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이 지나갔는데, 당연히 올 봄이 오지 않는다면! 이라고 걱정하던 누군가의 공상에 아주 천천히, 이번에도 어김없이 봄은 대답해 주고 있다.
어제같은 오늘과 몇년은 더 지난 것만 같은 어제와 내일같은 한달 후를 살고 있다.
4번의 주말이 남았고 보고 싶은 사람은 많고 해야할 일도 많다. 그리고 봄은 왔다. 괜히 마음만 조급해져서는 더더욱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김에 치과에 전화해서 사랑니 수술 예약을 덜컥 해버렸다. 어떡해 ㅠㅠ
하려고 했던 것의 대부분은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다이어리와 통장 잔액만 쳐다보고 있는 실정이 참 괴롭다.
금요일에는 미녀친구와 눈이 고운 남자와 만나서 삼겹살에 소주를 먹고 맥주를 마시며 놀았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친구를 좋아한다. 이것은 마치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산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다."라고 단언하듯이 나 역시 "술 좋아하는 사람 치고, 재미없는 사람 없다."라고 말한다.
눈이 고운 남자는 술을 잘 마실수 없는 사람이었는데도, 열심히 마시는 그 모습에 반해버렸다. 미녀친구와 나는 전 만남 때의 술꼬장담을 공유하며 술을 많이 마시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역시나 함께 취해버리고 말았다. 술과 고기와 미녀와 남자가 있는데 안취할래야!
토요일에는 축가멤버 뒤풀이가 있었다. 일요일에 새벽비행기로 출장간다는 결혼당사자는 결국 오지 못했고, 우리끼리만 놀았는데 수고비로 받은 돈으로 밥을 먹을까 술을 먹을까, 하다가 맛있는 밥 한끼로 돈을 다 써버리느니 차라리 양주로 써버리자며 양주를 마시러 갔다. 물탄게 너무 뻔한 양주를 마시고 취하지가 않아서 전전긍긍하다가 다음에는 차라리 파티룸을 빌려 마트에서 장을 봐서 먹고 마시는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로 연애이야기도 하고, 고대김예슬 얘기도 하고, 연대(연세대아님)이야기도 하고, 취업 이야기도 하고, 삶에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씩 했다. 후배는 김예슬이 좌파 스타란 이야길 했고, 친구는 그녀의 선택에 환호했고, 난 여기에서 약간의 의구심을 드러냈다.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맨몸뚱아리로 뻔하디 뻔한 사회에서 사는 것에 대한 나의 회의감은 우리 낭만주의자들의 거센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ㅎㅎ
얼굴만 알고 있다가 축가 때문에 새로이 친해지게된 한 남자후배에게 첫인상을 말해달라고 했다. 이 문장을 읽고 나의 평가받기 좋아하는 습성을 떠올리며 웃을 나의 지인들에게 말하지만, 이 의견은 내가 아닌 친구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끼리끼리 논다고 ㅎㅎ 어쨌든 나의 인상은 차분하고, 여성스럽다는것. ㅋㅋㅋㅋㅋㅋㅋ '아직은' 첫인상이 유지되고 있다고.
일요일에는 죽은 듯이 잠만 잤고, 어제는 친해지게 된 지 벌써 2년에 접어든 한 남자사람과 술을 마셨다. 죽을 정도로 매운 콩불을 먹고, 다신 먹지 않겠다고 하며 두유를 쪽쪽 빨아먹었다. 내 mp3을 틀어둔 것만 같은 이자까야에서 이런저런 잡답을 나누다가 [천개의 고원]이야기가 나왔다.
이 친구는 건축을 공부하는 친구인데, 자기 분야에 대한 꿈도 다부지고, 아이디어도 꽤나 참신해서 난 이 친구의 전공 이야기를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어쨌든 요즘 미학을 공부하게 되었다며 약간 머뭇거리며 [천개의 고원] 이야기를 꺼내는데, 내가 대뜸 아, 들뢰즈였나. 했더니 반색한다. 이후로 아도르노, 롤랑바르트의 이야길 잠깐 하고 기호학 이야길 잠깐 하고, 중세의 숭고미 이야기도 잠깐 하고, 임석재와 안도타다오 이야기도 잠깐 했다.
그 친구에겐 허세부리느라고 아는척 했지만 이 아는 척은 대부분 알라딘 서재질에서 곁눈질한 결과;
나 철학한 여자야, 라며 콧소리를 내니 이 친구 금새 사랑에 빠진듯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어이, 아무한테나 그런 눈빛 보내지 말라고.
우리 나이의 친구들은 마치 유행처럼 '우리 서른 다섯이 될때까지 솔로면 결혼하자.' 라고 약속한 남자사람친구를 하나씩 두고 있는데, 어제의 이 친구는 나의 '그' 남자사람친구이다. 장난처럼 해왔던 얘긴데, 어제는 갑자기 진지하게 정말로 결혼하자고 한다. 애인한테나 잘하시라능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