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정 문해력, 교사 전문성을 완성하다 - 행복한 수업을 만드는 교수평 일체화, 교육과정 문해력, 그리고 학생중심수업 프로젝트 행복한 교과서 시리즈 49
신지승 지음 / 행복한미래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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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 문해력이란, 교육과정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교육과정을 읽는다는 것은 성취기준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말로 바꿀 수 있겠다. 성취기준의 의미를 분석하고 교육과정에서 수업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 지 가름이 되는 것이 '성취기준'이기 때문에 교육과정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곧 성취기준을 해석하여 수업을 계획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교육과정을 읽고 난 뒤에는 반드시 교육과정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교육과정 읽기 + 교육과정 쓰기 = 교육과정 문해력

 

교육과정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수업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성취기준의 의미를 이해하고 분석한 뒤 수업을 실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성취기준의 도달도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평가계획을 무시할 수 없다. 2015개정교육과정에서는 '과정중심평가' 즉 과정이 중시되는 평가를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평가'에 방점을 둔 나머지 수업과 교육과정을 무시한 체 평가 주도의 진행을 하다보면 본말이 바뀌기 싶다. 이점을 유의하라고 저자 신지승 교사는 말한다.

 

예전에 수업은 '교과서' 중심이었다. 교과서 → 교육과정으로 교사의 관점이 바뀐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2015개정교육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사실 제4차 교육과정 고시때부터 줄곧 교육과정 문서에는 '교육과정 재구성' 이라는 말이 적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교과서 중심의 수업을 전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교사의 열의가 부족했던 것도 있겠지만 교사에게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 가장 큰 이유이다. 교사의 전문성은 업무가 아니라 수업에서 시작된다. 교사의 여유를 빼앗는 가장 큰 적은 '업무'였다. 학생들과 함께 수업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교사에게 시간을 부여해야 한다. 업무 중심의 학교 운영은 수업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최근들어 학교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고 있다. 학생중심수업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교사의 전문성을 수업에 두고, 교사에게 온전히 시간을 돌려주고자 하는 현장의 분위기가 변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정중심평가에 부담을 느끼시는 현장의 교사들이 있다. 그 이유는 시간도 없는데다가 다인수 학급에서 여러 교과를 어떻게 수업 중에 평가하냐는 것이라며 볼멘소리를 늘어 놓는다. 평가의 관점을 '평가'에만 둘 때 나타날 수 있는 목소리들이다. 하지만 과정중심평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수업'이 중요함을 저자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학생중심의 수업을 계획하고 실행해가다보면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과정중심평가'라는 얘기다. 평가를 위해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업을 실행해가다보면 평가가 필요한 부분이 발견되고, 평가를 적용한 뒤 피드백을 통해 성취기준의 도달도를 점검하게 된다.

 

저자는 교육과정 문해력을 반영한 학생중심수업의 전개를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과정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교과서를 재구성하는 수업이 아닌, 교사의 눈으로 교육과정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과서 내용 일부를 조정하거나 변경하는 것은 교과서 재구성에 불과하다. 교육과정 재구성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프로젝트 수업'을 추천한다.

 

아래는 교육과정 문해력에 대한 저자의 주옥같은 문장이다. 참고하시길.

 

교사 중심의 교과서 진도 나가기식 수업 → 교과서 진도는 나가지만 학생중심수업을 위한 교과서 재구성 → 성취기준 중심의 교과서 재구성 → 성취기준 중심의 교육과정 재구성 (76)

 

교과서-교사중심수업-과정중심평가일 때는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없지만, 교육과정재구성-학생중심수업 변화에 어울리는 과정중심평가를 할 때 비로소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92)

 

교육과정을 읽는다는 것은 '성취기준 그 자체 의미를 파악하고 수준과 범위를 판단하여 성취기준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109)

 

