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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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에겐 꼭 사랑한다고 말해야 해. 정말 오랜만의 단편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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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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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세상은 변하지 않는구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 대한 한줄평은 이렇습니다. 세상은 어쩜 이다지도 변하지 않을까요. 사람은 어쩜 여기나 저기나 한결 같을까요.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은', '영국인들은', '미국인들은', '서양인들은'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특정 국민이나 특정 인종의 성향을 설명하는 말들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라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대체로 봤을 때 맞는 듯해 보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억나는 예로는, 일본 대지진 기간 동안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일본인의 모습은 과연 '일본인들의 국민성'이라고 할만큼 한 집단으로서의 공통점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과연 침착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의를 지키는구나'라는 감탄도 가능했습니다. 물론, 모든 일본인들이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 두 말 할 필요도 없겠지요. 다만, 온전히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행동할 때와 한 집단의 일부로서일 때는 확실히 다를 것 같습니다. 개개인으로 보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는 것은 어느 문화권, 어느 사회에서나 같지만, 특정 장소에서 특정 사건을 겪을 때 함께 드러내는 성향에는 차이가 있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4년 2월 말경 독일에서의 약 5일 정도의 시간 동안의 사건을 그린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2003년 10월 말경 한국에서 읽으면서는 그 시간이나 거리의 간극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30년 전에는 이랬구나, 독일 사람들은 그렇구나 하는 차이를 전혀 느낄 수가 없습니다.

 

거리의 분위기나 사람들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많이 등장했다면, 그래도 70년대 독일의 모습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었겠지만, 이 작품은 철저히 '사람'과 '사건'에 주목했고 사람과 사건만 보아서는 이것이 신문(언론)이 등장한 이후 그 어떤 시기, 그 어떤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을 겁니다.

 

책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평범하나 매력이 넘치는 젊은 여자가 우연히 위험한 남자와 잘못 얽히면 그 인생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가' 입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고요.

 

저라도, 포털에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오른다면, 기사를 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오만가지 추측을 해볼 것 같습니다. 매력적이나 도도한 젊은 여성이 은행강도 혹은 테러리스트로 지목받아 쫓기는 자와 하룻밤 만에 깊은 사랑에 빠져 남자를 도피시킨 후 그에 대해 말하기를 함구한다면, 누구나 처음에는 이런 저런 의심을 가져보겠지요. 원래 알고 있었던 사이이고 모든 것이 다 계획돼 있었던 것 아닐까, 그 매력적인 여자는 평범한 가정부를 가장한 스파이나 같은 범죄자, 혹은 테러리스트가 아닐까.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 '짜이퉁'과 같은 한 국가의 최대 독자를 가진 언론매체는 그 이야기를 다룰 때 조심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문을 하는 경찰이나 검사는 철저히 가정이나 편견을 배제한 채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둘 중 하나도, 현실에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 하나의 이야기는 기자에 의해서, 그리고 독자에 의해서 놀라운 속도로 번식하고, 번식된 이야기는 진실한 증언을 왜곡합니다. 그때부터는 당사자의 입도 떠나고, 기자의 펜도 떠나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독립하는 겁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우리 속담은 그래서, 맞는 경우도 많지만 굉장히 위험합니다. '맞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위험 요소입니다. '모두 옳다'가 아니라 '맞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닌 경우'보다는 높았던 확률 쪽에 자기도 모르게 기대게 되니까요.

 

카타리나 블룸이 결국 자신의 명예를 망치고, 가족을 망치고, 사랑을 망치고, 삶을 망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세운 기자를 죽이고 마는 것(이것은 스포일러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나오니까요)을 옳다고 두둔할 수는 없습니다.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일차적인 원인이 피살자에게 없다고는 말을 못하겠네요. 카타리나 블룸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짜이퉁의 기자가 그러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겁니다.

