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갔다.
자리가 없어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전 부치는 아줌마가 말 없이 전 한 조각을 집어 준다. 건네주는 전 조각을 보고 멀뚱히 서 있자 아줌마는 얼른 받으라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돈 안 받는거니 맛이나 봐요' 뭐 그런 표정. '아줌마 고마워' 나도 말 없이 눈 웃음으로 답하며 전 조각 하나를 받아 입 속에 넣었다.
-순이네-와 -박가네-와 -황해도집-은 나란히 광장시장 복판에 난전을 차려놓고 장사를 하는데 일하는 아줌마들은 박가朴家도, 순이아줌마도 황해도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 박가네와 순이네는 기업형 전집이다 얼마나 많은 아줌마들이 일하는지 처음 장사를 했던 사장님들이 아직 이곳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분명 그럴 걸...
아니다. 어쩌면, 반죽 묻은 앞치마를 두른 아줌마가, 튀는 기름에 손등이 울긋불긋한 아줌마가 박씨 성을 가진 아줌마일 수 도 있겠구나. 그리고 순이 아줌마가 있을 수도 있고 황해도가 고향인 분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내게 말 없이 전을 건네준 아줌마는 조선족 같았다. 이 곳에서 일하는 아줌마는 대부분 조선족이니까, 아마 그 아줌마도 조선족일지 모른다. 고향이 황해도는 아닐까? 박씨 성에 이름은 순이일지도... 황해도의 박순이 아줌마.
박순이 아줌마가 부쳐내는 전을 먹었다. 둥근 달 같은 녹두전을......
막걸리를 찰랑찰랑하게 따라 마셨다. 꿀꺽꿀꺽 들이켜도 구겨진 양은사발에 담긴 막걸리를 단숨에 비워내기란 마음 만큼 쉽지 않았다.
박순이 아줌마랑 한 잔하면 좋을텐데, 박순이 아줌마가 전을 줬으니 나는 막걸리를 한 잔 주고 싶었다.
박순이 아줌마는 또 다른 남자에게 전을 주고 있다. 아까 나한테 줄때는 아무 말도 없더니 이번에는 웃어가며 말을 건넨다. 내게 준 것 보다 더 크고 따듯해 보인다. 그 남자도 아줌마에게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한다. 아줌마! 내가 보고 있는 거 알아? 아까부터 계속. 아줌마 그렇게 열심히 장사한다고 박가 아저씨가 돈 더 주는것도 아니잖아,
전집을 둘러싸고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전을 먹고 있었다.
껌 파는 할머니와 껌 주는 아가씨가 분주히 주변을 기웃거린다. 껌 파는 할머니는 울상으로 커플에게 다가가 남자에게 껌을 내밀고 껌 주는 아가씨는 분내 풍기는 눈웃음을 치며 남자손님들에게 다가가서 명함과 껌을 건넨다.
구수한 콩기름내 가득한 골목에 노래방 아가씨의 분내는 할머니의 징징거리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할머니와 아가씨는 서로 거리를 두고 다닌다. 짐작하건데 서로 싫어하겠지..
할머니가 왔다.
껌 하나만 사줘요, 다리가 아파서 그래~ 껌 하나만 사줘...... 총각 천원만 도와줘,
쪼글쪼글 패인 주름 때문에 웃는 지 우는 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싫어요,
마시다만 막걸리를 마저 마시고 한 잔 새로 부어 벌컥벌컥 마셨다. 첫 잔보다 술술 넘어간다. 할머니는 옆에서 자꾸 징징대고 나는 말 없이 껌을 테이블 끝으로 밀었다. 전을 먹을 차례인데 할머니를 신경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다시 막걸리를 잔에 따르고 있다. 다시 찰랑거리는 막거리, 이번엔 더 잘 넘어갈 것 같은 기분에 막걸리를 걸쭉하게 들이킨다. 막걸리에 젖은 손가락으로 간장절임 양파를 입에 넣고 씹는다. 할머니를 의식하다가 막걸리 한 병을 다 마셔 버렸다. 할머니는 그렇게 한참을 옆에서 팔도 흔들고 칭얼대다가 다른 손님에게로 갔다. 긴장이 풀린다. 정신 없이 마신 탓에 갑자기 취기가 돈다. 텅빈 막걸리 병이 눈에 띈다. 한 병 더 마실까? 조금 있으면 아가씨도 오겠지... 아가씨가 왔을 때 막걸리가 없으면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쭈뼛거릴지도 모른다.
사장님 막걸리!, 하고 소리치는 내가 꽤나 호기롭게 느껴진다.
아가씨가 왔다. 젠장 막걸리보다 먼저......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운 듯 눈음음을 치며 무릅을 모아 살짝 굽히고는 귀에다 속삭인다. 귀가 간지럽다. 입술이 귓바퀴에 닿을 것만 같다. 아가씨의 숨이 귓바퀴를 돌아 귓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따뜻했다. 그렇게 한참을 속삭였다.
대답이 없는 걸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아가씨는 대담하게 내 팔을 잡아끈다.
오빠, 가자~~
..............................................싫어요,
아가씨는 내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리고는 노래방 명함을 내려 놓고 마지막으로 속삭인다.
전화해~,
제 할 일을 못한 막걸리를 딸지 말지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아가씨가 다시 온다면 막걸리를 한 잔 따라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도 아가씨도 막걸리 따위 너나 먹어, 라고 하겠지...
갑자기 껌이 씹고 싶어진다. 할머니가 어딨지, 사방을 둘러 보지만 할머니는 어디에도 없었다. 근처에 있을 텐데, 할머니를 찾아야 했다. 할머니의 껌이 씹고 싶었다. 전집을 나서 불빛이 이끄는 대로 할머니를 찾아 걸어간다.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껌을 모조리 사서 밤새 껌을 씹어야겠다, 하지만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는거야... 다리가 너무 아프고 눈이 너무 시려서 불빛이 미치지 않는 어느 구석에 쪼그리고 쉬고 있을지도 몰랐다.
박순이 아줌마, 껌 파는 할머니, 노래방 아가씨... 내게 웃음을 건냈지만 모두 울고있었다.
그런데, 왜 다들 웃고 있어요... 왜?
아가씨가 놓고 간 노래방 명함에 들어있을 껌이 생각났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투명 비닐 포장에 명함과 껌 하나가 들어있다. 껌을 꺼내 씹는다. 시장 안 코발트 불 빛에 눈이 시리다. 눈이 시려 눈물이 찔끔 나온다. 그 아가씨도 시장 어딘가에서 코발트 불 빛 아래 시린눈을 참아가며 웃음을 건네고 있겠지.
껌이 더 필요했다. 명함. 명함에 전화번호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