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그 미 투 헬 - Drag Me to Hel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음산한 분위기의 도입부는, 분명 코믹요소 때문에 무섭지 않을 것이라는 친구의 말을 들었음에도 나를 긴장케 만들었다. 약간 몸을 움추리고는 가방을 꼭 껴안고 얼핏 칙칙해보이는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가며 잔뜩 무서울 준비를 하는데 순간 피식 웃음이 난다. 도대체 어떤 종류의 악령이 인간의 싸대기를 마구 날리는거야? 아, 이 영화 좀 괜찮다!  

영웅시리즈 영화에 알러지를 갖고 있는 나는 딱 하나 즐겁게 본 시리즈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스파이더맨] 시리즈 였다. [아이언맨]이나 [배트맨] 처럼 돈으로 쳐 발라서 화려하게 화면을 치장해주는 것도 아니고, [히어로즈]의 주인공들처럼 초능력을 팍팍 쏴주는 것도 아닌 스파이더맨은 셀카를 찍어서 신문사에다 팔아 돈을 벌고 무기도 고무옷 하나다. 고무옷이 힘을 조금 주기는 하지만 악당에 비해서는 너무 약해서 시종일관 안쓰럽기만 하고 심지어 악당을 이길 수 있을지도 초조한데, 이게 스파이더만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이 시리즈의 감독인 샘 레이미가 [드래그미투헬]의 감독을 맡았단다. 여전히 인간적인 냄새를 폴폴 풍긴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주인공이 '나 대신 지옥불에 불탈 사람은 누구인가' 를 다크써클이 가득한 눈을 치켜뜨고 밤새 고민하는 장면이었는데, 도대체 누가 영원히 지옥에서 썪을만한 영혼을 가졌는지의 물음을 나 자신에게로 돌려서 해보게 되는 부분이었다.  

평소 인간의 악한 점을 더 자주 보고 가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혐오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의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화살표를 던지면 금새 그 당사자가 안쓰러워지는 것이다. 아, 벌레만도 못한 인간은 있을지언정 벌레만도 못한 영혼은 없을지리니.


깜짝깜짝 놀래거나 엽기적이고 구역질나는 장면들이야 공포영화니깐 그렇다 치자. 라고 말하기에는 정말 무섭고 토할 것만 같은 장면들이 한 가득이었다. 

분위기를 잔뜩 조성해놓고 너 이제 놀랄 시간이야.. 라고 놀리듯 말해줘서 잔뜩 놀랠 준비를 해놔도 진짜로 흐읍! 하고 놀라버린다. 그만큼 기상천외하게 관객을 놀라고 무섭게 하지만(사실 이건 관객이 겁 없으면 안놀라겠지, 지극히 개인적이다.) 금방 또 황당한 상황을 만들어내서 픽 웃어버리게 만든다. 이건 정말 감독의 역량이 대단하다고밖엔 말 못한다. 게다가 벌레는 정말이지 구역질나서 물 한 모금을 삼켜야 했다. 영화 시작하기 전에 라님께 무서워서 목이 바짝바짝 마를지도 모르니 마시라고 장난치듯 말해놓고는 내가 다 마셔버렸다.

서양 공포 영화에서 이렇게 오싹해본 것은 [스켈리톤키]이후로 처음이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미신과 주술, 악령, 귀신 같은 것에 공포심을 느껴서인 듯 하다. 할리우드는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여대는 블러드 호러물에 스스로도 질렸는지 자꾸 일본이나 한국의 공포영화를 가져다가 만들어대더니 안되니까 돌파구를 마련한 듯 하다. 꽤나 괜찮은 돌파구라 생각한다. 동양적인 공포샘을 자극하기도 하고, 서양적인 주술을 끌어다 쓰니 생경한 공포도 아닌데다가, 엽기와 호러도 부분적으로 잘 배치해 두었으니 꽤나 흥행에 성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제목부터 약간 오싹한데 표지 한 번 정말 잘 뽑았다.      

