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동거녀는 명절을 맞이하여 각자의 집에서 소극적인 일전을 치르고 어느 정도씩 지친 채로 추석 오후에 조우했다. 심신의 피로를 풀고자 무지 달고 차가운 커피를 한잔씩 마시고, 저녁에는 영화 [텐텐]을 보러 갔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영화관이 그토록 고요한 것부터 일단 괴이한 일인데, 9시가 다 된 시각,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고요한 영화관 앞에 오리 두 마리가 지나가는 것은 또 얼마나 괴이한지. "얘들은 문제가 생긴걸까, 아님 산책 삼아 나온걸까?" 내 말에, 옆에서 구경하던 남녀가 킥킥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도 산책하는 영화구나.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니 이미 밤은 늦었는데 동거녀가 닭 반 마리를 구워먹자고 한다. 내가 거절할 리가 있나. TV에선 추석 특선으로 [원스]를 해준다. 우리는 EBS를 찬양하면서 맥주를 한 잔씩 마시고 '오늘의 영화 풍년'에 대해 만족한다는 내용의 수다를 나눈 다음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동거녀는 부지런히 세탁기를 돌려놓고는 화분 분갈이 세 개를 해 왔다. 나는 모처럼 늦잠을 잤다. 점심으로 함께 꽁치조림을 먹고, 동거녀가 컴퓨터로 무언가 일을 하는 동안에 나는 내 빨래를 돌리고 방 청소를 했다. 날이 너무 더웠다. 동거녀는 "대통령이 덕이 없으니 추석에도 날이 덥다"며 화를 냈다. 나도 같이 화를 낸 다음 하나TV로 MBC 스페셜 [자연산]을 보았다. 우리는 저녁을 간단히 먹은 다음, 짧은 연휴를 보람되고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목욕을 갔다. 우린 참 사이가 좋은 하우스메이트다.

 



텐텐. 미키 사토시 감독. 오다기리 죠-미우라 토모카즈 주연.

최악의 한계를 거듭 갱신하는 삶을 살고 있는 늙다리 대학생 후미야와, 사랑하는 아내를 홧김에 죽이고 자수하러 경시청까지 걸어가기로 마음 먹은 사채업자 후쿠하라. 두 남자가 사흘간 도쿄산책하는 이야기이다. 저 아래 고라니님과의 댓글 대화에서 밝힌바, '남자가 많이 나오고 로맨스가 별로 없으면서 웃긴 영화'를 선호하는 나로서는 이 영화를 안 볼 수 없는 노릇.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는 영화 후반에 이르면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유사가족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런데 진짜 가족이 아니라 '유사' 가족이기 때문에.... 사이가 좋다. -_- 가족 중 최고는 가짜 가족이라는 게 영화의 교훈인 모양이라고 동거녀와 생각을 모아봤다. 우리가 사이가 좋은 것은 가짜 자매이기 때문인가 봐.

붙임: 동명의 원작소설 소개를 보니, 이들은 유사가족이 아니라 (뜻밖의 형태로) 진짜 가족인 모양이다. 그것 참 뜻밖이네. 갸우뚱.


댓글(2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ong 2008-09-16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늦은 밤 닭을 구워먹자고 하는 동거녀라니...!
너무 부러워요 악악

네꼬 2008-09-16 18:03   좋아요 0 | URL
부럽죠 부럽죠. 심지어 구워주기까지 했다능. ^^
얼마나 달고 맛있던지. (응? 달아?)

다락방 2008-09-16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가오는 토요일에 이 영화를 보러갈까, 아님 『달려라 자전거』를 보러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고민하고 있어요. 훗. 일본 영화는 저랑 잘 안맞는 것 같아서 살짝 망설이고 있달까요.

저도 추석동안 닭을 먹었어요. 계속해서 먹었어요. 후라이드치킨에 심지어는 닭발까지 먹었어요. 소고기도 먹었고 꽃게탕도 먹었어요.

그래서!
오늘부터 운동 열심히 하겠습니다! 불끈!!

(휴....)

네꼬 2008-09-16 18:05   좋아요 0 | URL
나를 그 괴이하도록 고요한 영화관으로 이끌었던 분은 바로 다락님! 고마워요. (동거녀에게도 그렇게 말해주었어요.) 살짝 고민되는 영화라면 꼭 안 보셔도 되어요. (세상에, 안 그래도 고민할 게 얼마나 많은데!)