교육과정을 쓴다는 것은 '읽고 해석한 성취기준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수업 가능성을 상상하고 최적의 수업 가능성을 선택하여 수업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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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미터 개인의 간격 -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홍대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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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미터 개인의 간격』은 '욕망의 철학자'라고 불리우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생(1632년) 스피노자의 행복 담론이다. 책 제목처럼 개인의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간격, 1미터 범주 안에서 결정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상처받거나 분노를 느끼는 것은 1미터 근접 거리에 있는 타인과 자신과 관심사가 같은 세상적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그 외의 것들은 무가치하다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철학자 스피노자의 개인사를 엿보면 왜 행복에 관한 '1미터 간격'을 고민했는지 엿볼 수 있다. 스피노자의 가문은 에스파냐다. 선대때부터 에스파냐인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종교 재판의 마녀사냥이 한창일 때 할머니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해야만 했다. 종교의 자유를 얻고자 이동한 곳이 네덜란드였다. '복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바뤼흐'라는 아명을 지닌 스피노자는 유대계 공동 거주지의 리더로 자라길 원하는 공동체의 뜻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 하지만, 주위의 기대와는 전혀 달리 선대 때부터 지녀온 종교(유대교)를 버린다. 종교관이 다른 네덜란드인에게도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더구나 부유한 재산마저 누이에게 양보를 하고 렌즈를 깍는 노동자의 삶을 선택한다. 낮에는 렌즈 세공업자로 밤에는 철학자로 살아가다 폐에 유리가루가 쌓여 40대 나이로 요절한다.

 

스스로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일수록 타인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증오할 사람을 찾기 위해 반경 1미터의 자원을 모두 낭비한다. 억지 주장을 펼치거나 자신의 논리에 집착하여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그들의 삶은 무척 바쁘고 고단스럽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불행한 사람이다. 행복은 사람이 욕망으로 이루어졌음을 선선히 인정하는데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어떤 행위에 대해 옳고 그르다라고 가치 판단하는 일은 행복과 무관하다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 자신이 네덜란드 기독교인과 집안의 누이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취한 태도는 그들을 증오하기 보다 자신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 여기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행복의 기술이 나온다. 행복은 사랑과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요즘들어 젊은층들이 산업화 세대였던 60대 어른들을 비아냥거리거나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SNS상에 분노가 담긴 글을 남기기도 한다. 지금 '선진국' 인프라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젊은층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산업화 세대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행복은 요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스피노자의 행복론에 비춰보면.

 

강원도 양양군 서면에 위치한 한계령 위령비에 얽힌 이야기가 책에 나온다. 전국에 강원도 우유를 보급하기 위한 방법으로 험준한 한계령 도로를 닦는 공사에 군장병들이 동원되었고 공사 중에 순직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위령비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 세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아니, 우유 보급로를 위해 아까운 목숨을 잃게 했다고? 지금 개인이 누리는 행복은 누군가의 헌신(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단단한 개인이란, 자신이 어느 때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사람인지 남의 도움없이 판단하고 실행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불행한 사람은 기술이 필요하다. 타인을 이해하는 기술말이다. 1미터 개인의 간격은 행복을 구분하는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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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살고 싶어 나누기로 했다 - 일, 돈, 사람, 공동체가 보이는 나눔과 삶의 경제
전성실 지음 / 착한책가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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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회를 가리켜 수축사회라고 말한다. 고성장 산업화시대에는 일자리 때문에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사실 비정규직이라는 용어도 IMF 외환위기 이후에 생긴 신종 낱말이다. 외환위기 전에는 재벌기업의 낙수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함께 나눠 가질 파이 자체가 컸기에 서민들에게 돌아올 몫이 있었다.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먹고 살만큼은 되었다. 집안에서 어른 1명이 직장을 다니면서 벌어온 수입으로도 가계를 운영할 수 있었다. 고성장 수출 산업의 호황으로 누구나 중산층이라고 여길 정도로 경기가 안정적이었다. 청년들은 대학 졸업 후 자신의 꿈과 비전에 따라 직업을 취사선택할 기회가 넘쳐났다. 기업에서도 신규 채용자를 충분히 받아들였고 노동의 대가로 일한 만큼 자본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4차 산업혁명시대라고 하는 요즘 들어서 먹구름이 잔뜩 드리운 것이 사실이다. 흙수저, 금수저라는 용어는 이미 한물 지나간 용어이고 이제는 이생망(이번 생애는 망했다)을 넘어 청년들은 살아갈 희망 조차 없어 보인다. 돈이 돈을 낳는 구조가 되다보니 어린이들의 가장 큰 꿈이 임대사업자, 건물주가 되어 버렸다. 정당하게 일해서 번 돈으로 자신의 꿈을 키워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일하지 않고서도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일 하기는 싫고 돈을 벌고 싶은 사람만 있는 국가는 결코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다. 


