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 햇빛출판사 / 199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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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의 계절은 사계절이 아니라고 합니다. 겨울과 여름만 있다고 합니다. 한기를 온 몸으로 버텨야 하는 겨울, 함께 있는 동료가 증오스러운 여름. 두 계절만이 수인들에게 있다고 합니다. 1970년대의 감옥은 지금의 현대식 감옥과 시설면에서 큰 차이가 있겠죠? 무기수로 복역 중인 필자는 1년보다도 더 긴 하루를 노동과 사색으로 보낸 듯 합니다. 계수씨에게, 형수님에게, 할머니할아버지가 된 어머님과 아버님께 간간히 보낼 수 있는 서신 규정에 따라 엽서를 보냈습니다. 엽서라해봐야 면적이 얼마나 하겠습니까마는 아마 깨알같은 글씨로 마음을 전달하지 않았을까싶습니다.

 

제가 이번에 읽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쫌 특별합니다. '통혁당 사건 무기수 신영복 편지'라는 부제가 씌여진 필자의 초판본입니다. 1988년 9월 1일에 인쇄된 책이지요. 종이가 누렇게 빛바랜 책입니다. 30년도 지난 책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폐지 버리는 곳에서 건진 노획물품입니다. 누군가 이사가거나 집안 대청소 때 내다 버린  '폐지'였던 것을 고이 주워왔습니다. 때마침 도서관에서 최근에 나온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었더터라 책의 가치를 단박에 알고 얼른 주웠습니다. 마치 도둑질하는 모양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냉큼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책의 가치를 모르는 아내는 또 주워 가지고 왔냐며 또 한 소리합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다음에는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작년에 주워왔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초판본으로 읽으니 왠지 느낌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초판본이 인터넷 상에서 현재 30,000원 내외에서 거래되는 듯 싶습니다. 처음 인쇄되어 시중에 나왔을때는 3,500원인데 말입니다. 보통 다른 책 같으면 중고 책값은 없는데 보통 귀한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만 책 자랑하다가 책 읽고 난 뒤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네요. 그럼. 지금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나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감옥 안에서 자신을 다스려갔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보내오시는 화선지에 먹을 갈아 붓글씨를 쓰면서, 때때마다 읽고 싶은 책 목록을 보내면 받을 수 있는 책을 읽으며 여분의 시간을 사색과 함께 보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감옥 안에서 정해진 일과 시간을 준수하면서 보내겠지요.

 

일단 감옥 안에 들어오면 그가 무슨 일을 했고 지위가 어땠으며 재산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특히나 무기수일 경우에는. 필자는 당시 보낸 엽서글에 의하면 20년 가까이 복역 중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돌아오는 공간인 1.86평 감옥이 세상의 전부였을테고 몸을 부대끼며 지내고 있는 동료 수인들이 가족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잊고 있는 것은 아무리 담장을 높이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함께 햇빛을 나누며,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54)

 

필자는 '함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돕는다'는 표현을 할 때, 비 올때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감옥에 오랫동안 생활하고 있는 이들은 냉정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꾸민 표정, 걸친 의상은 물론, 지위, 재산, 학벌, 경력 등 소위 알몸이 아닌 모든 겉치레에 대하여" 외식을 구별하는 냉정한 시선을 습득하고 있다고 합니다. 긴 복역 중 엿새간의 외박을 허락받은 필자가 바깥 공기를 쇠고 들어오면서 외히려 힘에 부쳤던 느낌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으려 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이해받으려 하는 마음의 가난에 연유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81)

 

필자의 가족들에게는 엿새간의 귀휴가 얼마나 소중했을까요? 하지만 필자는 감옥으로 다시 돌아온 뒤 조급했던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반성하고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는 노동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사회(?)에 있을 때 일하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았던 필자는 노동에서 큰 삶의 공부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노동을 '소비'라고 생각하며 하챦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어르신들은 노동을 '생산'으로 생각하며 긴 호흡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세대 간 노동에 관한 인식의 차이입니다.

