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말에는 회사친구와 도쿄에 다녀왔습니다(사람들은 '회사'에서도 '친구'를 사귈 수 있냐고 의아해하지만 이렇게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행운이기도 하고요). 직장에서 매년 매우매우 바쁜 시기인 5월-7월을 앞두고 일본 저가항공사에서 프로모션 하는 것을 보고는 새벽에 다짜고짜 무려 반 년 뒤인 시월 비행기표를 예약해버렸습니다. 워낙 저렴해서 환불도 변경도 안 되는 티켓이었습니다. 임의로 정한 세 개의 날짜는 이제 빼도박도 못하는 미래가 돼버렸고 저는 이것을 즐겼습니다. 어떤 외부의 핑계도, 또 내부의 사정도 웬만하면 이를 바꾸진 못할 테니까요.
오사카는 두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2년 반 전 늘 함께 다니던 대학 친구들과도 삼일을 머물며 무려 오사카, 고베, 교토, 나라를 여행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사카에 머물며 주로 교토를 조금 여유롭게 여행하기로 했습니다. '낮엔 교토, 밤엔 오사카'가 이번 여행의 테마였달까요.
하지만 여행이라는 게 늘 그렇듯 생각한대로 되지 않더군요. 전 여행 전에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는 편이 아닌데, 지난 여행에서는 함께 간 친구 하나가 워낙 준비를 많이 해서 크게 어려움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의 동행은 저처럼 미리 계획 세우지 않는 편이었고 저희 둘은 첫 날부터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간사이 스루 패스 3일권' 대신 '간사이 에어리어 패스 3일권'를 사고만 것이지요. 티켓을 파는 곳에는 스루 패스 대신 에어리어 패스 광고만 크게 실려 있었고 미리 알아본 스루 패스의 가격과 같았습니다. 별 의심 없이 결제하고 오사카로 가 호텔에 짐을 풀기까지는, 워낙 복잡한 일본의 지하철 시스템과 웬만하면 모국어만 쓰는 일본인들 때문에 조금 헤매긴 했으나 그럭저럭 순탄했습니다.
하지만 교토로 가는 전철을 타려다 저희는 저지를 당했습니다. 저희가 산 패스는 오직 JR만 자유롭게 탈 수 있는 패스였던 겁니다. JR은 우리나라의 국철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는 수 없이 고민 끝에 저희는 일정을 변경했고 첫 날 오사카를 둘러본 후 이튿날과 마지막날을 모두 교토에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음 날 교토로 가기 위해 JR남바역에서 JR텐노지역으로 간 후 다시 JR오사카역으로 향했습니다. JR오사카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러 JR 노선 중에서도 서울의 2호선과 비슷한 순환선인 오사카 루프 라인을 타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희한한 것은, 그 원형의 라인 안에 든 여러 역 중에서도, 저희가 내려야 할 JR오사카역의 안내 방송만 듣지 못한 채 한 바퀴를 더 돈 것입니다. 다시 한 바퀴를 더 돌아 JR오사카역에 도착하면서도 저희는 오사카역을 지나쳤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JR오사카역이라는 안내방송이 수도 없이 나왔고, 다른 역보다 규모도 컸으며, 그래서 정차하는 시간도 길었는데, 졸지 않고 방송에 집중한 저희 두 사람 모두가 도착 안내 방송을 전혀 못 듣다니요. 그것은 JR의 저주가 분명했습니다.
이것은 저희가 이후 겪게 될 사건사고의 서막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제가 이렇게 여기에 관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바로 위의 첫 번째 사진에 있습니다. 24일 목요일 한국으로 돌아와 25일 금요일 출근을 하니, 신간 평가단 선정작인 [결괴 1, 2]권과 [천국에서]가 도착해있더군요. 둘 중 무엇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다 [결괴 1]권을 들고 퇴근했습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한 이 책에서 'JR 오사카 역'이 등장한 겁니다.
도모야가 악마를 만나러 가기 위해 내린 곳이 JR 오사카 역이었고, 이후 절단된 채 유기된 사체가 발견되는 곳은 교토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곳의 풍경과 분위기, 작가의 장소에 대한 묘사가 더욱 생생하게 와닿았습니다. 마침 오사카에 다녀온 바로 다음 날, 히라시노 게이고의 [결괴]를 읽게 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뭐 이런 생각을 떠나서 이런 우연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은 과연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했습니다. 주말 동안 읽을 요량으로 1권밖에 들고 오지 않은 저를 원망해야 했죠. 2권은 1권보다 더욱 사건의 전개에 집중하고 있어 더욱 책을 놓지 못하고 빨리 읽어내려갔습니다. 일본의 전철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얼굴들, 관광지에서 만났던 아이들의 모습들을 떠올려보며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습니다. 마주하는 얼굴을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봐도 알 수 없을 심연. 그것이 꼭 일본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설명은 아니겠지만 일본에서 짧은 3일을 보낸 직후라 그런지 이상하게 더욱 두려운 마음이, 더욱 가깝게 들었습니다.
[결괴 1, 2]를 읽고 나서 신간 평가단의 두 번째 책인 김사과의 [천국에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또 이 곳에서 저에게 유의미한 우연의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라이언 맥긴리'의 서울 전시에 친구와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 기다리고 있는 저에게 책 속에 담긴 그 여섯 글자는 그냥 단순한 우연 이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의미나 연관성이나 혹은 계시(?) 같은 것을 찾아낸 것은 아닙니다.
마침 오사카나 교토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결괴]라는 책을 읽은 사람보다는 라이언 맥긴리의 전시를 기다리며 김사과의 신작 [천국에서]를 읽게 된 사람은 더욱 많겠지요. 그런데 연달아 이런 경험을 하고 보니, 뭔가 무언가를 찾고 싶어지는 겁니다. 이건 뭘까. 이렇게 책 속에서 내 일상의 특정 단어들이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솔직히 말하면 그냥 우연일 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이런 경험은 처음이 아닙니다. 페이스북이나 다른 어떤 곳에 쓰고 지금은 잘 찾을 수 없지만, 라디오헤드의 수많은 곡들 중에 어떤 특정곡을 듣고 있는데 마침 읽고 있는 책에서 그 노래가 언급된다던지 하는 듣고 있던 음악과 읽고 있던 책이 연결되는 경험은 한 번이 아니었고요. 아직도 놀랍게 기억하고 있는 일은 코맥 맥카시의 [더 로드]를 읽을 때였습니다.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을 때 옆에서 주무시던 엄마가 악몽을 꿔 흐느끼시는 걸 깨운 적이 있습니다. 물어보니 엄마는 제가 읽고 있던 [더 로드] 마지막 장면의 어떤 장면과 똑같은 꿈을 꿨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과연 이 우연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