 

노벨상 수상자로 알려진 하인리히 뵐은 197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1974년 출판됐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지금 와서 보면 오히려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전형적인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지만 이 사건을 바라보고 서술하는 방식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전혀 흥분하거나 격노하지 않은 채 차분히, 그러나 냉담하게, 객관적인 시선에서 사건과 인물과 분위기와 대화를 논평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 완전히 객관적이지는 않아서 독자라면 누구나 황색적인 언론을 비판하고 비아냥대는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초반 카타리나 블룸의 심문 과정에서 그녀가 검사들과 언어의 적확성에 대해 확인하고 요구하는 과정들은 굉장히 섬세합니다. 그녀가 지적하고 정정을 요구하고 다시 말하는 지점들에서 나타나는 차이들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별 것 아닌 것 같은 차이가 실제로 사건을 읽는 데, 다른 사람들에게 사건을 전달하고, 그 심문 과정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읽으면서 과연 하인리히 뵐만의 섬세함과 통찰력을 읽을 수 있고, 이것은 카타리나 블룸의 예민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한 자연인의 우수함으로도 읽을 수 있어 재미가 있습니다.

 

만약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줄거리가 다였다면 그저 그런 작품으로 묻히고 말았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렇고 그런 일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기저기에서 허다하고, 남의 억울함이란 곧 잊고 마니까요. 그런데 이 작품에는 작가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나 각 인물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더해져있습니다. 그것이 사건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들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꽤 많은 등장인물도 각자가 모두 살아 있게 만듭니다. 대단한 작품입니다.

 

쓰고 보니, 카타리나 블룸의 운명은 최근 읽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괴] 속 다카시와도 굉장히 일맥상통합니다. 그것 봐요. 1974년의 독일이나 2010년대의 일본이나, 다 비슷비슷하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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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의 두번째 장편소설. 2005년 등단한 이후 지난 팔 년간 두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장편소설을 세상에 내보낸 황정은. 적합한 수식어를 찾기 어려워 그저 '황정은풍'이라고만 이야기될 수 있을 뿐인, 그 누구보다도 개성적인 소설세계를 구축해온 그다.

 

황정은은 [백의 그림자]를 읽은 이후 가장 좋아하게 된 한국작가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는 '황정은이니까'입니다. 더구나 [백의 그림자] 이후 첫 장편이라서 더욱 궁금합니다. 이 책을 추천작 첫번째로 고르면서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빨리 사서 읽고 싶은데, 이 책이 선정되더라도 투표하고 선정하고 책이 오기까지의 기다림이 너무 길지는 않을까. 어쨌든 이렇게 추천하고 선정작이 되길 기다리게 될텐데, 혹시 선정되지 않는다면 그냥 바로 사 볼 걸 하고 후회하게 될 것 같습니다.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3인류 1, 2]
베르나르 베르베르 특유의 상상력으로 축조한 장대한 스케일의 과학 소설. 작품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첫머리에서 소설의 시간적 무대를 "당신이 이 소설책을 펴서 읽기 시작하는 순간으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의 오늘"이라는 상대적 시점으로 선언하고, 현 인류가 문명을 이룩한 첫 번째 인류가 아니라는 설정을 깔고 시작한다.


이상하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은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어보질 않았습니다.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건데, 중학생 때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다가 악몽을 꿨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집에는 개미가 굉장히 많아서 마침 책을 읽기 얼마 전 개미를 대량살상한 참이었습니다. 그 후 [개미]를 읽으면서 엄청난 악몽을 꿨고 더이상 책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마침 [개미]의 중심인물 에드몽 웰즈의 증손자들이 등장한다고 하니 이번에 그 트라우마를 없앨 좋은 기회는 아닐까 싶어졌습니다.

 

3. 앨리스 먼로 [디어 라이프]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앨리스 먼로의 최신작이자 그녀 작가 인생의 마지막 작품. 작가가 어린 시절을 회고한 표제작 '디어 라이프'를 포함해, 언니의 익사사고 이후 평생을 그 기억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동생을 그린 '자갈',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약혼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기차에서 뛰어내린 군인에 대한 이야기인 '기차' 등 총 14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찾아보니 작가는 지난해 이미 절필을 선언한 상태더군요. 그래서 이 작품은 아직 앨리스 먼로가 살아있음에도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작가의 작품을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은데, 그것이 가장 최근작부터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만의 서사의 힘, 그리고 제가 늘 관심 갖고 있는 우연을 그리는 방식이 궁금합니다.