 

독서에 대한 남다른 필자의 생각을 엿보게 하는 글귀가 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잔업으로 피곤도 하고 시간도 없어 볼 책이 많이 밀려 있습니만 저로서는 책 속에는 없는, 이를테면 세상의 뼈대를 접해보는 경험을 하는 느낌입니다"(102)

 

책 안에만 갇힌 사고가 아닌 세상과 연결된 사고를 뻗쳐 가려는 필자의 노력이 보입니다. 끝으로 '관계'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옮겨 봅니다.

 

"관계를 맺음이 없이 길들이는 것이나 불평등한 관계 밑에서 길들여지는 모든 것은 본질에 있어서 억압입니다" (133)

 

제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라는 기관에는 다양한 직종의 분들이 함께 어울려 지내고 있습니다. 갈등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하겠죠? 갈등을 풀어나가는 해법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라고 생각 듭니다. 누군가가 조금 더 희생하지 않는다면 '관계'는 '억압'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서로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모순된 행동입니다. 학생을 위해 존재하고, 학생의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라는 공동체가 희생과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는 형식된 관계로 맺어간다면, 추구하는 원대한 교육 방향이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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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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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죽음을 넘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방법은 무엇인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교사의 존재의 이유를 깨닫는다!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3년 간 강제 수용된 청년 빅터 프랭클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책임감'에서 찾는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책임감과 함께 사랑과 시련이라고 말한다.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요법 학파를 만든 것은 책상 앞에서 연구한 이론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가 직접 수용소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로고테라피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확률은 증언자들의 고백과 얼마 남지 않은 문헌을 토대로 확인한 결과 20명 꼴로 한 명 정도였다고 한다. 수용소에서는 자신이 그동안 누렸던 지위, 재산, 학력, 경력은 누더기보다도 못한 것이다. 한 줌의 빵을 얻기 위해 가혹한 형벌을 받는 동료들을 무시해야 했으며 시체 더미를 두고서도 썩은 감자를 쥐기 위해 손을 뻗어야 했던 무감각한 존재가 수용소 안의 죄수들이다. 가스실로 가지 않기 위해 말끔한 모습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 생의 의지를 잃어버린 죄수들의 특성은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피를 피워 버리는 일이다. 담배 한 개피는 멀건 수프지만 굶주린 배를 달랠 수 있는 수단이다.

 

수용소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강제 노동, 학대, 굶주림, 정신적 착락, 전염병, 모멸감 등 수 많은 악조건을 이겨내야 하는 일이다. 수용소에 처음 갖힌 이들은 '충격'에 휩싸인다고한다. 그후 무감각해지고 혹여나 수용소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더라도 한 동안 몸과 정신이 자유에 익숙해지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을까? 아버지, 어머니, 자녀들, 아내 모두 수용소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냈고 죽었든 살았든 소식을 알 수 없지만 그들을 불러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또 한가지, 시련(고통)을 삶의 의미로 찾아냈다는 일이 놀랍다. 각종 시련 속에서 생명을 확인했고 하루하루 시련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의지로 불태웠다고 한다. 가스실로 가지 않았음을, 고열로 시름시름 앓았지만 운 좋게도 지독한 작업반에서 열외된 것을 감사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냈다고 한다. 자살이라는 방법을 선택하는 이유는 불행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고테라피 정신요법 학파는 환자들을 만나 삶의 의미를 찾게 해 준다. 환자들이 자신의 삶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반대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이 자신에게 질문하도록 유도한다. 역질문법이다. 아내를 잃어버린 한 남편이 괴로워하며 상담을 요청해 왔을 때 역으로 질문한다. 만약, 당신이 죽고 아내가 살아 남아 있었다면 아내의 고통을 어떻게 할 거냐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론을 인정하면서도 근본적인 해결점을 환자의 내면에서 찾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 스스로 책임감있게 살아갈 질문을 던지면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도 간혹 살아가면서 권태를 느끼거나 자유로움 속에서도 힘듦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접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퇴직 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현직에 있을 때보다 퇴직 후 금방 늙는다고 한다.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다. 그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느끼기 보다 지나가버린 젊음을 부러워한다. 부러워하는 것은 지는 거다! 늙어가는 것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주위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로고테라피 정신요법에서 말하는 상담 기법이다. 적절한 긴장은 오히려 삶 속에서 활기가 된다고 한다. 정신적 긴장을 통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는거다.

