

다락방 2008-12-04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오늘 이 책 배송되요. ㅎㅎ
땡스투는 물론 하고 구입했어요. 그러니 나의 땡스투가 적립되거든, 근사한 책도 좀 사고, 화장품도 좀 사고, 음반도 좀 사고 해요. ㅎㅎㅎ

네꼬 2008-12-04 09:07   좋아요 0 | URL
지금 제가 다락님이 주신 땡스투로 읽고 바르고 듣고 난리잖아요. 아이고 그러고도 돈이 남네. 이건 저금해야지.
:)

2009-04-07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