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마감] 9기 신간평가단 마지막 도서를 발송했습니다.
예전에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 오프닝에서 이런 내용을 들은 기억이 난다. 대략 "그 여자는 6개월에 한 번 꼬박꼬박 치과에 스케일링을 받으러 가는데,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나서 깨닫는다. 6개월에 한 번 스케일링을 하기 시작한 이후 그녀에게 시간은 6개월 단위로 흘러, 스케일링을 2번 하고 나면 1년이 가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도 첫 직장에서 보내는 3년 반 동안은 시간이 그런식으로 6개월 단위로 흘러갔고, 1년에 한 번 있는 시험을 준비하던 때나, 연간행사를 진행해오는 몇 년 전부터는 행사 한 번 치르고 나면 1년이 가고 1살을 먹는 식으로, 시간이 뭉터기로 쑥쑥 흘러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던 와중에 다시 나의 시간을 그나마 절반으로 쪼개어 인식시켜주고, 다시 그 시간을 1달에 한 번 돌아오는 기쁨과 설렘으로 돌려준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건 바로 운 좋게도 '9기 소설분야 신간평가단'이 된 것이었다. 1달에 2권씩 새로 나온 책을 선물받으면서 시간을 한 달 단위로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개인적으로 마음이 부대끼는 일을 겪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내가 신간평가단이 됐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냥 피식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정말 너무 기분이 좋았다. 여기 서재 어디였는지, 내 계정의 SNS를 통해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랑해요 알라딘'이나 '알라딘 덕에 산다' 같은 낯 간지러운 말을 흘리기도 했는데, 흔히 아부성 발언이기 쉬운 이 문장들이 내겐 정말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추천신간도서를 고르고, 또 어떤 책이 선정될까 기다리고, 언제 책이 도착할까 기다리고, '알라딘 증정'이라는 예쁜 글자가 꽝 박힌 책 두 권 중 뭐부터 읽을까 책장을 넘겨보고, 실제로 한 권 두 권 책을 읽으면서, 참 행복했다.
때로는 일이 바쁘거나 개인사로 바쁘거나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며칠씩 이어져 마감날짜를 지키지 못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고 실제로 마감연장 요청이메일을 보내기도 하여 미안한 마음 감출 길 없었으나, 그것조차 기분 좋은 스트레스였다.
지금까지 책을 읽고 그냥 덮어둬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었는지 기억이 희미한 경우가 많았는데, 적어도 6개월 동안 읽은 12권의 책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들춰보고 내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누가 이렇게 책임을 넘겨줘야 더 책임감을 느끼는 게으른 사람이니까.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은 어디 보자... 목록을 쭉 훑어보니 김인숙 작가의 [미칠 수 있겠니]인 것 같다. 솔직히 굉장히 기발하다거나 뒤통수를 탁 치는 크나큰 반전이 있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잔잔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책이었다. 분명히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가슴아픈 사고와 그 사고가 일어난 곳을 배경으로 해서 더 몰입하게 됐던 것 같고, 당시 나의 마음상태나 장마철이라는 날씨도 [미칠 수 있겠니]를 절절하게 받아들이는 데 한 몫 했던 것 같다. 마치 생생한 영화를 보듯이 애써 '이건 소설에 불과해'라고 자꾸 스스로 되뇌어도 마음이 아파 죽겠는 걸 어쩔 수 없는 그런 책이었다.
김인숙 작가의 책은 처음으로 읽어본 거였는데,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9기 신간평가단으로 내가 읽은 책은 총 12권이다. 내가 읽은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미치오 슈스케의 [달과 게], 정유정의 [7년의 밤], 조지 오웰의 [숨 쉬러 나가다], 페넬로피 라이블리의 [문타이거], 김인숙의 [미칠 수 있겠니], 최인호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발 맥더미드의 [인어의 노래], 루이즈 페니의 [스틸라이프], 구병모의 [고의는 아니지만], 짐 퍼커스의 [천 명의 백인신부], 알베르토 망구엘의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 그리고 존 어빙의 [네번째 손]이다. (아, 나는 얼마나 복 많은 사람인가)
이 중 아무리 내 맘대로라지만 좋은 책 베스트 5를 꼽자니 좀 미안하고 그렇다. 그래도 꼽는다.
가장 좋았던 책은 구병모의 [고의는 아니지만]이었다. 구병모 역시 처음 읽는 작가였는데, (그러고 보면 나의 독서편식 때문인가, 12권 중 조지 오웰을 빼고는 모두 책을 처음 읽어보는 작가들이었다) 이상하게 나는 문학상 수상으로 떠들썩하게 데뷔한 젊은 작가들의 책은 선뜻 읽어보게 되지 않는다. 못된 심보지만. 그래서 궁금은 하였으나 한 번도 읽어보지는 않고 있다가 [고의는 아니지만]을 통해서 구병모를 만났다.
그녀는 기발하면서도 차분하고, 냉정하면서도 따뜻하고, 암튼 굉장히 재능이 있으면서도 단지 소설을 자기 재능을 드러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줬다. 각 단편들마다의 발상과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 그리고 제목들, 하다못해 표지까지도 가장 좋았다.
두 번째는, 조지 오웰의 [숨 쉬러 나가다]. 이건 뭐 ‘역시’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 ‘역시’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통찰력과 문장력과 인물 묘사였다.
세 번째는, 김인숙의 [미칠 수 있겠니]인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으로 꼽아놓고는 세 번째에 두자니 좀 머쓱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순위에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작가들은 정작 보지 않겠지만;) 밝혀두고 싶다.
네 번째로는, 마지막에 읽은 존 어빙의 [네번째 손]인데,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흐름과 패트릭 월링퍼드라는 인물의 변화, 미스테리하고도 매력적이고도 약간은 무서운 여인 클로센 부인의 매력, 그리고 존 어빙의 유머감각이 어우러진 멋진 작품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가장 처음 읽은 미치오 슈스케의 [달과 게]를 꼽고 싶다. 순진해서 위험한 ‘어림’의 감정을 너무 잘 썼다. 애들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책을 덮은 후에도 마음이 쓰이고 걱정되게 하는 아련하고도 짠한 유년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책을 쓴 작가들, 출판해준 출판사들, 그리고 신간평가단에 나를 끼워준 알라딘,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