 

교사의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 두말하면 잔소리다. 학생들이 있기에 교사가 존재한다. 코로나바이러스-19 감염병으로 인해 사상 초유의 4월 개학이 현실화되었다. 학생들과의 만남이 지연되면서 내가 교사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든다. 학생들이 없으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감, 미워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학생들, 학생들을 중심에 두고 펼쳐지는 학부모와의 적절한 긴장은 나를 교사로 존재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교사로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찾게 해 준다. 바쁠 때 짬을 내어 쉬는 쉼이 꿀맛같은 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학생들과 한 교실에서 함께 북작거리면서 살아갈 때 퇴근 뒤의 쉼이 진정한 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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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사를 꿈꾸다 - 기독교적 수업을 향한 한 교사의 평생 분투기
소종화 지음 / IVP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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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수업에 해당되는 것은?

 

1번 교과를 성경과 연결하여 가르치는 수업

2번 교과 시간에 성경을 가르치는 수업

3번 기독교사가 가르치는 수업

4번 기독교사가 삶으로 본을 보이는 수업

 

정답은? 모두 아니다. '기독교적' 수업의 최종 대상은 '학생' 이 아니라 '교사'다. 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바로 물리 교과를 가르치는 소종화 교사다. 그가 '기독교적 수업'이 무엇인지 20년 넘게 교직생활을 해 오면서 고민하고 연구한 결과를 책으로 펴냈다. 주위의 권유로 인해.

 

기독교 학교 뿐만 아니라 공립학교에서 기독교적 수업을 하기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기독교 대안 학교라면 모를까. 기독교적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수업을 재구성한 교사의 기대에 못미치는 경우가 많다. 수업을 기독교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교과 지식을 성경과 연결시키는 것을 말할까? 성경적 가치관을 드러내는 수업을 말할까?

 

교사는 학생의 변화된 삶을 기대한다. 학생의 전인적인 성장을 바라보며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기독교사도 마찬가지다. 근데 차이점이 있다. 기독교사는 '내'가 학생들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인정한다. '내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변화될 것이라는 자만을 꿈꾸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수업 안에 녹아 있는 지식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의 삶 자체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왜곡된 지식과 죄로 얼룩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교과 연구를 게을리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교사는 지독스러울 정도로 수업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내가 가르치는 교과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1차적으로 교과 지식을 온전히 깨닫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나서 교과에 내재되어 있는 '지식' 자체가 과연 성경적인가? 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지식' 도 성경적인 것이 있고 비성경적인 것이 있다는 말인가?

 

저자 소중화 교사는 '효'에 관한 지식을 예로 든다. 모든 종교가 '효'를 다루지만 종교마다 내재된 가치관이 다른 것이 사실이다.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든지, 환생을 바라며 효를 다루든지 말이다. '지식'을 성경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을 구별한다는 말이다. '관용'이라는 예를 보자.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신념은 모든 종교에서 다뤄진다. 하지만, 신념과 신념을 가진 대상을 동일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크게 다르다. '동성애'를 부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동성애자'를 안하무인처럼 취급하는 것은 '성경적' 가치관과 배치된다. 기독교적 수업에서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식이 기독교적이면 거기에 가치를 연결해서 가르칠 수 있다.

 

기독교적 수업이라고해서 윤리적 가치를 꼭 제시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적 수업이라고 해서 반드시 '능력' 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적 수업은 가능할 수 있지만 기독교적 삶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교사와 학생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이다. 기독교적이라는 말은 하나의 정답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창조성이 담겨 있다. 따라서 자신이 선택한 관점만 옳다는 배타적인 태도는 금물이다. 과학으로 창조주의 존재를 밝히려는 여러 가지 관점들이 있다. 과학 연구에도 열린 자세를 가져야지 과학을 절대 신뢰해서는 안 된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의 은혜에 속한 영역이기때문이다.