제가 먹은 건: 갈비찜, 전, 떡볶이, 오뎅국, 닭고기, 또 뭐더라? 암튼 되게 많은데. 우리 같이 운동해요. 까짓거!

치니 2008-09-1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EBS를 찬양하면서 <원스>를 다시 한번 봐주고, 다음날엔 내쳐 <텐텐>이나 <콰이어트룸으로 오세요>를 보려 했지만...가짜 가족 정도의 급에 속할만한 친구가 시간과 의욕이 모자란 나머지 괜히 포기. 이 글을 보니까 혹시 보러 갔다면 먼 발치서 네꼬님을 봤을 지도 몰라, 막 이런 생각에 후회 막급.

그나저나 네꼬님, 꽃양배추님네서 수다 떤 거 조금 전에 봤는데요, 이미 마흔 넘어서도 치니라고 불리는 저 같은 인간은 어쩌라고욧! 흥피치쳇,흑, 너무해.(포스팅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해도 된다고 굳게 믿음)

네꼬 2008-09-16 18:08   좋아요 0 | URL
같은 날 SBS에서는 "올추석 최고의 블록버스터"라나 하면서 요란하게 광고한 특선 영화가 <매트릭스 2>였어요. -_-;; 그 광고에 분개하면서 채널을 돌렸는데 <원스>가! 다시 보니 장면마다 명장면이더군요. ♪ 저것이 바로 음악영화로구나~

텐텐 보셨다면 우리 수다 떨면서 또 좋았을 텐데, 살짝 아쉬워요. 언제 기회가 되시면 보아주세요. 착하고 슬프고 따뜻한 영화예요. 그나저나 "치니"는 "네꼬"보다 훨씬 어른같은 이름이잖아요. 흥피치쳇 하실 일 아니니까 자자 노여움 푸시고... (아이스티 한 잔 드릴까요?)

마늘빵 2008-09-16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아 나도 토욜날 텐텐 봤다요. 이화여대 안에서. 일욜날은 더 걸 봤다요. 월욜날은 영화는 영화다 봤다요. 나 자랑질하는거 맞다요. =333

다락방 2008-09-16 17:53   좋아요 0 | URL
아프락사스님, [더 걸] 어때요? 저도 살짝 찜해두고 있는 영화라서요. :)

네꼬 2008-09-16 18:09   좋아요 0 | URL
아프님. 어떻게 이대 안에서..? 역시 미모남은 다르구나. 이어지는 영화의 향연. 이 바람둥이! 응? 아니, 아니지, 이 자랑쟁이!

다락님. 아프님의 영화 취향을 믿소? (괜한 시비)

마늘빵 2008-09-16 19:21   좋아요 0 | URL
더 걸, 개운치 않은 결말이지만 좋았어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독일이 이정도면 한국은 훨씬 심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냐옹씨 / 이대 안에 극장이 있더라궁. 바바.. 바람둥이가 왜 나와욧! 난 암말도 안했어. ('' )( '') 더 걸도 좋고, 영화는 영화다도 좋고. 음흐흐.

네꼬 2008-09-17 00:00   좋아요 0 | URL
바바.. 아프님. "음흐흐"만 봐도 그대의 일면이... ^^ 참, 아프님 얼렁 소개팅해야지. 시국은 조만간 진정되기 어려울 듯한데!

마늘빵 2008-09-17 09:13   좋아요 0 | URL
으하핫. ^^*

순오기 2008-09-16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흘간의 도쿄 산책~ 너무 멋진데요. 예전에 본 '토쿄 맑음'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EBS에서 오후엔 '어바웃 어 보이'와 한밤엔'원스'도 봤어요. 모처럼 TV영화 졸지 않고 봤어요.ㅎㅎㅎ

네꼬 2008-09-16 18:10   좋아요 0 | URL
<어바웃 어 보이>는 저의 완소 영화. 저는 몇 번을 봤는지 셀 수도 없어요. 그러니 EBS 찬양이 절로 나오죠! TV 영화는 부담 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볼 수 있어서 좋아요. 뜻밖의 월척도 낚이고요. ^^

다락방 2008-09-17 09:08   좋아요 0 | URL
알았어요, 알았어.
[어바웃 어 보이] 디비디 사겠어요. 불끈!

웽스북스 2008-09-16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네꼬님 노트북 사니까 디게 좋다... (네? 이거 회사에서 쓴거라구요?)

