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 위의 아이 햇살그림책 (봄볕) 36
비베카 훼그렌 지음, 강수돌 옮김 / 봄볕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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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그냥 생활 방식일 뿐이야"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태도를 강조한 그림책입니다.  나와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혐오하거나 차별한다면 그 사회는 새로운 사람들이 정착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할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곳곳에서는 '끼리끼리' 문화로 낯선 이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얀 눈이 보얗게 쌓인 어느 날 오후, 낯선 아이가 짐을 한 보따리 들고 우리 집에 왔다면?


그 아이의 이름은 '세삼' 입니다.

생활 방식이 다릅니다.

이상한 냄새도 납니다.

도통 말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천장 위에서' 살아갑니다.

방안에 있는 물건들도 죄다 천장 위로 올라 가지고 갑니다.

'세삼'과 같이 밖에 나들이를 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빤히 쳐다봅니다.


학교마다 생활 방식이 다른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다른' 사람과 서로 '존중'하며 함께 사는 것을 배우는 곳이 되어야 되겠죠.


생활 방식이 전혀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힘이 많이 듭니다.

눈에 거슬리는 행동들이 한 두가지가 아닐꺼예요.

귀를 막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닐꺼예요.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꺼예요.

왜 하필이면 우리 학급에... 라는 불평하는 마음이 생길꺼예요.

그러나

함께 맞춰가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면

어른이 되어서도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 좀 더 쉽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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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그림들
위영 지음 / 휴앤스토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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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혼자 하는 여행이며 여행은 걸어다니면서 하는 독서라고 하듯이, 훌륭한 그림 명화 한 폭은 오래 세월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역사 여행이다. 순간적인 장면을 촬영하는 사진이나 연속적인 장면을 기록하는 동영상보다 거칠고 성긴 붓질로 그려진 그림 한 폭이 주는 울림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파일로 저장해 놓은 사진보다 손쉽게 열어볼 수 있는 인화된 사진 모음집인 앨범에 손이 더 자주 가는 것처럼 역사의 한 장면을 화폭에 담아 놓은 명화는 오래도록 생각할 거리를 만들고 가슴 속에 의미를 단단히 새겨 놓는다.


저자는 『속삭이는 그림들 』에서 그림 속 여행 가이드가 되어 독자들에게 친절한 도슨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림 한 장면 한 장면을 꼼꼼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일반인들이 알아볼 수 없는 깊이 있는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독서가 사람을 성숙시키고 인격을 고양하는 것은 독서가 지닌 고독의 시간 때문이며 혼자만의 시간이 주는 열매 때문일게다. 마찬가지로 여행은 폭넓은 경험을 통해 세상 안목을 넓혀주고 여행이 지닌 고독 시간 또한 열매 맺기에 충분할 정도다. 그림 속 여행은 말할 필요가 없다. 화가의 삶을 이해해야 그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듯이 그림 자체가 화가의 인생이며 철학이다. 화가의 의도를 잘못 읽히게 되면 전혀 엉뚱한 그림 감상이 될 수 있다. 저자는 평범한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그림 속 장면을 맛깔나게 설명해 준다.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특히 저자가 좋아하는 화가인 렘브란트, 고흐, 뒤러에 대한 저자의 고유한 설명을 듣고 그림을 감상하면 정확한 독해력을 가지게 된다.


렘브란트는 평생 성경을 깊이 묵상하면서 그림을 그린 사람이라고 한다. 고흐도 독서를 좋아했고 탐서가이자 애서가여서 책 읽는 사람을 그리거나 책을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루터주의자답게 말씀을 생명의 곳간으로 여겼던 사람이다. 세 명다 공통점은 신앙심이 깊은 이들이었다. 그들이 남긴 그림을 보면 얼마나 신앙심이 깊었는지 증명이 될 정도다. 하지만 현대 미술은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신앙과 적대적 위치에 있다. 선악의 구분은 다양한 철학 사조에서 이원론으로 폄훼되어 사라져가고 순전한 믿음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그림의 소재로 죽음을 제외시킬 수 없듯이 유럽 미술사의 가장 큰 축은 신과 사람의 만남이었다. 그것을 빼놓고는 제대로 그림을 감상할 수 없다.  


자신의 젊음을 당시 유배지와 다름이 없었던 '조선'을 위해 바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의 송별 예배 정경을 그린 그림 「출발 」(샤를 루이 드 프레디 쿠베르탱, 1868)을 보면 엄숙함을 너머 경외함이 느껴진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아득한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으로 복음을 들고 떠나는 선교사들의 나이가 25세~29세였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영혼의 정복을 위해 결코 돌아올 수 없고 1년에 한 번 어둠을 틈타서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유배지를 선택했다. 「출발 」은 프랑스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복음의 신세를 진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는 일이다. 죽음조차도 두려움의 대상이 안 될 수 없었다. 화가 쿠베르탱은 순간을 잘 표현했다.


