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닉네임을 '베짱이'로 바꾸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서 베짱이 편을 드는 네꼬 씨이지만, 이렇다 할 장기도 하나 없는 처지에 오로지 게으르기 때문에 베짱이가 된다는 건 무척 부끄러운 일이다. 나름대로는 리뷰를 써보려고 연필 몇 자루 꼭지를 씹었는데, 맘 먹고 쓰려고 하면 석 줄 이상 써지질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려던 얘기를 꺼내기까지, 대문에서 현관까지 진입로가 너무 길다. 봐, 지금도 그렇잖아.

 

그래, 알았다 알았어. 가즈키가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너무 의젓해졌다. 의젓한 게 나쁠 건 없는데 '너무' 의젓해진 게 문제라면 문제다. 이렇게 하면 뒷 이야기랑 연결되겠지. 이렇게 하면 다양한 시점을 보여줄 수 있겠지. 이렇게 하면 따뜻한 마무리가 되겠지. 가즈키는 이런 걸 다 생각해서 수첩에 적어 본 다음, 절대로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이야기를 풀어낸다. 가즈키가 '감질맛'을 낼 줄 안다니 놀랍고 한편 반가운 일이지만 (어느정도 짐작을 하면서도 마지막 이야기 <로마의 휴일>에선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어쩐지 나는 <<Go>> 시절의, <<레볼루션 넘버 3>> 시절의, <<플라이 대디 플라이>> 시절의 그가 그립다. 플라이 대디 시절의 그도 나름 의젓했는데. "상상을 하면서 움직여. 우린 인간이지 기계가 아니야." 이런 명대사를 나처럼 암기력 떨어지는 고양이가 외우게 할 만큼.

 

 

"아내가 종이 위에 적어준 장거리들처럼 / 인생의 세목들이 평화롭고 단순했으면 좋겠다" (<장보러 가는 길>)

"가장 뚜렷한 손금인 줄 알았는데 / 깊이 파인 흉터이듯이 / 무엇을 쥐었다 베었던가 / 생각은 안 나지만 / 손이 아주 아팠던 기억은 있듯이 / 그렇게 남자는 여자와의 사랑을 되돌아볼 것이다" (<평범해지는 손>)

"인용과 각주 / 어제의 통화 내용 / 부르주아 대가족 / 불어의 R 발음 / 모교의 정문 / 옛 애인들 (가나다 순) / 컨설턴트의 고객 개념 / 칸트의 물(物) 자체 / 물 자체라는 말 자체 / 라벤더 향기 / 아래쪽 / 토성" (<나를 환멸로 이끄는 것들>)

시인이란, 우주 속에 지구 위에 이 땅에 혼자 굴을 파고 쪼그리고 앉아서 그가 떠나온 저 먼 별을 자꾸만 바라보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한숨을 폭폭 쉬는 족속들이구나. 잘해주고 싶다, 시인들에게. 이 시집을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치과 의자에 앉아 의사를 기다리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해준다는 것보다 더 큰 장점이 있다. 바로 (그 흔한) 여행 사진이 한 장도 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좋으나 싫으나 빌 브라이슨이 걸어다니는 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그가 파리의 건널목에서 파란 불에 건넌다는 이유만으로 차들의 살해 위협에 시달리면 나도 "깜짝이야!" 소리를 내면서 사방을 살펴야 한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술 값이 얼마나 비싼지 은행 대출을 받지 않으면 술 한병 살 수 없다는 진술에 "이 허풍쟁이" 하면서도 그쪽 여행은 일단 뒤로 미루는 게 좋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가 길고 지루한 기차 여행과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하는 끝없는 계단을 극복한 끝에 "세상에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광장"을 내려다 보며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라고 할 때 나 역시 카프리에 도착한 벅찬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사진이 없기 때문에. 그동안 내가 왜 사진이 멋진 여행서에 침을 흘렸던 거지? 의아할 정도. 이따금 등장하는 카츠 씨, 반갑다. (소설가 김영하 표현 대로라면, '옆에서 고소영이 정우성 어깨에 올라 타 상모를 돌린다고 해도 눈길을 줄 수 없을 만큼 재밌는' <<나를 부르는 숲>>의 그 친구다.)

 

어쩌면 조금 먼 곳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아주 아주 재미있고 웃기면서 또 참을 수 없이 안타까워서 중간에 몇 번이나 책을 덮어야 했다. 몇 통의 편지가 사람 마음을 활짝 열어버릴 수가 있다. 어디까지가 친밀함이고 어디까지가 우정이고, 어디서부터가 사랑일까. 내가 제일 안타까웠던 건 (사실은) 에미의 남편의 편지였다. ㅠㅠ

좀 다른 얘긴데, 여기 나오는 에미의 말투는 독일의 그녀, 그러니까 하이디 씨와 말투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난 자꾸 하이디 씨의 편지를 엿보는 것 같은 미안함과 즐거움에 빠지곤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책 독일책이구나. 하이디 씨 소개해줘야지.