네꼬 2008-09-16 23:56   좋아요 0 | URL
(임시 저장 기능을 활용했다고 궁색한 변명을...)

마노아 2008-09-17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짜라서 좋은 것! 오늘의 명언이에요!
오리와 고양이라니, 그 풍경도 다른 사람 눈에는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

네꼬 2008-09-21 10:47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사람들도 좀 웃겼겠네요. (난 또 내 생각은 못했네.) 마노아님은 진짜죠? ^^

2008-09-18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21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24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da 2008-09-19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레함만으로 불멸의 아우라를 뽑아내는 인간은 오다기리 죠밖에 없을 거예요.
아, 저 영화 보고 싶다.
저는 추석 때 원스는 못 보고 투야의 결혼 봤는데, 너무 좋았어요.
그러고 보니 그것도 일종의 '가짜' 결혼 이야기네요.
가짜는 뭐니 뭐니 해도 진짜랑 헷갈릴 정도여야 가치가 있는 것 같아요.
명백한 가짜는 그냥 가짜일 뿐.

네꼬 2008-09-21 10:53   좋아요 0 | URL
어우 어우 상당하더라고요, 오기다리 죠. 근데 저 사채업자 아저씨도 그렇고, 그의 가짜 가족들도 그렇고, 영화관에서 나와서도 여운이 남아요. 원스 다시 보면서 꼬장배추님 생각했어요. (뻥아니고 진짜.) 정확하게는 꼬장배추님의 페이퍼가 생각난 게지. ^^ 아아 가족은 '진짜'가 되면 너무 어려워요. 난 아직 철이 덜 들었나봐. ㅜㅜ

고라니 2008-09-22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__^ 히이.
저는 왜 이상하게 네꼬님의 글을 읽고 나면 늘 이런 웃음이 흘러나오는걸까요.
재미나고 귀엽고 꽁기꽁기하다가 결국 사랑스럽다..... 네꼬님의 글이 그래요.^^

'유사가족'하면 퍼뜩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어요. <가족의 탄생>.^^ 혈연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도 그렇게 끈끈하게 묶일 수 있다는 거- 묘하게 맘에 드는 구석이 있는 부분이죠. <텐텐> 내일 당장 보러 달려가겠습니다.(기다리세요오다기리!)

전 오늘 <번지점프를하다>를 다시 봤어요. 얼마전 어떤 분이 말씀하시기를 '이 커다란 우주에서 지구, 그 수많은 나라 중에서 한국, 그 속에 부산, 그리고 하필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당신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고.. 하신 이 멋진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어요. 영화 속 남자주인공의 대사거든요.^^

음, 비록 가상공간에서일지라도 네꼬님과 저와의 만남 또한 그러한 거겠죠? 제가 그 수많은 북싸이트 중 알라딘을, 또 수두룩한 서재들의 많은 글들 중에 하필 네꼬 님의 '완득이 리뷰'를 읽을 확률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남자 주인공은 이걸 '우연'이 아닌 '인연'이라고 말합니다.^^

아, 갈수록 댓글이 점점 주절주절 길어지는 것 같다는.. 지루하실테죠.^^ 환절기 목감기로 시끕하고 있는 제 성대가 저릿저릿, 쿨럭쿨럭- 네꼬님께 인사하네요. 감기조심하세요오~(CF버전) ㅎㅎ


네꼬 2008-10-04 19:00   좋아요 0 | URL
고라니님, 제가 답이 늦었어요. 미안해요.

제 글을 읽으시면 웃음이 나시는 건, 제가 웃기기 때문일 거예요. 누군가를 웃게 할 수 있다니 전 약간 자랑스러워요. 하핫.

텐텐은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전 어제 동거녀랑 같이 같은 감독의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를 보았는데, 그것 역시 즐거운 영화더군요. 하지만 텐텐이 더 재밌었어요!

저랑 고라니님은 어떤 인연으로 이렇게 만났을까요? 여기서 만나게 된 많은 분들과 거기 얽힌 인연에 늘 고마운 마음이에요. 제가 어쩌다 완득이 리뷰를 쓸 생각을 다 했을까요? 책도 별로 안 읽는 제가요. 긴 댓들을 조금도 지루하지 않고 언제나 반갑습니다.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도 답을 늦게 달아서 제가 죄송하지요. -_-;; (미워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