저자의 그림 속 여행 이야기에서 설명한 그림 중 코로나19로 인해 전염병의 위험을 경험한 이 시점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그림은 푸생이 그린 「야슈도드에 번진 흑사병 」이다. 전쟁과 함께 전염병은 사람들을 쉽게 혼돈에 빠뜨렸다. 전염병이 주는 위협으로부터 좌절과 희망을 교차 표현한 푸생의 그림은 우리에게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명화를 설명해 주는 책은 언제나 기대가 된다. 직접 가까이 볼 수 없는 명화들을 책장 한 장 한 장을 넘기면서 손쉽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까막눈에 다를 바 없는 예술에 대한 낮은 안목으로는 전문가의 손길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누군가가 설명해 주지 않고서는 그림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다는 장점도 빼놓을 수 없다. 유럽의 역사가 곧 기독교의 역사이다. 유럽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그림'을 보는 것이다.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당대의 화가들이 놓치지 않고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기에 후세대 사람들은 그 덕을 충분히 누리는 있는 셈이다. 그림에 대해 초보적인 수준을 지녔다할지라도 그림을 반복해서 보고, 설명을 읽어가다보면 뚝 뚝 떨어져 있던 구슬이 꿰어 맞춰지듯이 어느 새 화가의 의도를 알게 되고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게 된다.


책을 읽다가 막힐 쯤 되면 기분 전환 겸 한 번 쯤은 명화에 관한 책을 손에 쥐어보자. 『속삭이는 그림들 』은 충분히 시간이 아깝지 않게 여겨질 정도의 품격과 깊이가 있는 책이기에  자신감있게 추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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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어떻게 해야 할까? - 처음 신앙을 가진 초신자를 위한 아주 쉬운 기도서! How Book Series 1
이대희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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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자를 위한 기도 입문서라고 하지만 기도의 본질을 정확히 말해 주는 기도 지침서라고 본다. 모든 종교에는 기도가 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 불교, 기타 여러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기도를 드린다. 우리 조상들은 정화수 한 그릇을 떠 놓고 자식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곤 했다. 지금도 깊은 산 속이나 마을 한 어귀에 우둑커니 서 있는 정자나무에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 타다 만 초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사람들 마음 속에는 신을 향한 갈망이 있다. 아니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신이라고 하는 대상을 향해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소원을 성취해 주기를 바라는 이에게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기독교와 기타 종교의 기도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기도의 목적에 있다. 자신을 위하거나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기타 종교인들이 드리는 기도라고 본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것이 기도다. 따라서, '내'가 중심이 되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나'를 버리는 기도가 기독교의 온전한 기도 목적이다. 내가 잘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기도이다. 자칫 '기도' 가 아니라 '주문' 이되는 기도가 있다. 인격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우상'께 드리는 기도는 '주문'이 될 수밖에 없다. 우상은 결국 내가 만든 신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우상이 되고, 권력이 우상이 된다. 자식이 우상이 되고 외모가 우상이 된다. 돈과 권력과 자식과 외모를 추구하는 기도는 '주문' 불과한 것이 된다.


"이방인들의 기도는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


저자는 기도의 필요성을 책 속에 담아냈다.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걸어가든지 누워 있든지 말이다. 교회에서든 직장에서든 기도하라고 말한다. 기도하는 방법도 성경에 근거하여 조언한다. 성경 속 인물이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의 본을 따라 기도하면 어느새 자신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기도는 항상 말씀이 근거가 되어야 한다. 중언부언하는 기도, 형식적인 기도,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되지 않기 위해 말씀을 묵상한 뒤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야 한다. 큰 소리로 부르짖든 잠잠히 읊조리든 손을 들고 기도하든 고개를 파묵고 기도하든 기도의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려는 마음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기도는 습관이다!


기도에 대해 아무리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더라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기도의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습관이 필요하다. 자신과의 싸움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결국 자기 힘으로 살아가겠다는 얘기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이다. 과연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새벽에 기도하는 사람은 달콤한 잠과 싸워 이긴 사람이다. 전날 밤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먹고 싶은 욕구를 모두 이겨낸 사람이다. 새벽에 일어나기 위해 자신의 삶의 초점을 새벽에 맞춘 사람이다. 하루 이틀 기도하다보면 어느새 습관이 자신을 기도자로 이끌 것이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성령께서 도우시는 것이다!