 

4. 코맥 매카시 [카운슬러]
전미 도서상, 퓰리처 상 수상 작가, '국경 3부작'으로 미국 현대 문학의 대표 작가로 우뚝 선 코맥 매카시의 첫 번째 시나리오 작품. 피의 보복으로 점철된 멕시코 마약 전쟁의 한가운데, 사라진 2천만 달러어치 코카인을 놓고, 세상에 복수하려는 여자와 인생 역전을 노리는 남자가 운명을 건 한판 도박에 뛰어든다.

 

이것도 우연일까요. 방금 포스팅에서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를 읽으면서 했던 신기한 경험을 썼는데, 10월 출간된 신간들을 살펴보다 보니 그의 작품이 떡하니 있네요. 처음부터 시나리오 작품으로 쓰여졌다는 것은 좀 찝찝하지만 코맥 매카시니까 일단은 믿고 보려 합니다.

 

5. 에리카 종 [비행공포]
「타임」 선정 1970년대를 지배한 도서 TOP10, 전세계에서 2700만 부가 판매된 전설의 베스트셀러, 한국어판 출간 당시 음란성을 이유로 지형(紙型)이 소각되는 수모를 겪었고 그 후로도 <날으는 것이 두렵다> <침대 밑 사나이> <꿈의 회의로부터의 보고> 등 다양한 한국어(해적)판이 출간된 문제작.


궁금할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과연 1970년대와 지금 2010년대는 어느 정도의 간극이 있을까요. 출간 당시 그토록 화제가 되었던 이유가 고스란히 느껴지든, 40년이라는 시간이 그 차이를 줄여줬든간에 각자의 매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최초의 한국어판. 제가 읽어보고 싶습니다.

 

***

10월 출간된 소설 중에는 유독 흥미로워보이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너무 이름 위주로 고른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또 실제로는 어떤 작품들이 선정될지 기쁘게 기다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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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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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제3인류 1~2 세트 - 전2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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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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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러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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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말에는 회사친구와 도쿄에 다녀왔습니다(사람들은 '회사'에서도 '친구'를 사귈 수 있냐고 의아해하지만 이렇게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행운이기도 하고요). 직장에서 매년 매우매우 바쁜 시기인 5월-7월을 앞두고 일본 저가항공사에서 프로모션 하는 것을 보고는 새벽에 다짜고짜 무려 반 년 뒤인 시월 비행기표를 예약해버렸습니다. 워낙 저렴해서 환불도 변경도 안 되는 티켓이었습니다. 임의로 정한 세 개의 날짜는 이제 빼도박도 못하는 미래가 돼버렸고 저는 이것을 즐겼습니다. 어떤 외부의 핑계도, 또 내부의 사정도 웬만하면 이를 바꾸진 못할 테니까요.

 

오사카는 두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2년 반 전 늘 함께 다니던 대학 친구들과도 삼일을 머물며 무려 오사카, 고베, 교토, 나라를 여행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사카에 머물며 주로 교토를 조금 여유롭게 여행하기로 했습니다. '낮엔 교토, 밤엔 오사카'가 이번 여행의 테마였달까요.

 

하지만 여행이라는 게 늘 그렇듯 생각한대로 되지 않더군요. 전 여행 전에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는 편이 아닌데, 지난 여행에서는 함께 간 친구 하나가 워낙 준비를 많이 해서 크게 어려움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의 동행은 저처럼 미리 계획 세우지 않는 편이었고 저희 둘은 첫 날부터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간사이 스루 패스 3일권' 대신 '간사이 에어리어 패스 3일권'를 사고만 것이지요. 티켓을 파는 곳에는 스루 패스 대신 에어리어 패스 광고만 크게 실려 있었고 미리 알아본 스루 패스의 가격과 같았습니다. 별 의심 없이 결제하고 오사카로 가 호텔에 짐을 풀기까지는, 워낙 복잡한 일본의 지하철 시스템과 웬만하면 모국어만 쓰는 일본인들 때문에 조금 헤매긴 했으나 그럭저럭 순탄했습니다.