--새벽 세시.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세벽 세시의 전화를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 고양이다.

 

치과에 갈 일이 생겼다. 그것도 갑자기. 이 충격과 슬픔과 공포를 극복하지 못해 쩔쩔 매다가 진정을 위해 책을 두 권 주문했다.

 

 

 

 

 

 

고미 타로의 <<악어도 깜짝 치과 의사도 깜짝>>은 이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그림책 베스트 5에 들 책이다. 그래 치과의사도 무서울 거야. 남의 입 속에 머리를 들이미는 일이 자기라고 좋겠어? 끼이이 소름끼치는 기계 소리가 자기라고 좋겠어? 윌리엄 스타이그의 <<치과 의사 드소토 선생님>>은 "제발 도와주세요. 이가 너무 아파요"라고 울먹이는 여우의 표정이 가슴 미어진다. 한편 치료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치료를 다 받은 다음 (생쥐) 치과 의사를 잡아먹으면 "나쁜 일일까 아닐까" 라고('나쁜일일까'가 아니라, '나쁜일일까 아닐까'라는 게 중요하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여우의 표정은 폭소를 자아낸다.

치과에 가서 검사를 받으니, 내가 그리 아플 것은 아니지만 의사로서는 무척 까다롭고 귀찮은, 한마디로 "내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요" 하는 (그 의사가 정말 그렇게 털어놨어요) 치료를 받아야 된단다. 그 난감함을 나에게 표현하는 의사에게 내심 서운했지만, 혹시 그래서 나에게 앙심을 품고 아프게 치료할까봐 두번째 치료 때 <<치과 의사 드소토 선생님>>을 선물했다. 의사는 정말 깜짝 놀라서 마치 손을 대면 안 되는 물건을 받는 듯한 태도로 그림책을 받아 들었다. 세번 째 치료를 시작하기 전, 의사는 여섯살 난 아이가 그 책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앗싸, 다행이다.) 아니나 다를까, 치료를 마쳤는데 의사가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나를 굳이 붙잡고 앞으로의 치료 과정을 아주많이 친절하게 따뜻하게 설명해줬다. 책은 참 쓸모가 많다는 (오늘도 역시) 엉뚱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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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8-10-21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예고는 태그인가요? 올해는 아직 두달도 더 남았다구요 ㅡㅜ (올해가 가는게 못내 아쉬운 1人)

빌 브라이슨은 트래블에세이는 이런것이다.를 보여주는 작가죠. 전 지금 아프리카 다이어리 보고 있어요. ^^

네꼬 2008-10-21 00:59   좋아요 0 | URL
앗 하이드님 안 주무셨네. 안 그래도 하이드님 글 읽다가 하마터면 이 책 원서로 살 뻔했어요. (^^) -- 다행히 안 샀다능. -_-

아프리카 다이어리도 재미있....겠지. 오죽할까. 그 책 컨셉만 보고도 좋아진 1人. (두달이 남았지만 전 벌써 올해의 책을 정해버렸거든요!)

turnleft 2008-10-21 0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잔뜩 들어간 여행기를 쓰다가 네꼬님 글을 보고 움찔.. -_-;;

네꼬 2008-10-21 09:11   좋아요 0 | URL
걱정마세요 레프트님. 저는 저 아래에 사진으로 도배한 여행 포스트를 몇개씩이나 달았는걸요. 하핫. 하지만 이렇게 한번씩 글자만으로 안내되는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은 듯해요.

다락방 2008-10-21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네꼬님.
저 빌 브라이슨의 저 책을 살까말까살까말까살까말까 막 이러고 있었거든요. [나를 부르는 숲]을 보고 몇번이나 쿡쿡 거렸기 때문에 살까말까살까말까살까말까 막 이랬는데 음 역시 사야겠어요. 불끈!

네꼬님 페이퍼 읽으니깐 또 막 좋다.

네꼬 2008-10-21 09:13   좋아요 0 | URL
재미난 책이에요. 치과에서 정말 웃어 버렸다니까요. (다행히 치료를 시작하긴 전이었어요.) 읽어보세요, 불끈!

"또 막" 좋다니 으휴 >.<

다락방 2008-10-21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네꼬님의 치과의사 참 좋으네요 ㅎㅎ

네꼬 2008-10-21 09:15   좋아요 0 | URL
음. 처음엔 친절한 건지 아닌지 좀 헷갈리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원래 의사들에게 썩 친절한 환자가 아닌데(이게 무슨 소리) 치과에만 가면 한없이 작아진다능. 뇌물 좀 썼죠! 하핫.

