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교사를 꿈꾸다 - 기독교적 수업을 향한 한 교사의 평생 분투기
소종화 지음 / IVP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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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수업에 해당되는 것은?

 

1번 교과를 성경과 연결하여 가르치는 수업

2번 교과 시간에 성경을 가르치는 수업

3번 기독교사가 가르치는 수업

4번 기독교사가 삶으로 본을 보이는 수업

 

정답은? 모두 아니다. '기독교적' 수업의 최종 대상은 '학생' 이 아니라 '교사'다. 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바로 물리 교과를 가르치는 소종화 교사다. 그가 '기독교적 수업'이 무엇인지 20년 넘게 교직생활을 해 오면서 고민하고 연구한 결과를 책으로 펴냈다. 주위의 권유로 인해.

 

기독교 학교 뿐만 아니라 공립학교에서 기독교적 수업을 하기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기독교 대안 학교라면 모를까. 기독교적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수업을 재구성한 교사의 기대에 못미치는 경우가 많다. 수업을 기독교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교과 지식을 성경과 연결시키는 것을 말할까? 성경적 가치관을 드러내는 수업을 말할까?

 

교사는 학생의 변화된 삶을 기대한다. 학생의 전인적인 성장을 바라보며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기독교사도 마찬가지다. 근데 차이점이 있다. 기독교사는 '내'가 학생들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인정한다. '내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변화될 것이라는 자만을 꿈꾸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수업 안에 녹아 있는 지식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의 삶 자체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왜곡된 지식과 죄로 얼룩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교과 연구를 게을리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교사는 지독스러울 정도로 수업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내가 가르치는 교과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1차적으로 교과 지식을 온전히 깨닫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나서 교과에 내재되어 있는 '지식' 자체가 과연 성경적인가? 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지식' 도 성경적인 것이 있고 비성경적인 것이 있다는 말인가?

 

저자 소중화 교사는 '효'에 관한 지식을 예로 든다. 모든 종교가 '효'를 다루지만 종교마다 내재된 가치관이 다른 것이 사실이다.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든지, 환생을 바라며 효를 다루든지 말이다. '지식'을 성경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을 구별한다는 말이다. '관용'이라는 예를 보자.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신념은 모든 종교에서 다뤄진다. 하지만, 신념과 신념을 가진 대상을 동일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크게 다르다. '동성애'를 부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동성애자'를 안하무인처럼 취급하는 것은 '성경적' 가치관과 배치된다. 기독교적 수업에서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식이 기독교적이면 거기에 가치를 연결해서 가르칠 수 있다.

 

기독교적 수업이라고해서 윤리적 가치를 꼭 제시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적 수업이라고 해서 반드시 '능력' 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적 수업은 가능할 수 있지만 기독교적 삶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교사와 학생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이다. 기독교적이라는 말은 하나의 정답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창조성이 담겨 있다. 따라서 자신이 선택한 관점만 옳다는 배타적인 태도는 금물이다. 과학으로 창조주의 존재를 밝히려는 여러 가지 관점들이 있다. 과학 연구에도 열린 자세를 가져야지 과학을 절대 신뢰해서는 안 된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의 은혜에 속한 영역이기때문이다.

 

물리 교사인 저자는 각각의 이론이 어떤 주장을 하고, 한계가 무엇인지 알고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독교적 관점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면 하나님은 부족한 가르침을 은혜로 채우실 것이다. 평범한 교사가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추구하며 수업을 넘어 삶에서 기독교사의 본을 보이고자 노력하는 그의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아 놓은 『좋은 교사를 꿈꾸다』를 기독교사 뿐만 아니라 교단에 첫 발을 디딘 초임교사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참고로 저자가 학부모 주도의 학교가 지닌 위험성을 말한 부분이 공감이 된다. 교육의 주체가 학부모이기는 하지만 교사의 권위를 인정할 때 좋은 교육이 이루어진다. 대한민국의 학교 현장에는 부모는 없고 학부모만 있다. 무슨 말인가? 학교를 통제하려고만 하는 학부모가 늘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원주의'라는 웃픈 이야기가 돌아다닌다. 민원에 힘을 쏟다보니 가르칠 힘이 없다는 이야기가 교사들 사이에서 나온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교사들에게 특별한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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