  

흑, 지옥에서 불타오르는 저 불길에 휩싸인 여인네를 보아라, 도대체 어떤 사정이 있길래 이렇게 예쁜 여자가 지옥불에 휩싸이게 되었는지 정말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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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 드래그 미 투 헬, 나도 지옥으로 데려가줘
    from Level18 2009-06-16 07:01 
    추잡스럽고 찝찝하게 터지는 유머와 공포장치로 무장한 영화들이 있다. 예컨대 이블데드 같은 영화들 말이다. 출세작 이블데드 시리즈 이후 뜬금없이 스파이더맨 시리즈에 올인한 샘레이미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그런 샘레이미가 '드래그 미 투 헬'로 돌아왔다. 싸구려 티나는 연출과 조잡한 장치들을 이용해 호러의 본질에 충실하게 말이다. Drag Me to Hell 디 아더스나 장화홍련류로 대표되는, 비교적 최신 호러작품들은 지나치게 세련미를 과시한 경향이 있었..
 
 
Forgettable. 2009-06-1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보고 나오면서 누군가 고작 그런 일 때문에 영혼을 지옥불에 던져놓냐고 그러시며 웃었는데.. 이제 난 할머니가 이해가 간다.

jh 2009-06-20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꺅 이영화보고싶어.............슈내에 미쳐있으므로ㅋㅋㅋㅋㅋㅋㅋㅋ

Forgettable. 2009-06-21 10:53   좋아요 0 | URL
슈내가 뭘까 검색해봤다는-_-;;
재밌냐?ㅋㅋㅋ 나도 함 봐볼까.......
 
문장읽기의 즐거움과 편안함
간만에 드라마 추천-

[릴레이] 나의 독서론

규칙입니다.
1. 독서란 [ ]다. 의 네모를 채우고 간단한 의견을 써주세요.
2. 앞선 릴레이 주자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이 릴레이는 6월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기타 세칙은 릴레이의 오상 참조 

 

독서란 [문(門)]이다. 

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던, 모르던 간에 저는 처음 문을 열기 전 약간 멈칫합니다. 제가 상상했던 것이 있을 수도 있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문 너머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들었던 것과는 달리 내가 싫어하는 것을 보거나 듣게 되면 어떻게 할까, 걱정을 하지만 그 안에 덫이 있지 않은 이상 문을 닫고 다시 밖으로 나와 다른 문으로 들어가면 되지요. 반대로 문 안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잔뜩 들어있으면 나는 며칠이고 그 방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현실을 살며 매일 드나드는 내 방문, 회사의 사무실 현관문, 옷 가게 문, 식당문, 화장실 문 등등 수많은 문을 들락거리며 살아가는 것처럼, 익숙하거나 또는 새로운 책의 첫장을 열며 저는 매 시간 또 다른 시공간을 체험합니다.  

스승은 제자를 선택할 수 있지만, 책은 독자를 선택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든지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문을 활짝 열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문이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독서를 합니다. 



 * 릴레이 주자들  

  • Inuit님 (독서란 자가교육이다)  
  • buckshot님 (독서는 월아이다)  
  • 고무풍선기린님 (독서란 소통이다)  
  • mahabanya님 (독서란 변화다)  
  • 어찌할가님 (독서란 습관이다)  
  • 김젼님 (독서란 심심풀이 호두다)  
  • 엘군님 (독서란 삶의 기반이다)  
  • 무님 (독서란 지식이다)  
  • okgosu님 (독서란 지식섭식이다. ) 여기도 #개드립    
  • hyomini님 (독서란 현실 도피다. )     
  • Raylene님(독서란 머리/마음용 화장품 이다.)    
  • 하느니삽형님(독서란 운동이다)     
  • foog님(독서란 이다)    
  • 토양이님(독서란 모르겠다.)   
  • 파이랑님(독서란 새벽 3시다.)   
  • Demian   님(독서란 여행이다.) 

