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의 일이다. 그 때 만났던 어르신들 중에는 이미 고인이 되신 분도 있을 것이다.
북에 가족을 두고 내려 온 실향민들을 대상으로 방문 설문조사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10여 분이 소요되는 설문조사는 조사원과 대상자가 함께 살피며 진행해야 했는데
대부분 연로하시고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신 분들이 많아서 전문을 읽어 드리며 조사를 하기도 했다.
내가 담당한 곳은 노원구.
통일부에서 나왔습니다. 라는 나의 인사만으로 서럽게 하소연 하시는 할머니.
이산가족 상봉 신청했는데 어째 연락이 없냐며 한탄하시는 할머니.
문간에 세워놓고 당장 가라고 호통을 치시던 할아버지 (가라고해서 가려고 했더니 들어오라고 하시곤 울었다.)
나는 설문 조사만 하면 되는 알바생이라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그 분들은 나를 관에서 나왔다며, 잘 부탁한다고 각자의 사정을 이야기 해 주셨고 혹여 도망이라도 갈까봐서인지 내 손을 꼭 잡고 계시던 분들도 있었다.
십 분이면 되는 설문조사는 한없이 늘어졌지만 나는 할머니의 사연을 두고 나올 수가 없었다.
북에 살고 있는 동생들을 꼭 보고 죽어야 한다는 할머니의 눈물이 내 손등에 떨어질 때 나는 아르바이트를 그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할당을 채우지 못해서였고, 아무런 위로를 해줄 수 없는 난처함이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나를 온 집안 식구들에게 소개시켜 줬다. 식구들은 차례로 나와 내게 깍듯하게 인사했고 나는 사기꾼이 된 것 같았다.
할머니는 나를 나라에서 나온 공무원으로 착각하나 보다, 에라 모르겠다, 좋은 일하는 셈 치자!,
할머니의 고향 주소와 할머니 식구들 이름을 적어가며 사뭇 진지하게 나는 할머니의 사연을 들었었다. 나는 통일부에 돌아가서 꼭 할머니의 부탁을 전하겠다고 거짓약속을 했고 할머니는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받아적은 그 이름들은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설문에 응해준 분들에게는 하나로 농수산물 상품권을 한 장씩(1만원권)을 드리게 되어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국가에서 드리는 거라고, 상품권 한 장을 내밀었는데 할머니는 젊은 학생이 수고가 많다면서 얘기들어줘서 고맙다고, 상품권을 내게 주는 것이었다.
그 상품권을 받아왔다. 할머니가 주는 용돈 같았다. 처음부터 할머니는 내가 공무원이 아닌 것도 알고 있었다. 아파트 놀이터에 앉아 상품권을 만지작거리며 통일이 꼭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했다. 손등에 보이지 않는 화인이 새겨진 날이었다.
황장엽 전 비서의 장례식이 어제 치뤄졌다.
가족을 북에 두고 내려온 그분의 장례식엔 각 계 인사의 조문이 이어졌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서럽게 우는 이들도 있었다. 저렇게 서럽게 우는 사람들이 누굴까... 궁금해서 뉴스를 자세히 봤더니, 탈북자 단체의 대표들과 이북 실향민 대표라 한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해서만은 아닐 것이었다. 그들을 그렇게 서럽게 울게 만든 이유는 세상이 그들을 자꾸 지워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잊지 말아야할 것은 없다.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알지 못하는 새 세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피눈물이 안쓰럽고 불편할 뿐이다. 손등에 떨어진 뜨거운 눈물은 불편한 진실이었다.
외면하게 되는 이웃들의 눈물은 죄의식으로 남아있다.
몰라도 됐었을 상처에 눈이 시리고 오금이 저려서 자리를 피하고 만다. 그래서 평온한 내 생활.
집 안의 바퀴벌레도 내 눈에만 안 보이면 집에 살던지 말던지....
출근 길에 읽은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미군정의 횡포와 이승만과 한민당의 반역행위들...
잊혀져 가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박세길님은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를 썼겠지... 나 같은 회피형 인간에게는 읽혀진들 무용한 책이다.
몰랐어도 될 과거의 사건들.
몰랐어야 할 과거의 진실들.
세상 곳곳에서 상처 받고 눈물 짓는 사람들... 주위를 둘러보면 외면하고 살기 힘이든다.
동정도 말고 봐도 못 본척.
싸구려 동정으로 마음의 짐 내려 놓을 생각말고 빚진채 살아가는 거다. 같이 슬퍼하는 것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하지 말자. 비굴하게 살면서 세상에 빚지고 사는것만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