 

물리 교사인 저자는 각각의 이론이 어떤 주장을 하고, 한계가 무엇인지 알고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독교적 관점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면 하나님은 부족한 가르침을 은혜로 채우실 것이다. 평범한 교사가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추구하며 수업을 넘어 삶에서 기독교사의 본을 보이고자 노력하는 그의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아 놓은 『좋은 교사를 꿈꾸다』를 기독교사 뿐만 아니라 교단에 첫 발을 디딘 초임교사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참고로 저자가 학부모 주도의 학교가 지닌 위험성을 말한 부분이 공감이 된다. 교육의 주체가 학부모이기는 하지만 교사의 권위를 인정할 때 좋은 교육이 이루어진다. 대한민국의 학교 현장에는 부모는 없고 학부모만 있다. 무슨 말인가? 학교를 통제하려고만 하는 학부모가 늘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원주의'라는 웃픈 이야기가 돌아다닌다. 민원에 힘을 쏟다보니 가르칠 힘이 없다는 이야기가 교사들 사이에서 나온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교사들에게 특별한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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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퀴스 선생님의 위대한 수업 - 평범한 아이를 특별한 아이로 바꾸는 기적의 교육법
레이프 에스퀴스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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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교사라면 에스퀴스 선생님처럼


가난한 이주민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공립학교 초등학교 선생님의 교단 수기다. 레이프 에스퀴스는  '56호 교실' 담임교사다. 학생들을 위해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한다. 10~20분이 아니라 무려 1~2시간 먼저 교실에 출근해서 일찍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이한다. 수업 시간에 피드백을 해 주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아침 시간을 활용한다. 자신이 맡고 있는 학생들의 전인적인 성장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내어 준다. 시간과 재능, 열정과 노력까지.


수학을 싫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세심한 배려를 기울인다. 게임을 도입하여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준다. 미국 교실에서 사용한 것들이지만 현재 우리나라 교실에서도 충분히 활용할 가치 있는 학습법을 소개하고 있다. 단지 수학 점수를 높이기 위한 것들이 아니다. 단순히 수학 문제를 반복하여 푸는 방식이 아니다. 수학이 즐겁고 재미있음을 알려주기 위한 탐정놀이와도 같은 방법들이다.


수학 뿐만 아니다. 에스퀴스 56호 교실은 독서하는 반이다. 영어를 제2 외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교실에서 읽기를 넘어 문장을 이해하고 문맥의 흐름을 파악하는 법을 독서를 통해 해 내고 있다. 담임교사인 에스퀴스부터 책을 가까이 한다. 독서는 교과목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독서는 삶의 기초이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해야 하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56호 교실은 평생 독서하는 습관을 길러 준다.


56호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공부는 표준화 시험에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평가하길 원한다. 얼마나 많이 공부하느냐보다 어떻게 공부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역사 공부의 예를 보면, 미국의 중요한 사건에 대한 역사를 스스로 찾아 책을 통해 알게 한다. 그리고 현장체험을 통해 직접 경험하게 만든다.


과학과 예술, 체육을 무척 강조한다. 과학을 배우려면 책을 내려 놓고 실험장치를 집어 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실패를 맛보더라도 꾸준히 실험을 통해 오류를 잡아가도록 방향을 제시한다. 예술은 에스퀴스 56호 교실의 장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분야다. 밴드를 구성하여 연주할 정도로 악기 교육에 집중한다. 셰익스피어 연극반을 조성하여 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열어준다. 체육을 통해 올바른 스포츠 정신을 길러준다.


경제 개념을 심어 주기 위해 56호 교실에서는 화폐를 사용한다. 무모하게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절약하고 신중하게 쓰는 습관을 길러주기 위함이다. 아이들이 남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도록 세밀한 부분까지 교육시킨다.