 

하지만 교토로 가는 전철을 타려다 저희는 저지를 당했습니다. 저희가 산 패스는 오직 JR만 자유롭게 탈 수 있는 패스였던 겁니다. JR은 우리나라의 국철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는 수 없이 고민 끝에 저희는 일정을 변경했고 첫 날 오사카를 둘러본 후 이튿날과 마지막날을 모두 교토에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음 날 교토로 가기 위해 JR남바역에서 JR텐노지역으로 간 후 다시 JR오사카역으로 향했습니다. JR오사카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러 JR 노선 중에서도 서울의 2호선과 비슷한 순환선인 오사카 루프 라인을 타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희한한 것은, 그 원형의 라인 안에 든 여러 역 중에서도, 저희가 내려야 할 JR오사카역의 안내 방송만 듣지 못한 채 한 바퀴를 더 돈 것입니다. 다시 한 바퀴를 더 돌아 JR오사카역에 도착하면서도 저희는 오사카역을 지나쳤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JR오사카역이라는 안내방송이 수도 없이 나왔고, 다른 역보다 규모도 컸으며, 그래서 정차하는 시간도 길었는데, 졸지 않고 방송에 집중한 저희 두 사람 모두가 도착 안내 방송을 전혀 못 듣다니요. 그것은 JR의 저주가 분명했습니다.

 

이것은 저희가 이후 겪게 될 사건사고의 서막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제가 이렇게 여기에 관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바로 위의 첫 번째 사진에 있습니다. 24일 목요일 한국으로 돌아와 25일 금요일 출근을 하니, 신간 평가단 선정작인 [결괴 1, 2]권과 [천국에서]가 도착해있더군요. 둘 중 무엇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다 [결괴 1]권을 들고 퇴근했습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한 이 책에서 'JR 오사카 역'이 등장한 겁니다.

 

도모야가 악마를 만나러 가기 위해 내린 곳이 JR 오사카 역이었고, 이후 절단된 채 유기된 사체가 발견되는 곳은 교토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곳의 풍경과 분위기, 작가의 장소에 대한 묘사가 더욱 생생하게 와닿았습니다. 마침 오사카에 다녀온 바로 다음 날, 히라시노 게이고의 [결괴]를 읽게 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뭐 이런 생각을 떠나서 이런 우연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은 과연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했습니다. 주말 동안 읽을 요량으로 1권밖에 들고 오지 않은 저를 원망해야 했죠. 2권은 1권보다 더욱 사건의 전개에 집중하고 있어 더욱 책을 놓지 못하고 빨리 읽어내려갔습니다. 일본의 전철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얼굴들, 관광지에서 만났던 아이들의 모습들을 떠올려보며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습니다. 마주하는 얼굴을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봐도 알 수 없을 심연. 그것이 꼭 일본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설명은 아니겠지만 일본에서 짧은 3일을 보낸 직후라 그런지 이상하게 더욱 두려운 마음이, 더욱 가깝게 들었습니다.

 

[결괴 1, 2]를 읽고 나서 신간 평가단의 두 번째 책인 김사과의 [천국에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또 이 곳에서 저에게 유의미한 우연의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라이언 맥긴리'의 서울 전시에 친구와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 기다리고 있는 저에게 책 속에 담긴 그 여섯 글자는 그냥 단순한 우연 이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의미나 연관성이나 혹은 계시(?) 같은 것을 찾아낸 것은 아닙니다.