     

    제가 지정하는 다음 릴레이 주자는 두둥, 
     
    게으름을 무찌르자- 뽐뿌질 리뷰의 대가이신 lazydevil 님  
    little miss coffee - 제 독서의 멘토이신 하이드님
     
    부탁드립니다^^ 
     
     
    --------------------------------- 
    흑흑 데미안님 정말 원망스럽습니다. 이거 생각하다가 아침시간을 다 보냈어요, 레포트보다 더 어렵습니다. ㅜㅜ  

    당췌 제가 남들 보여주기 글 쓰기에 알러지가 있어서,  

    그냥 가볍게 '술'이다- 취하는 걸 즐겨야 볼 수 있으니까, '정신줄 놓는 행위'이다-독서를 할 땐 넋놓고 보니까 따위를 생각하며 재밌게 써봐야겠다 했는데, 다른 분들 쓰신 것 보니까 헐, 너무 다들 잘 쓰셔서 깜놀하고,, 데미안님 왜 절 이런데 끌어들이셨냐며 원망하고-_-  그래도 오랜만에 머리 지끈할 정도로 머리를 굴려서 나름 매끈한 결과물이-;;

    특별한 두 분께 바통을 넘기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평소 제 독서에 많은 영향을 끼치시는 분들께 넘겨드려요, 이 참에 알라딘에도 릴레이 같은거 하면 재밌을 것 같네요. ㅎㅎ

    (데미안님, 저 왠지 감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왠지 더 열심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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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릴레이] 나의 독서론
      from little miss coffee 2009-06-14 11:59 
      [릴레이] 나의 독서론 규칙입니다. 1. 독서란 [ ]다. 의 네모를 채우고 간단한 의견을 써주세요. 2. 앞선 릴레이 주자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이 릴레이는 6월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기타 세칙은 릴레이의 오상 참조     독서란 [발견]이다. 이 '발견'은 새로운 것들의 발견이기도 하고, 늘 옆에 있으나 몰랐던
    2. 월아, 알고리즘
      from Read & Lead 2009-06-21 06:18 
      부제: 독서(讀書) → 독아(讀我) → 월아(越我)inuit님께서 나의 독서론이란 주제로 릴레이 포스팅을 시작하셨다. 규칙입니다. 1. 독서란 [ ]다. 의 네모를 채우고 간단한 의견을 써주세요. 2. 앞선 릴레이 주자를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이 릴레이는 6월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기타 세칙은 릴레이의 오상 참조inuit님께서 유정식님과 맑은독백님께 바톤을 넘기셨고, 나는 맑은독백님으로부터 바톤을 이어 받았다...
     
     
    Demian 2009-06-1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야~~~~~~~~~!!!!!!!!! 정말 멋집니다^0^////
    독서는 문이다. 딱이네요. 우왕~^^ 한참 되새기다 갑니다. 추천!!!!!! ^^/

    Forgettable. 2009-06-14 18:45   좋아요 0 | URL
    아휴 데미안님 맨날 칭찬만 해주시니 제가 진짜 괜찮은 글 쓴다고 착각하잖아요! ㅋㅋㅋㅋㅋ
    님 덕분에 제가 새로운 블로그 문화도 접해보고 감사합니다.^^

    잉크냄새 2009-06-14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오랫만에 보는 서재 릴레이 로군요.예전에 참 유행하던 것이었는데...
    독서에 대한 정의가 멋집니다.

    Forgettable. 2009-06-14 18:48   좋아요 0 | URL
    ㅎㅎ 전 처음에 이게 뭔가......... 하면서 벙쪘다가 약간 설렜다가 했는데;; 이게 보통 어려운게 아니더라구요 ㅋㅋㅋ

    잉냄님(이렇게 불러도 되나요, 이게 요즘 중고딩 말줄임버젼이에용ㅋㅋ) 글만 하겠습니까; 전 백년 써도 그런 여행기는 못써냅니다. ㅋㅋㅋ

    잉크냄새 2009-06-15 12:53   좋아요 0 | URL
    보통 앞의 두자만 불러서 잉크 라고는 하는데 잉냄은 처음이네요.
    그래도 뒤의 두자 냄새님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양합니다.^^

    Forgettable. 2009-06-15 13:00   좋아요 0 | URL
    아, 장난으로라도 냄새님- 하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행기 2탄 또 써주세요, 제 로망 자이살메르 낙타사파리 기대할게요! (시간상 자금상 못갔거든요 ㅠㅠ 아 근데 낙타 사파리 안하셨을 수도 있겠구나..)

    잉크냄새 2009-06-16 13:03   좋아요 0 | URL
    전 낙타사파리를 했답니다. 근데 낙타사파리의 로망이 사막에서 맞이하는 밤의 별이었는데 제가 간 날이 비가 내려서 꽝이었답니다. 자이살메르는 3탄에 등장할 예정입니다. 개봉박두! 두둥!!

