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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참 세상은 변하지 않는구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 대한 한줄평은 이렇습니다. 세상은 어쩜 이다지도 변하지 않을까요. 사람은 어쩜 여기나 저기나 한결 같을까요.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은', '영국인들은', '미국인들은', '서양인들은'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특정 국민이나 특정 인종의 성향을 설명하는 말들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라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대체로 봤을 때 맞는 듯해 보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억나는 예로는, 일본 대지진 기간 동안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일본인의 모습은 과연 '일본인들의 국민성'이라고 할만큼 한 집단으로서의 공통점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과연 침착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의를 지키는구나'라는 감탄도 가능했습니다. 물론, 모든 일본인들이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 두 말 할 필요도 없겠지요. 다만, 온전히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행동할 때와 한 집단의 일부로서일 때는 확실히 다를 것 같습니다. 개개인으로 보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는 것은 어느 문화권, 어느 사회에서나 같지만, 특정 장소에서 특정 사건을 겪을 때 함께 드러내는 성향에는 차이가 있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4년 2월 말경 독일에서의 약 5일 정도의 시간 동안의 사건을 그린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2003년 10월 말경 한국에서 읽으면서는 그 시간이나 거리의 간극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30년 전에는 이랬구나, 독일 사람들은 그렇구나 하는 차이를 전혀 느낄 수가 없습니다.
거리의 분위기나 사람들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많이 등장했다면, 그래도 70년대 독일의 모습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었겠지만, 이 작품은 철저히 '사람'과 '사건'에 주목했고 사람과 사건만 보아서는 이것이 신문(언론)이 등장한 이후 그 어떤 시기, 그 어떤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을 겁니다.
책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평범하나 매력이 넘치는 젊은 여자가 우연히 위험한 남자와 잘못 얽히면 그 인생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가' 입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고요.
저라도, 포털에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오른다면, 기사를 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오만가지 추측을 해볼 것 같습니다. 매력적이나 도도한 젊은 여성이 은행강도 혹은 테러리스트로 지목받아 쫓기는 자와 하룻밤 만에 깊은 사랑에 빠져 남자를 도피시킨 후 그에 대해 말하기를 함구한다면, 누구나 처음에는 이런 저런 의심을 가져보겠지요. 원래 알고 있었던 사이이고 모든 것이 다 계획돼 있었던 것 아닐까, 그 매력적인 여자는 평범한 가정부를 가장한 스파이나 같은 범죄자, 혹은 테러리스트가 아닐까.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 '짜이퉁'과 같은 한 국가의 최대 독자를 가진 언론매체는 그 이야기를 다룰 때 조심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문을 하는 경찰이나 검사는 철저히 가정이나 편견을 배제한 채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둘 중 하나도, 현실에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 하나의 이야기는 기자에 의해서, 그리고 독자에 의해서 놀라운 속도로 번식하고, 번식된 이야기는 진실한 증언을 왜곡합니다. 그때부터는 당사자의 입도 떠나고, 기자의 펜도 떠나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독립하는 겁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우리 속담은 그래서, 맞는 경우도 많지만 굉장히 위험합니다. '맞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위험 요소입니다. '모두 옳다'가 아니라 '맞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닌 경우'보다는 높았던 확률 쪽에 자기도 모르게 기대게 되니까요.
카타리나 블룸이 결국 자신의 명예를 망치고, 가족을 망치고, 사랑을 망치고, 삶을 망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세운 기자를 죽이고 마는 것(이것은 스포일러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나오니까요)을 옳다고 두둔할 수는 없습니다.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일차적인 원인이 피살자에게 없다고는 말을 못하겠네요. 카타리나 블룸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짜이퉁의 기자가 그러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겁니다.
노벨상 수상자로 알려진 하인리히 뵐은 197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1974년 출판됐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지금 와서 보면 오히려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전형적인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지만 이 사건을 바라보고 서술하는 방식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전혀 흥분하거나 격노하지 않은 채 차분히, 그러나 냉담하게, 객관적인 시선에서 사건과 인물과 분위기와 대화를 논평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 완전히 객관적이지는 않아서 독자라면 누구나 황색적인 언론을 비판하고 비아냥대는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초반 카타리나 블룸의 심문 과정에서 그녀가 검사들과 언어의 적확성에 대해 확인하고 요구하는 과정들은 굉장히 섬세합니다. 그녀가 지적하고 정정을 요구하고 다시 말하는 지점들에서 나타나는 차이들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별 것 아닌 것 같은 차이가 실제로 사건을 읽는 데, 다른 사람들에게 사건을 전달하고, 그 심문 과정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읽으면서 과연 하인리히 뵐만의 섬세함과 통찰력을 읽을 수 있고, 이것은 카타리나 블룸의 예민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한 자연인의 우수함으로도 읽을 수 있어 재미가 있습니다.
만약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줄거리가 다였다면 그저 그런 작품으로 묻히고 말았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렇고 그런 일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기저기에서 허다하고, 남의 억울함이란 곧 잊고 마니까요. 그런데 이 작품에는 작가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나 각 인물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더해져있습니다. 그것이 사건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들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꽤 많은 등장인물도 각자가 모두 살아 있게 만듭니다. 대단한 작품입니다.
쓰고 보니, 카타리나 블룸의 운명은 최근 읽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괴] 속 다카시와도 굉장히 일맥상통합니다. 그것 봐요. 1974년의 독일이나 2010년대의 일본이나, 다 비슷비슷하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