웽스북스 2008-10-2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의 올해의 책 궁금해요. ㅎㅎ
남은 두달동안,
아 이 책이 올해의 책보다 더 재밌으면 어쩌지... 하면서 보는거 아냐? ㅋㅋㅋ

근데 누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미보다 베짱이를 지향한데요?
나는 개미를 지향해요. 정확히는 개미...허리! ㅋㅋ
내 몸은 점점 지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ㅜㅜ

다락방 2008-10-21 16:05   좋아요 0 | URL
저는 개미를 지향하기는 하는데
사는건 베짱이라는 ㅋㅋ

네꼬 2008-10-22 18:56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 아, 나 그 생각은 못했어요. 그러고 보니 그럼 두 달 동안 은근 걱정하면 살아야 되잖아. 어떡하지...?=_= 그때 만난 바로는 개미 허리 이미 이루신 것 같은데! 나는 날이 갈수록 "뜻밖의 몸매"가 되어가는 것 같아 서러워요. 그런 마음 뭔지 알아요? ㅠ_ㅠ (눈물바다)

다락방님.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게으른' 개미인 것 같아요. 맘편히 놀지도 못하면서 일도 안 해. ㅠㅠ (눈물바다2)

홍수맘 2008-10-21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항상 귀여워요~ --- 옆에 있으면 앙~ 깨물어주고 싶어요 ㅎㅎㅎ.
너무 오랜만이죠? 잠깐 짬이나 들어왔어요.
저도 왕 베짱이가 됬는지 요즘은 자판 두드리는 것도 귀찮아 거의 눈팅과 패쓰만 하고 있다는...
님이 올리신 책들요~~ 요즘 지를까 말까 고민하는 책들이랍니다. ^^.

네꼬 2008-10-22 18:58   좋아요 0 | URL
홍수맘님 안녕하세요?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그리 바쁘신 것을 보니 하시는 일이 잘 되어가시는 거죠? ^^ 곁에 있었다간 깨물릴 뻔했으니 이마아안큼 떨어져 있는 게 (오늘은) 다행이네요. ((그런데 귀엽다뇨. 저 왜 죄 짓는 기분이 들죠....?-_-;;) 베짱이 클럽에 여기 회원 한분 추가네. 하핫.

2008-10-21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2 1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8-10-21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 이런 뇌물이라면 무조건 받고 잘해주고픈, 그런 환자네요. 한 수 배웠어요.
어쩌면 네꼬님은 제 상상보다 훨씬 사회생활 잘 하실지도 ... ㅋㅋ
보관함에 하이디 말투 책을 담습니다. 빌브라이슨도 예전에 담아뒀는데 당분간은 여행 관련 책을 자제하려구요, 흑.

네꼬 2008-10-22 19:01   좋아요 0 | URL
그쵸 그쵸, 제 뇌물은 정말 잘 통한 거겠죠? (야아 싸다 싸.) 근데 상상을 어떻게 하고 계셨기에... 아무려나 사회생활은 저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잘하고 있죠. (뭐래니?) '새벽 세시..'의 에미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하이디이면서 저를 먹여주고 재워준 독일의 그녀 하이디이기도 해요.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만나보시길. 여행관련 책은 왜 자제하세요? 놀러 가고 싶어질까 봐? (질러요 질러)

Koni 2008-10-22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다음 포스트가 완전 기다려집니다.^-^

네꼬 2008-11-30 13:03   좋아요 0 | URL
냐오님이 댓글을 주시고도 한 달이 더 넘었네요. (.. ) ( ..) 게으른 네꼬 씨를 용서해주세요;

2008-10-26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30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20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30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라니 2008-11-22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슬픔이없는십오초.. 주문하고 싶군요.ㅠ
전, 제가 아는 시인은 정호승 뿐인걸요.
제 사랑이 흔들리면 어쩌죠... 두렵.




네꼬 2008-11-30 13:05   좋아요 0 | URL
고라니님 안녕하세요? (주문하세요, 주문하세요. 부채질 훨훨) 그 정도에서 흔들릴 사랑이라면 진작 흔들리는 게 좋아요. 어서 읽어보세요. (응? 무슨 소리?)

2008-11-29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30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11-30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모있는 책인데~ 아무도 추천은 안 했군요.^^ 뒷북이라도 꾸욱~~
올해의 책 페이퍼로 하나 올려봤어요. 책 받은 날에~~~

네꼬 2008-11-30 13:1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어엇 그런데 올해의 책 페이퍼라, 오옷 보러 가야겠군요.

순오기 2008-11-30 15:35   좋아요 0 | URL
창비어린이가 선정한 올해의 책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