고령화 저출산 사회, 저성장의 늪에 빠진 국가, 이제는 일의 개념과 잘 산다는 기준이 달라져야 함을 저자는 『나는 잘 살고 싶어 나누기로 했다 』에서 강조하고 있다. 저성장 시대, 나눠 가질 파이는 한정되어 있다. 누가 많이 가지게 될 경우 누군가는 허리 띠를 졸라맬 수 밖에 없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 한정된 파이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일이 국가의 몫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일의 개념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자리도 축소되고 있고 정상적인 피라미드 구조에서 기형적인 항아리 구조로 바뀌면서 정규직은 물론 이거니와 아예 일할 자리조차 얻기가 힘든 시기를 살아가게 될 전망이다. 인간을 대신하여 로봇이 기용될 경우가 자명한 현실이다. 다시 한 번 스스로 물어보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저자는 뜬금없이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위를 둘러보며 서로를 도와가며 살아가보자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누구나 인간의 존재는 고귀하다. 일할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노인도 존재 자체로 본다면 충분히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일본의 한 예로 들면, 장애를 가진 노인이 마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직장에 나간 청년들을 대신하여 택배 물건을 대신 받아준다. 주말에만 시간적 여유가 있는 직장 청년들을 위해 평일에도 그들의 택배 물건을 받아 둔다. 퇴근 뒤 청년들은 노인의 집에 찾아가서 물건을 찾아가고,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독거 노인과 청년간의 인간 관계가 형성되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된다. 쓸모 없어 보이는 존재로 여겼던 존재가 마을의 한 구성원으로 우뚝 서게 된 사례다. 


이제 누가 더 많이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아니다. 돈을 버는 이유를 찾아야 하는 시대다.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깊은 관계를 요구하는 시대가 곧 제4차산업혁명시대라고 말한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더더욱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우리 사회 전반에 배치될 때 돈 보다는 인간 관계, 돈 버는 행위 자체보다 서로 잘 살고 나누는 기쁨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꿈만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일들을 실천하는 기업과 사람들이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한 기업은 CEO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연봉을 대폭 깍고 대신 직원들의 연봉을 대폭 인상하는 기업 윤리를 제정하고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캐나다의 한 낙농 기업은 저렴한 우유의 재료를 수입해 오기보다 기업이 위치한 고장의 원유를 100% 전량 매입하기로 결정하면서 당장은 기업의 이익에 손해가 되더라도 고장을 살리고, 고장의 사람들을 직원으로 채용하면서 함께 잘 살기를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기업이 위치하고 있는 고장의 사람들이 값싼 타사 제품을 구매하기 보다 값은 비싸지만 고장을 든든히 후원하는 기업의 제품을 자발적으로 구입한다고 한다. 기업의 윤리를 높이 산 타지역 사람들도 이 일에 함께 동참하면서 기업의 가치는 전보다 높아졌다고 한다. 함께 잘 살기를 원칙으로 삼은 기업의 공통점은 소비자가 먼저 그 가치를 알고 지갑을 연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혼자만 잘 살겠다고 용 쓰는 사람보다 자신의 이익을 공익을 위해 나누고 베푸는 사람을 더 존중하고 높이 사지 않을까 싶다.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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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평론 제29호 - 2020.9.10
우리신학연구소 지음 / 우리신학연구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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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우연한 기회에 우리신학연구소에서 '독자가 읽는 신간' 홍보 안내문을 보고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라는 책을 신청한 적이 있다. 마침 서평 대상자로 선정되어 책을 우송 받게 되었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단숨에 책을 읽고 짧은 소회를 밝혀 글을 메일로 보내게 되었다. 며칠 뒤 서평글을 책자에 싣고 싶다는 메일을 받게 되었고 지난주 따끈한 평론집 한 권이 담긴 우편물을 손에 얹게 되었다. 「가톨릭평론」9/10월호다. '독자가 읽는 신간' 란은 책의 맨 뒤쪽에 있었다. 나 말고도 『행복한 자유인, 앤소니 드멜로』를 읽고 쓴 서평문, '수행의 지평을 넓혀준 앤소니 드멜로.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들 』를 읽고 쓴 서평문, '공동의 집인 지구를 보존하기'. 『유예된 존재들 』를 읽고 쓴 서평문, '청소년도 오늘을 살 권리가 있다'. 『천장 위의 아이 』를 읽고 쓴 서평문, '이상한 아이, 모두의 곁에, 나도 함께!'. 총 다섯 편의 서평문이 책의 끝부분을 마무리했다. 

