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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ㅣ (구) 문지 스펙트럼 13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김효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루이지 피란델로 |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재미있는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녀의 젠제는 결점이 없는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관대하게 보았다! 그녀는 그에 대한 많은 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것이 그녀의 취향과 망상에 따라 그녀의 방식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방식대로 만들어졌단 말인가?
내 방식은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녀가 그녀의 젠제에게 돌렸던 취향과 감정을 나의 사고를 통해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그에게 그런 취향과 감정을 주었다는 건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녀의 견해에 따르자면, 젠제는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었고, 진정 그의 방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방식대로, 다시 말해 명백히 나의 것이 아닌 그의 현실에 따라 생각하고 느꼈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는 그가, 즉 젠제가 유발시킨 고통 때문에 울고 있는 아내를 보았다. 그래요, 선생님들! 그 사람 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왜 그래, 자기?"
그녀는 대답했다.
"아니, 나한테 그 이유를 묻는 거야? 당신이 조금 전 내게 한 말로 충분하지 않아?"
"내가?"
"그래, 당신이!"
나는 망연자실했다.
내가 내 말에 담았던 의미는 내게 어떤 의미가 되었음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 말, 즉 젠제의 그 말이 그녀에게 주었던 의미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나나 다른 사람이 한 말은 그녀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을 터이지만, 젠제가 한 말은 그녀를 울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말이 젠제의 입에서 나오면, 그것이 다른 어떤 가치를 갖는지를 모르겠지만, 그녀를 울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랬습니다, 선생님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위해 혼자 말하고 싶다. 그녀는 그녀의 젠제와 대화를 나눴다. 그는 내 입을 통해 내가 전혀 몰랐던 방식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내가 그녀에게 말하고 그녀가 내게 반복했던 그 모든 것들이 왜 무의미하게 거짓말이 되고 멍청한 것이 되는지 알 수 없다. p.72~73
그녀는 정말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마침내 모든 것이 명확해졌을 때-못 견딜 정도로 샘이 났다-내게 샘이 났던 것이 아니다. 믿어주시라. 당신들을 비웃고 싶군!-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아닌 어떤 사람, 즉 나와 내 아내 사이에 숨어 있던 멍청이에게 질투가 났던 것이다. 그는 공허한 그림자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믿어주시라-왜냐하면 오히려 그는 그녀에게 사랑받기 위해 나의 육체를 이용하면서 나를 공허한 그림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시라. 아내가 나의 입술 위에서 내가 아닌 어떤 사람과 키스했던 것이 아니라고? 내 입술 위에서? 그렇지 않다. 말도 안돼! 그것이 내 것 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키스했던 입술이 바로 내 것이라고? 하지만 그 육체가 실제로 내 것일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나에게 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껴안고 사랑했던 그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잘 생각해보시라. 당신의 아내가 당신을 안고 당신의 육체를 통해 그녀가 가슴에 새기고 있던 다른 남자와의 사랑을 즐긴다는 걸 알게 된다면, 가장 고상한 거짓말로 당신의 아내가 당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할까?
어쨌든 이 경우가 어떤 점에서 내 경우와 다른가? 내 경우가 더 심각하다! 그 경우, 당신의 아내는-죄송합니다-당신과 사랑을 나눌 때 타인과의 사랑만을 가장하기 대문이다. 그러나, 내 경우, 나의 아내는 내가 아닌 어떤 사람의 현실을 두 팔로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진정 현실적인 존재였으므로, 마침내 화가 난 나는 그의 현실에 나의 현실, 즉 나의 아내를 강요하면서 그를 파괴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내 아내였던 적이 없었다. 그의 아내였다. 그녀는 이방인의 품안에 있는 듯, 공포에 질려서 모르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할 수 없고 잠시도 나와 살 수 없다며 떠나버렸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녀는 떠나버렸습니다. p. 7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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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의 복잡하고 어렵고 약간은 지루할 수 있는 얘기를
그냥 참고 따라갈 수 있을만큼 도입부는 정말이지,
굉.장.히. 흥미롭다.
아내인 디다에게 젠제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모스카르다는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자신의 코가 한쪽으로 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혼란에 빠진다. 그는 그의 코가 휘었다는 것을 몰랐으므로, 코가 휘지 않은 모스카르다로 자신을 알고 있었는데, 사실 그는 코가 휜 모스카르다였던 것이다.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 때부터 그는, 아무도 아니면서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을 추적하기에 온 몸을 던진다. 처음에는 자신만이 그랬던 게 아니라는 사실 정도로 위안을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가는 곧곧마다 거울이 있고, 코가 휜 모스카르다와 그밖의 모스카르다를 만날 수밖에 없다. 원수는 외다리에서 만나듯이-
그는 그와 "가까운 사람들 안에 살고 있던 다른 모스카르다를 모두 발견하여, 그들을 하나씩 없애버리기 위해" "미친 짓"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업으로 이어온 '고리대금업자인 모스카르다'와 또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내에게만 젠제인 모스카르다'를 제일 공들여서 분해한다. 결국은 고리대금업자로서 만들어온 관계에 변화를 가져오고, 아내와의 관계도 변하게 되니까 어떻게 보면, 그가 의도한 '미친 짓'은 성공한 거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나. 그는 또 다시 다른 형식 속에 갇힌다. 어쨌든 사람이 살아있는 한, 육체가 썩지 않는 한, 사회 속에 있는 한, 형식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형식은 그렇게 다채롭지도 않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려야하는 극단적인 존재방식이니까.
그래서 문제다. 왜냐면, 한 그릇 안에 들어갈 게 너무 많고, 어떻게 다 비집고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그건 또 변하게 마련이니까.
그래, 이렇게 복잡한 문제다. 누군가가 아무도 아니면서, 동시에 십만명, 혹은 그 이상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루이지 피란델로도 이 책에서 다 쏟아붓는다. 그는 혼잣말도 했다가 객관적으로도 말했다가 윽박도 질러봤다가 무시도 했다가 왔다갔다한다. 때로는, 너무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지만, 때로는, 스스로가 미친 놈 정도로 여겨질까봐 겁내기도 하고.
초반에 휜 코를 발견하고 방황하는 장면이나, 고리대급업자와 젠제를 해체하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빼면, 그렇게 혼란스러운 머릿속 생각을 계속해서 얘기하는 탓에, 이 책은 가끔은 철학서같기도 하고, 지겹기도 하다.
형식이 한 가지인데, 내용은 다양하고 유동적이라서 괴로운 것처럼,
할 말은 한 가지이지만, 말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고, 변하니까 그렇게 계속해서 변태를 거듭한다. 한 권의 책 안에서, 피란델로의 고민이. 그리고, 그럴 수밖에는 없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이 쓰는 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