기도의 거장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도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거라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대 필요하다. 내 생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지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을 얻으며 기도해야 한다. 생각지도 못한 기도를 하게 된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다. 성령님께서 도우시는 증거다. 우리는 살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시들해졌을 때 기도에 동기를 부여하자. 『기도, 어떻게 해야 할까? 』로 다시 한번 기도의 끈을 단단히 묶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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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계시며 응답하시는 하나님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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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가장 큰 효용성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192쪽)


성경에서는 질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질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질서를 찾을 수 없습니다. 말씀은 질서와 무척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점점 무질서해 지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것은 좋지만 권위 자체를 경시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사람의 직위나 경력, 재산이나 힘에 의해 생기는 것이 권위가 아닙니다. 혹 '권위'를 자신이 노력한 결과의 대가로 생각해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남용하는 사례가 종종 회자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권위'는 겸손을 동반하고 자신에게 부여해 준 권위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목욕하는 물이 더럽다고 목욕물에 앉아 있는 아기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권위주의가 구시대의 산물이라고 '권위'마저도 버릴려고 한다면 우리 사회는 무질서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절대 권위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권위자는 하나님이며 우리는 다만 권위를 위임받은 것 뿐입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겸손하게 권위를 행사해야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다른 이들을 위해 섬기는 마음으로 권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처분권을 쥐고 있는 주인입니다" (25쪽)


하나님은 주인입니다. 종은 주인의 처분을 그저 따를 따름입니다. 종이 이래랴 저래랴 할 수 없습니다. 순종해야할 의무가 종에게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처분권을 주고 있는 분이 하나님을 인정할 때 우리 인생의 질서를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우리 모두가 경험해봐서 아는 일이지만 교만으로 이르게 됩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잠시 잠깐은 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생살이가 그렇게 순탄하지만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임을 고백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내 욕망을 죽여가는 시도이며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럴수밖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니까요.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이 가진 비전, 능력, 장점보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지, 전적으로 즉각적인 순종을 하는지 관심있게 보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기도생활은 얕은 물에서 첨벙거리는 것 같습니다"(137)


바쁘다고 해서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하다면 그것은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바빠서 기도할 수 없다면 차라리 바쁜 일을 손에서 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의 위대한 대가들은 기도하는 일을 우선순위로 여겼습니다. 바쁘다고 해서 대충 기도하는 것을 중언부언한다고 표현합니다. 형식만 갖춘 기도 행위인거죠. 그러나 형식적인 기도에는 어떤 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아만족일 뿐입니다. 기도는 깊은 물 속이 되어야 합니다. 얕은 물에서 첨벙거리는 일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합니다. 깊은 물 속에서 생사를 걸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저부터 반성이 되는 대목입니다. 형식적인 기도, 위선적인 기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가 제 기도생활이었습니다. 이제 기도에 목숨을 걸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계셔서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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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과 인류의 역사
윌리엄 H.맥닐 지음, 허정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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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전염병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옛 역사의 한 조각으로만 생각되었던 전염병의 공포를 경험하며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 』가 다시 재조명 받고 있다. 『페스트』문학전집이 독자들에게 다시 읽히기 시작되었던 것처럼.


이 책의 목적은 55쪽 하단부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근대의학의 발전에 따라 질병 전파에 관련된 각종 요인이 분명하게 밝혀지기 이전에 인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이말로 이 책이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도 최근 들어 전염병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갖게 되었듯이 역사 이전 시대에는 전염병에 대한 어떠한 역학적 조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문헌에 조차도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저자 윌리엄 H. 맥닐은 인류의 문명사 전체를 '전염병의 역사'로 재조명하고 있다. 인류 전 문명의 흥망을 전명병의 역사로 기술하고 있어 참신한 주제로 다가온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듯이 600명이 채 안되는 부하를 거느리고 멕시코 원정에 나선 '코르테즈'는 인구가 수백만 명이 있는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  '피사로'에 의한 잉카제국 정복 또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하지만 근대의학의 발달에 의해 밝혀진 사실은 치사율이 높았던 천연두의 전염성에 가장 큰 원인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거대한 제국을 무릎 꿇렸던 것은 총과 칼이 아니라 '바이러스'였던 것이다. 당시 원주민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알리가 없었을 것이다. 전염병은 이렇게 면역을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다.


유럽도 위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 14세기 페스트의 유행, 19세기 콜레라의 대유행은 인구 감소를 초래했고 사회적 기반 자체를 흔들어 놓았다. 아무런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숙주에서 숙주로 지체없이 감염을 일으키는 전염병(결핵, 홍역, 천연두, 수두, 백일해, 이하선염, 인플루엔자)은 오늘날에도 잘 알려져 있다.