 

 

개신교인인 내가 「가톨릭평론 」을 읽게 될 줄이야. 9/10월호는 코로나19에 관한 각 분야 전문가들과 지성인들이 자신들만의 안목으로 쓴 여러 비평문이 실려 있다. 특히 내게 주목된 글은 코로나19로 인해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소외계층을 사실대로 조사하여 밝혀낸 글들이다. 대략 코로나19로 인해 힘들어하는 계층이 파악된다. 소위 중위소득 50%미만의 저소득층 가정들과 소상공인으로 축약 보도되는 매스컴의 언론과 달리 이 평론집에는 외국인 이주민들, 그중에서도 불법 체류 노동자들과 그의 자녀들, 1평 남짓한 공간인 쪽방촌에 기거하는 빈곤한 주민들, 일자리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 보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이름 없는 청년들, 닭장처럼 빽빽한 공간에서 하루 종일 저임금에 시달리며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콜센터 직원들을 다루고 있다. 재난지원금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지급되었다지만 이것마저도 혜택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더 충격적이었던 점은 우리나라가 '아이를 수출한 나라' 였다는 점을 고발한 글이다. 유독히 입양을 많이 보냈던 1980년대. 아이 한 명을 입양보내면 외화 벌이가 되었기에 미아, 고아 구분없이 틈만 나면 입양을 주저없이 보냈던 당시 정책의 허점을 낱낱히 밝혀내고 있다. 유럽으로 보내진 입양아들이 세월이 흘러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갈 나이가 되었을 때 심적으로 받는 충격은 이루말할 수 없다고 한다. 떠나보낸 생모도 그렇겠거니와 기억 나지 않는 유아 시절에 낯선 땅에 오게 된 입양아야 말로 자신의 존재를 뒤늦게 고민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는 점이 이제서야 밝혀지게 되었다. 돈으로 보였던 부모 잃은 아이. 입양 보내고 나면 그만. 국가도 그 어느 누구도 관심 조차 가지지 않았음을 우리 모두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19 전염병 확산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는 종교의 현실을 감안할 때, 가톨릭에서 제시하는 종교의 역할론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인간의 탐욕이 똬리를 틀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 현실의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볼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없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과연 하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을 향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까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몸소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경험하신 내용이다. 고난의 순간에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무거운 짐때문에 어깨가 짓눌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는 이유는 다시 말하면, 우리와 구별된 삶을 살아가라는 외침이 아닐까 싶다. 밖을 향해 열심히 달리기만 했던 지금까지의 삶과는 달리 이제는 내면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며 변화된 삶을 살아가라는 메세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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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에도 안전해요 초등 교과연계 알려줘 시리즈
박신식 지음, 젤리이모 그림 / 소담주니어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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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은 세계 역사를 코로나-19 이전 이후로 나뉠 정도로 파급효과가 크다. 세균(박테리아)과 바이스러스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이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예방법까지 손수 챙기고 있을 정도다. 얼마전 뉴스 기사에 어른들보다 유치원 원아들이 마스크 착용 및 개인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은 배운대로 한다. 반면 어른들은 자만감 때문인가 확진자수가 줄어들면 금새 긴장감이 줄어들어 개인 방역 수칙을 빼먹곤 한다. 이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배워야할 때인가 보다.


코로나-19로 인해 학교에도 전에 없던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늘상 있었던 입학식도 취소되었고 사상 초유의 개학도 5월 중순이 되어서야 진행되었다. 따뜻한 봄은 왔지만 학교에는 늘 겨울이었다. 아이들이 와야 봄이지 말이다. 최근 여름 휴가 기간을 끝나고 또다시 확진자수가 급증하는 바람에 전국적으로 학교 밀집도 1/3 이내를 유지하기 위하여 학년별 순차 등교 또는 인원 제한을 통하여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나마 지방이기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서울 경기 수도권 지역은 모두 원격 수업으로 전환되었다.


코로나-19를 예방하기 위한 마스크 착용, 개인 방역 수칙 준수, 슬기로운 대인관계, 면역력 기르기, 자주 손씻기와 같은 기초적인 질병 예방법이 일상화되고 있다. 『바이러스에도 안전해요』는 현직 초등학교 교사가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내외 바이스러스 예방법에 관해 이야기 형식으로 만든 책이다. 늘 우리 주위에 일어날 수 있는 가상 상황을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겨울철 식중독을 유발하는 노로바이러스도 가족 여행 속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거리다. 각각의 챕터별로 바이러스와 세균의 차이점이라든지 감기와 독감의 예방법 등 짤막한 의학 상식을 그림과 같이 제시해 놓고 있다. 초등학교 1~2학년 학생들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어휘와 제법 글자 크기를 키워 책을 만들었다. 현직 초등교사의 눈으로 교실 풍경도 사실감 있게 묘사해 놓았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건강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기 보다 『바이러스에도 안전해요』책 한 권을 들려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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