    2009-06-14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4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이] 2009-06-15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잘했어요:D

    2009-06-15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5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방문자수가 이제 곧 5000이다- 하하하하 
    실제 방문자보다는 사실 알라딘 방문자수 렉이 분명 엄청난 공을 세운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지금 보니 싸이월드는  26000이 넘었네, 너네들 다 누구냐-_- 뭐 지금은 하지 않지만. 
    술마실 사람 없는 우울한 프롸이데이 나잇이긴 하지만 이런 게 낙이죠 뭐.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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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zydevil 2009-06-12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히 축하합니다. 그런데 포겟님 너무 酒思가 빈번하신 듯...^^;;

    2009-06-12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이] 2009-06-13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셈 나는군요.

    Forgettable. 2009-06-14 08:54   좋아요 0 | URL
    파워블로거께서 시샘은요^^

    2009-06-13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4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소비는 보통 카드 결제일에 기준하여 과소비와 무소유의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데,
    (정말이지 카드인생에서 벗어나고 싶다. ㅠㅠ) 
    참고 참다가 드디어 책을 살 수 있는 날이 되어 그 동안 무수히 고민했던 책들을 그냥 모두 사버렸다-_- 
    이럴라면 고민은 왜했는지- 

    어쨌든 신난다 신나!!! 

    +
    오, 지금 보니 다음 블로거 특종에 뽑혀서 책 구매 후원받았다. 흐흐흐
    완전 신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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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이] 2009-06-12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다들 흥미진진하겠는걸요? 잘 지내시죠? ㅋ

    Forgettable. 2009-06-12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매일매일 댓글 달고 인사하는 사인데 잘 지내냐고 하면 ㅋㅋㅋㅋㅋㅋㅋ
    왠지 급 멀어지잖아요 ㅋㅋ

    문학에서 좀 벗어나볼까 노력해봐도 잘 안되네요^^;

    [해이] 2009-06-13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문학 좋은데 ㅋ
     

    내가 뱉어낸 글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던가, 글로 소통을 한다, 글쓰기의 목적, 이런 종류의 글을 볼 때마다 나는 자괴감에 빠지게 되는데, 이유는 내 서재에 들락거리시는 분들도 아주 잘 아시다시피, 나의 글쓰기는 정보제공이 목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깊은 통찰의 끝자락에서 나오는 정돈된 글로써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말로 화려하게 꾸며놓아 트집잡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맛만 다시게 만드는 그런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솔직히 삶의 낙이 없어서 시작하게 되었다. 

    워낙에 컴퓨터를 멀리하던 터였는데, 일을 하게 되며 나인투식스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자니 갑갑하기도 하고, 흡수할 굴림체가 너무 많다보니 약간 토할 지경이라, 그것을 좀 토해놓을 곳이 이곳이었다. 학교다니면서 과분할만큼 좋은 선생님들과 선후배,동기들과 함께 향유했던 지혜의 시간들이 회사에서 싸그리 사라지는 게 순간 씁쓸해져서 출퇴근시간, 주말에 책을 읽고 적어놓는다고 시작한 서재질이 점점 주객전도가 되어 잡설이 더 많아졌다. 

    나 역시도 어려운 글 보다는 잡설이나 일상생활 이야기 읽기를 더 좋아해서 처음에는 부담 없이 손이 키보드 위를 날아다니는 대로 지껄여놓고, 스스로도 글 쓰는 행위를 배설한다고 칭할 정도로 부담 없이 적어두었었다. 당당하게 남들이 내 글을 좋아할 이유는 없다고도 얘기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게, 점점 온라인상의 인맥이 넓어지고, 이 얕디 얕은 인맥에 집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글 쓰는 것이 자꾸 눈치를 보게되고,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그래서 깔끔하고 정갈하고 어렵고 단아한 문체로 '격이 낮은 글뿐인 서재는 눈에 차지도 않아.' 라던가 '왜 글을 써놓니?'. '싸질러 놓은 글에 책임을 져야한다.', '잘 쓴 글만 읽는다.', '제대로 좀 읽어라.' 라고 뱅글뱅글빙글빙글 돌려말하는 글을 보면 나도 좀 생각을 하고 멋진 글을 써놔야 하나 급 좌절감에 빠져버린다. 그럴 땐 내가 써둔 글들이 너무 부끄러워서 서재를 확 닫아버리고 싶기도 하고, 글 잘 쓰시는 분이 내 글에 댓글이라도 하나 달아놓으면 얼굴이 빨개져선 앞으로 더 잘 써보겠다고 굳게 허튼 다짐을 하기도 한다. 