현장체험에 관한 생각도 남다르다. 미국도 그런 교사들이 있나보다. 아이들만큼이나 생각없이 아이들을 인솔하는 교사말이다. 에스퀴스는 현장체험에 두가지 목적을 염두해 둔다. 하나는 지식을 탐구하기 위함이고 또 한 가지는 아이들이 언젠가 자립하게 될 때 필요한 기술들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여행 목적지가 정해지만 주저하지 않고 좋은 여행 안내서를 직접 구입하여 아이들과 함께 돌려본다. 직접 책을 통해 먼저 사전 정보를 입수한다.


이 모든 것을 소화해 내기 위해서는 자기 관리가 철저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건강 관리말이다. 아이들에게 한가지라도 더 챙겨주기 위해 방과후 시간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면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에스퀴스는 천상 교사다.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을 위해 존재하는 교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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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기를 권함 - 2004년 2월 이 달의 책 선정 (간행물윤리위원회)
야마무라 오사무 지음, 송태욱 옮김 / 샨티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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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방식은 삶의 방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밥을 빨리 먹는 사람도 있고 천천히 먹는 사람도 있다. 책 읽을 때 다독을 위해 빨리 읽는 사람도 있고, 저자처럼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읽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떤 유형에 속할까? 이 책만큼은 천천히 읽었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가는 유형의 삶을 살아왔다. 삶의 리듬이 그 사람의 세계관의 리듬이고 가치관의 리듬이라고 말한다. 이제 주위를 돌아보며 살아가야 할 나이라고 사람들은 나를 보고 말한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은 성과가 남다르다. 실적이 남다르다. 뭔가 결실을 일찍 거둔다. 그렇게 살아왔다. 저자는 그런 사람을 생쥐와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반대로 주위를 돌아보며 느릿느릿하지만 생각을 깊게 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코키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코끼리가 생쥐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 기겁을 할거다. 반대로 생쥐가 코끼리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 숨 넘어 갈 듯이 지켜 볼거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까?

 

독서의 즐거움이 크다. 정확히 말하면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통쾌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감동을 잊지 않기 위해 얼른 컴퓨터를 켜고 무작정 키보드를 이용하여 글을 친다.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친다는 표현이 맞다. 연필로 글을 쓴다면 무게감 있는 글을 쓸텐데 경박스럽게 키보드로 대충대충 글을 쓴다. 글을 써야 왠지 책 한 권을 다 읽은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직 '천천히 읽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천천히 책을 읽었다면 글도 천천히 써야 하는데.

 

책벌레라 불리우는 사람이 있다. 생활 속의 모든 일 가운데 독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을 말할것이다. 그런데 직장 생활하면서 독서에 집중하는 시간을 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나마 자투리 시간 아껴서 책상에 펴 놓은 쪽을 슬금슬금 읽어내며 다음 쪽을 넘긴다. 그리고 일을 한다. 그러다가 또 다시 시간이 나면 눈을 책으로 가져간다. 이전에 읽은 내용이 가물가물하더라도 괜찮다. 일단 읽어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어떻게 책 한 권을 읽는다. 그렇게라도 읽지 않으면 독서 리듬을 유지할 수 없다. 천천히 읽기와 거리가 먼 독서법이다.

 

매달 1만쪽의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은 39도의 고열에도 그 기준을 깨뜨리지 않는다고 한다. 무서운 사람이다. 빨리 읽어서는 알아채지 못하는 구절을 만난다. 천천히 읽는 사람은 시간이 더디걸리더라도 그 구절의 참뜻을 이해하고서야 넘어간다. 난, 그렇지 않다. 대충 넘어간다. 전형적인 다독형의 사람이다. 책 많이 읽는다고 누가 칭찬할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천천히 읽고 싶다.

 

숨을 깊게 쉬자. 책을 여유있게 바라보자. 책은 적이 아니다. 공격 대상이 아니다. 친근하게 바라보자. 저자의 노력에 값어치를 하자. 저자는 책 한 권 쓰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고생했을텐데 그것도 모르고 단 몇 시간에 읽어 해치우려고 했으니. 몸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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