 

마침 오사카나 교토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결괴]라는 책을 읽은 사람보다는 라이언 맥긴리의 전시를 기다리며 김사과의 신작 [천국에서]를 읽게 된 사람은 더욱 많겠지요. 그런데 연달아 이런 경험을 하고 보니, 뭔가 무언가를 찾고 싶어지는 겁니다. 이건 뭘까. 이렇게 책 속에서 내 일상의 특정 단어들이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솔직히 말하면 그냥 우연일 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이런 경험은 처음이 아닙니다. 페이스북이나 다른 어떤 곳에 쓰고 지금은 잘 찾을 수 없지만, 라디오헤드의 수많은 곡들 중에 어떤 특정곡을 듣고 있는데 마침 읽고 있는 책에서 그 노래가 언급된다던지 하는 듣고 있던 음악과 읽고 있던 책이 연결되는 경험은 한 번이 아니었고요. 아직도 놀랍게 기억하고 있는 일은 코맥 맥카시의 [더 로드]를 읽을 때였습니다.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을 때 옆에서 주무시던 엄마가 악몽을 꿔 흐느끼시는 걸 깨운 적이 있습니다. 물어보니 엄마는 제가 읽고 있던 [더 로드] 마지막 장면의 어떤 장면과 똑같은 꿈을 꿨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과연 이 우연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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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읽은 책과 읽는 책이 또 다시 연결되고
    from hey! karma 2013-11-22 16:57 
    제가 자주 사용하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중 하나는 'iReadItNow'입니다. 읽은 책과 좋아하는 구절,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아서 스마트폰 사용 후부터는 꾸준히 이곳에 저의 책읽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웹과 싱크를 해두지 않은 상태로 중간에 핸드폰 업데이트를 한 번 하는 바람에 초기 데이터를 싹 날린 적이 있지만, 이제는 싱크를 해둬서 만에 하나 핸드폰을 잃어버려도 데이터는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언젠가부터 '반드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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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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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주정이 심한 사람은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여주면 고치거나 술을 끊게 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술에 취했을 때 내가 어땠는지 스스로 어렴풋이 기억하거나 동석했던 다른 사람의 증언을 통해 듣는 것과 그것을 직접 보는 것은 아마 천지차이일 겁니다. 녹음된 내 목소리를 처음 들을 때의 놀라움과도 아마 비교가 불가능하겠지요.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있다거나,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다는 인지를 통해서 나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은 그것을 아무리 성실하게 한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나를 관찰하는 것 또한 나의 의식이 나를 벗어나서 나를 관찰한다는 생각, 그 관찰이 남들의 관점과 비슷할 거라는 착각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 거라는 부정확한 짐작까지 개입합니다. 또 자신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이미 스스로가 그간 해온 생각이나 행동, 자신에 대해 스스로 판단해온 것들이 어쩔 수 없이 전제돼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남들이 나에 대해 대체로 생각하는 바와는 일치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거기다 술을 마셔서 의식을 흩트리고, 주정까지 부리는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기란 더욱 불가능합니다. 멀쩡한 정신일 때도 인간이란 누구나 혐오스러운 면을 갖고 있는 법인데 그것이 술을 마시고 부리는 주정이라면 아마 그 혐오감, 무엇보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참아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김사과의 [천국에서]를 읽고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은 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케이와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대화나 묘사를 보면서 그 속에서 나 자신의 어떤 모습, 그 중에서도 혐오스러운 여러 면을 한꺼번에 많이 마주하게 됐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을 마구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수 없으니 불편했습니다. 그들과 다른 나만의 어떤 면을 필사적으로 찾아보기도 했습니다만 피곤할 뿐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배경과 상황을 제외하면 나는 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사과 작가의 이번 소설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마약을 하거나 술을 잔뜩 마신 상태에서 나누는 전혀 문학적이지 않은 대화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우리가 평소에 하는 대화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걸 또박또박 적힌 글자로 보자니 그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를 수가 없는데, 나 역시도 그렇겠구나 생각하면 씁쓸해집니다.

 

홍상수 영화 속의 그런 장면들을 극장에서 보면 저는 ‘하하하’ 하고 굉장히 많이 웃습니다. 웃는 지점이 남들과 어긋날 때가 많아 대체로 관객이 많지 않은 조용한 극장에서 제 웃음소리만 민망하게 울릴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김사과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를 읽으면서는 피식 웃긴 했어도 ‘하하하’ 하고 웃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똑같이 우스꽝스러운데, 왜지? 생각해봤더니 극장에서의 저의 웃는 행위 역시 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고 착각하는 와중에 극장 안에 있는 다른 관객들을 의식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드는 겁니다(이봐요, 여기에서조차 저는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고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드는 겁니다’라는 어중간한 문장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장면에서 확실히 웃어줌으로써 나는 너무 평범하고 솔직해서 천박한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내비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나’는 술은 취하지 않았으니 자신 있게 웃었겠지만, 실제로 제 안에는 그런 허영이 있습니다.