저자 윌리엄 H. 맥닐은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돼지고기 금식 또한 전염병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서아시아의 시골 촌락에서는 돼지가 일종의 거리 청소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돼지고기는 제대로 조리해서 먹지 않으면 많은 기생충(특히 선모충증)을 사람에게 전염시킬 수 있기에 감염의 위험성을 감소하고자 돼지고기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또한 나병환자를 철저히 격리시킨 이유도 피부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전염을 막기 위한 제도로 보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 문명의 중심지에는 전염병이 퍼질 수 밖에 없다. 즉 도시 생활은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는 수많은 위험을 지니고 있다. 기침이나 재채기를 통해 비말(飛沫)이 날아가 사람으로부터 전염되는 질병이 촌락보다 도시에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역사장 거대 문명의 중심지로부터 전염병의 위력이 단단히 나타났던 사례들을 통해 인류의 역사가 전염병의 역사임을 다시 실감하게 된다.


인도문명에서는 각종 질병이 침범되지 않게 하려는 동기에서 카스트 신분 차별 제도가 발생되었다고 본다. 고온다습한 지역인 인도 문명지에서 기생충의 공격으로부터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접촉을 최소화하는 일이었고 카스트는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인도 문명과 비슷한 환경에 놓였던 메소포타미아에서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끄는 군대가 패배한 이유도 전염병의 역사에서 찾고 있으며 문자로 기록된 자료인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쉬' 서사시에도 대홍수보다 전염병의 재앙을 잘 묘사하고 있다. 중국 황하문명에서 강대한 나라들 조차도 중국 중남부 지역을 함락할 수 없었던 이유를 질병이 창궐하기 최적 기후였던 지역적 특성 때문임을 강조한다.


유럽의 암흑기는 질병의 역사라고 본다. 질병이 창궐한 시기에 기독교가 오히려 급속도로 전파될 이유를 아래의 역사적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도들이 지닌 가장 큰 차이점은 무서운 전염병들이 극성을 부리는 가운데에서도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일종의 종교적 의무로 간주한 점이다" (137쪽)


전염병의 유행으로 인해 기존의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붕괴했지만 기독교의 교세와 교회는 강화되었다. 기독교는 고난과 질병, 그리고 혼란의 시대에도 잘 적응할 수 있는 사상적, 정서적인 체계를 갖고 있었고 무서운 전염병에 대한 기독교의 포용력은 기독교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과학의 발전은 전염병의 전파 속도를 앞당겼다. 1870년대 이후 급속하게 발달한 기선의 항로망을 따라 배의 속도가 빨라졌고, 만주에 새로 건설된 철도를 따라 전염병은 사방으로 퍼지게 되었다. 13세기 몽골 제국의 확산은 전염병의 역사에서 의미있게 보아야 한다. 식량이나 전리품을 실은 말안장에 숨어든 감염된 쥐나 벼룩은 신속한 몽고군의 이동을 따라 이 병의 전파에 장애가 되었던 바다나 강도 쉽게 건너게 되었다.


"페스트는 유행이 끝나더라도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는 없었다. 불규칙한 간격을 두고 몇 번씩 유행" 한다. 코로나19의 유행은 단시간에 끝날 사건이 아니다. 유럽의 전염병의 역사를 보더라도 코로나19 이후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유럽이 페스트의 충격으로부터 완전회 회복하는데 걸린 시간은 약 100년~130년이었다고 한다. 의학의 발달로 그정도까지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죽음의 위협을 지속적으로 받게 될 것이며 그동안 통용되어 왔던 일상생활의 습관이나 규제는 붕괴되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페스트의 휴유증으로 인해 라틴어 대신 여러 가지 세속적인 말이 공식문서에 쓰였던 것처럼 코로나19  이후 전 사회적인 제도들 또한 재편될 것은 분명하다. 계층별로 심한 갈등이 재점화되고 있고 임금과 가격구조가 뒤흔들리는 것을 보면 전염병에 따라 역사가 어떻게 움직여 왔는지 증거가 되고 있다. 교회의 전통적인 예배 형식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본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촉진 시킨 것도 전염병의 확산으로 인한 사람들의 전통적인 교회 의식이 바뀐 것으로 분석한다. 페스트의 죽음 앞에 기존의 교회에서 가르쳤던 하나님의 정의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많았기에 기존 교회에 대한 반교권주의가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일 뉴스에는 코로나19 확진자 수 통계가 보도되고 있고 정부의 방역 지침에 따른 교회의 소모임과 행사가 금지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종교 탄압이라고 말하기도 하다. 전염병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전염병은 사라졌던 시대는 없었다. 단지 주춤거렸을 뿐이다. 현재에는 팬데믹으로 선포될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전염병에 대한 심각성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교회 뿐만 아니라 교육, 경제, 문화 등 전 영역에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최대한 전염의 고리를 끊기 위함이다. 대다수의 인구가 감염되고 면역이 생겨야 전염병의 기세가 꺽인다는 의학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가 전염병의 역사라는 이야기가 뼈 속 깊이 들려온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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