    글을 잘 쓰려면, 기발한 생각을 하거나, 유머가 있어야 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면 기억력이라도 좋아야 한다. 어디서 본 멋진 글귀를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버튼을 누르고 적절한 순간에 더블클릭하면 되니까. 그런데 나는 물고기 기억력이라 좋아하는 철학자 이름 하나도 헛갈려하니까 정말 글을 잘 쓸래야 쓸 수 없는 것이다.  

    으하하, 나는 쉽게 쓰는 것이지 결코 얕은 사람이 아니야!! 내공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충 알아보겠지!!!!!!!!
    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도 새는걸 알고 있다. 기품이 있어야 기품있어 보이는 것이고, 내뱉은 말 한마디에서도 인격이 보이는 법이다. 하물며 글이야, 난 결코 진중하고 지혜롭고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가 없겠지?

    그러니까 이 장황하고 지루한 페이퍼의 결론은 

    보잘것 없는 이곳까지 찾아주시는 분들께, 제 삶의 낙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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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릴레이] 나의 독서론
      from 바람구두를 신다 2009-06-13 12:31 
      [블로그 릴레이] 나의 독서론 inuit 님으로부터 시작된 이번 릴레이의 주제는 '나의 독서론'입니다. 몽글몽글 새파란 블로거 님께서 다음 주자로 제게 바통을 넘겨주셨습니다. 릴레이 독서론 규칙 1. 독서란 [ ]다. 의 네모를 채우고 간단한 의견을 써주세요. 2. 앞선 릴레이 주자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이 릴레이는 6월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기타 세칙은 릴레이의 오상 참조 나의 독..
     
     
    라주미힌 2009-06-1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엔 잘 쓴 글은 풍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듯 해용.. 근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은 진실한 경험만큼 좋은 거름은 없는거 같아용;; 전 둘 다 없어서;;; ㅋㅋㅋㅋ
    아.. 나도 글 잘 쓰고 싶당..

    Forgettable. 2009-06-11 14:07   좋아요 0 | URL
    라주미힌님에게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미덕인 유머(!!!!!강조)가 있으니 잘 쓰시는 분입니다. ㅎㅎ
    그리고 예전에 리뷰 같은거 본 적 있는데 잘 쓰시는데요 뭐..

    전 마지막으로 영화 본게 5월 3일이군요.. 내게도 이런 일이(털썩)

    뷰리풀말미잘 2009-06-11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부터 뽀님을 알아봤어요.

    Forgettable. 2009-06-11 16:36   좋아요 0 | URL
    헤헤 이런 은밀한 댓글은 비밀글로 했어야죠 ㅋㅋ

    [해이] 2009-06-11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랑 똑같은 고민을 하고 계시군요~

    Forgettable. 2009-06-11 22:45   좋아요 0 | URL
    랄랄라 우리는 사춘기를 함께겪는 '같은' 세대 ㅋㅋㅋ

    2009-06-12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9-06-12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치 보고 자기 검열을 하는 순간은 다들 경험하나 봅니다.
    개인의 기록을 위한 공간인데 눈치보고 자기검열까지 해야되나 싶다가도 그걸 완전히 떨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도 나름 알라딘 1기 부터 운영한 서재인데 제 서재는 참 누추합니다.ㅎㅎ

    Forgettable. 2009-06-12 23:27   좋아요 0 | URL
    제말이요.. 알라딘 1기시군요, 이 곳에 참 글 잘 쓰는 고수분들이 많으셨다는데 일찍 알지 못했다는게 아쉬워요 ㅎㅎ

    누추하긴요, 분위기 있는데^^

    Demian 2009-06-13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썽님^^ 트랙백 하나 드렸는데 괜찮으시다면 '숙제'해주세용. 이히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