 

대화를 보여줄 뿐 생각은 들려줄 수 없는 영화와 달리 소설은 그 대화를 보여주기 전후의 상황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 때문에 대화의 어떤 부분이 우습다 해도 실제로 소리 내어 웃기는 힘들다는 장르적인 차이도 물론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케이가 뉴욕에서 써머와 댄과 함께 지내는 1부, 한국에 돌아와서 주로 홍대 인근에서 재현과 연애하는 2부, 인천 사는 지원과 연애하고 이별하는 3부, 이 모든 것을 정리하는 짧은 4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김사과의 작품은 [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단편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밖에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김사과의 작풍에 대해서는 짐작하는 바가 있습니다. 워낙 ‘문제적 작가’라는 평가와 함께 그녀의 작품 경향을 논하는 글을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단편 한 편을 읽어본 저도 [천국에서]는 그간의 김사과 작품과 많이 다르(겠)다고 봤습니다.

 

달라진 김사과의 이번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논평이 많이 등장합니다.

 

여행자가 된 도시에서는 사람들도 여행자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여행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상을 일련의 풍경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풍경이 된 세상은 아름답다. 거리에 가득 찬 쓰레기에서 고급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인까지, 여행자의 시선 속에서 세상은 공평하게 아름답다. p.92

 

감수성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되었고, p.94

 

갈수록 세련되어지는 도시의 풍경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시한폭탄이 장착된 극장에서 상연되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화려한 영화와 같았다. 끔찍한 결말이 다가오고 있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화려한 이야기에 매혹되어 있었다. p.126

 

세계화되고 자본주의에 완전히 잠식당한 세계와 그 안에서 별다른 반성이나 상황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 없이 길들여진 개인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각 자체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신랄해서 아픕니다. 저 역시 그런 여행자 중 한 명이고, 거대한 시장이 돼버린 ‘감수성’의 충실한 소비자이며, 세련되어지고 있는 도시의 풍경이 내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가끔은 내 것이라거나 내 것이 될 거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세상이 그렇고 그 속을 사는 사람들도 다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래도 나는 아냐’라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면 아마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 뻔뻔함, 무조건 크고 새로운 것을 칭송하는 태도는 케이 윗세대 한국인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케이는 그런 특징이 자신의 세대에서는 제발 멸종하기를 바랐다. 물론 그것은 심오한 통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그저 눈앞에 펼쳐진 촌스러운 광경이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윗세대도 정확히 그녀와 같은 이유에서 이 도시를 깨부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지 그들은 크고 눈에 띄는 변화를 선호하고 케이는 소박하지만 섬세한 변화를 선호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p.103

 

작가가 내세운 주인공 케이 역시 작가가 비판하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허영과 자기기만으로 가득 찬,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보통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 짓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이십대 초반의 여대생입니다.

 

‘허세 작렬’하는 사람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허세들은 대체로 자신이 타인 앞에 내세워져 있을 때 유독 작렬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의 작렬하는 허세에도 쉽게 넘어 갑니다. 그것이 허세인지 아닌지 쉽사리 구별하지 못할뿐더러, 그것을 알아챈다 해도 적지 않은 타인들이 그러한 허세의 근거들에 쉽게 매혹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적당히 그 허세에 묻어갈 수 있다면 적당히 모른척하고 그것을 긍정합니다.

 

J는 케이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홍대를 졸업하고 한예종에서 미디어 아트를 전공하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 영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어딘가 영국풍으로 세련되고 우수에 차 보이는 것이 근사하다고 일 년 전 처음 그를 봤을 때 케이는 생각했다. p.104

 

하지만 혼자 있을 때 굳이 ‘허세 작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 자신에게는 굳이 나를 포장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케이는 그러합니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자신을 포장합니다.

 

그저 한 가지, 인천에서 지냈던 시간만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니, 가능하면 없던 시기로 만들고 싶었다. 어차피 나쁜 꿈에 불과했지 않은가? 케이는 그 시간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고 믿었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멋져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펑크, 아나키즘, 아방가르드, 공산주의, 혁명, 마약, 히피, 섹스...... 물론 철저히 개념적인 차원에서였다. 서구의 청소년들과 달리 그 개념들을 실제로 현실에 적용해볼 자유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개인에게 허용된 유일한 표현 방식인 패션을 통해 케이는 그것들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p.142

 

[천국에서]는 이렇게 실제 천국은 등장하지 않고, ‘얼핏 천국으로 보이는 것’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장소로서의 천국’만 등장합니다. 진짜로 좋은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고 ‘겉으론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쁜 것’만 잔뜩 나옵니다. 그래서 작가가 만약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비관적인 관점 속에 집어넣고, 주인공만은 다르다는 식으로 자기만 혼자 쏙 빠져나왔다면 독자로서의 저는 ‘뭐야? 혼자 잘났어?’ 하며 작가에게 반감을 품는 것으로 책을 덮었겠지만, 주인공 케이가 작가가 비판하고자 하는 모든 상황과 사고방식의 정수이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자기반성을 하게 됩니다.

 

영국풍이니, 홍대풍이니, 중산층이니, 잠실 친구들이니 하는 구체적인 용어들은 이렇게 텍스트로 읽으면 반감이 생기지만, 이 중 어떤 것은 실제로 제가 동경했고 아직도 동경하고 있는 것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때 제가 편입되고 싶었던 세상이었고, 지금도 만약 그럴 기회가 생긴다면 거부하지 않고 들어갈 그런 세계.

 

만약, 그런 세계로 편입된다면 저는 앞으로 이런 텍스트들을 외면하게 될까요, 아니면 여전히 읽으면서 그래도 나는 아직 예민하게 자기반성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허세를 부릴까요.

 

그는 그렇게 한바탕 자신과 광주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은 뒤 공연장을 구경시켜주었다. 생각 외로 인테리어도 세련되었으며 싸운드 시스템도 훌륭했다. 하지만 뭐가 불안한지 그는 거듭 괜찮지요? 나쁘지 않지요? 서울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지요? 하고 물어댔고 그러면 케이의 일행은 반복해서 같은 칭찬을 늘어놓았다. 박씨는 이 생각 없는 젊은이들이 단지 서울에서 왔다는 이유로, 마치 서울에서 보낸 사절단이라도 되는 양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사실 진짜 멋을 아는 것은 광주 시민이고 서울은 잡탕 같은 도시라면서 폄하하기를 반복했다. p.164

 

또 김사과의 확언대로 그 세계는 원래부터 그 세계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면 절대 갈 수 없는 곳이라면, 저는 공연장 주인처럼 내가 속한 현재를 과도하게 긍정하면서도 여전히 그 도달할 수 없는 그 세계를 동경하게 될까요.

 

그럴 때마다 케이는 커다란 수족관을 떠올렸다. 수족관 속에서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 한 마리. 투명한 유리 너머로 내다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물고기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글쎄, 아무 생각도 없겠지. 하지만 생각을 한다면? 이해가 안 되겠지. 어, 나랑 같겠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해서 한번 생각을 시작한 물고기가 그걸 멈출 수가 있을까? p.331

 

[천국에서]를 읽으면 계속해서 책 읽기를 멈추고 ‘나’는 어떠한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은 대체로 확언보다는 질문의 형태로 발현됩니다. 괴롭습니다. 그런데 김사과는 또 한 번 좌절을 안겨줍니다. ‘한번 생각을 시작한 물고기가 그걸 멈출 수가 있을까?’라고 말하면서요.

 

그런 점에서 결말 부분은 의외였습니다. 케이가 수족관은 없다고 결론 내리며 그 까페에서 갑자기 일어나 가는 그곳이 어디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짐작 가는 대로라면 그건 또 좀 너무 갑작스럽달까요.

 

소설 속에서 원래 ‘인물’은 변하게 되어 있지만, 그러한 변화가 충분히 설득력 있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차라리 분노로 들끓는 주인공이 주변인이나 전혀 관계없는 타인을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죽이는 전작들이 오히려 더 그럴만해 보입니다. 그런 폭력적인 결말이 좋다는 게 아니라, 인물의 드라마틱한 행동이나 변화는 그만큼 충분한 계산을 가지고 그려내야 독자들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소설 전반에서 케이가 끊임없이 고뇌하고 있긴 하지만 그 고뇌의 내용 중에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를 짐작케 하는 실마리는 충분하지 않았다고 느껴집니다.

 

작가는 소설 전체에서 케이나 써머, 댄, 케이의 부모님, 써머의 부모님, 댄의 부모님, 재현, 지원과 지은과 그들의 아버지 등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간략하게 그들의 성장배경이나 살아온 환경 등을 꼭 서술하고 넘어갔습니다. 마치 브리핑처럼 간략하게. 그렇다보니 IMF라든지, 미국발 금융위기 같은 세계사적인 사건이나 뉴욕, 브룩클린, 잠실, 홍대, 상수동, 인천 남동공단, 광주와 같은, 각각만 가지고도 최소한 한 권의 책 분량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거대한 이슈들이 몇 줄의 문장만으로 간단히 처리됩니다. 인물들도 굉장히 단순화되죠. 어떤 특정한 세대나 상황을 표상하는 인물로 각인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그런 사람’으로 ‘그런 환경’ 속에 남겨놓고 케이만 막판에 싹 빠져나오는 듯한 결말은, 그래서 더 쉽게 납득이 가지 않고 배신감마저 느끼게 합니다.

 

더불어 [천국에서]를 읽으면서, 김사과가 젊은 작가이기 때문에 이토록 복잡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그토록 확고한 문장으로 쓸 수 있기도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직접 경험하지 않았거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다 경험했고 다 아는 것처럼 확언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소위 ‘논술’이라는 것이 시험과목에 있는 직종에 취업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반은 억지로 신문을 읽고 관련 책을 찾아 읽은 시기가 있습니다. 마침 그때가 미국발 금융위기가 닥친 무렵이라 시험 문제로 많이 등장했죠. 물론 제가 아는 선에서 쓰기를 요구한 문제이긴 하지만 저만의 시각이 들어있어야만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개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논평까지 써야 했습니다. 그 논평이 우스꽝스럽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사실과 진실을 알고자 이것저것 읽고 공부했지만, 그 모든 것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큰 그림을 익히고 큰 줄기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는데, 김사과의 소설 속 논평 중에도 어떤 것들은 이런 방식을 통해 파악하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 안다고 해서 소설 안에 구구절절 다 쓸 수 없었겠지만, 확실히 본인의 관점을 갖고 설명한 부분과 두루뭉술한 문장으로 넘어간 부분의 차이는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앞에서 이미 인용한 문장에서 케이가 그런 것처럼 ‘물론 그것은 심오한 통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고 쿨하게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역시 케이와 멀지 않은 세대이며 케이가 속한 어떤 집단과는 분명한 교집합을 갖고 있을 테니까요.

 

김사과가 2013년에 쓴, '모든 게 망가졌는 데 아무것도 무너져내리지 않는 세계'는 결국 이성복 시인이 1978~9년께 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그 세계와 다르지 않아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결국 모두 병들고 모든 게 망가져도 어떻게든 유지되는 곳인가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자체로 거대한 보균자이지만 결국 발병은 하지 않는, 발병은 해도 결코 죽지는 않는 거대한 질병덩어리인가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죠.

 

작가로서의 김사과가 독자로서의 저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그 질문들은 애초에 던진 사람조차 영원히 정답을 발견할 수 없는 난제들입니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질문을 잊지 않고 정답은 아니라도 자신만의 해답을 정리해나가느냐, 그냥 모른척하고 사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적어도 소설가는 살다 보니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자꾸 질문을 잊는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그리고 자기만의 이야기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앞에서 말한 이번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김사과의 다음 질문을 기다립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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