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지난 달에 출간된 예술/대중문화 분야 새책 가운데 제가 읽어보고 싶은 책은 다음 4권입니다.

 

주크박스의 철학-히트곡엑스쿨투라 2
페테르 센디 (지은이), 고혜선, 윤철기 (옮긴이) | 문학동네 | 2012년 1월

오늘날 우리를 공기처럼 감싸고 있는 ‘히트곡(유행가)’에 관한 철학적, 미학적 시론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프랑스의 젊은 철학자 페테르 센디는 이 책에서 히트곡의 내재적인 성격에서 외재적인 효과까지, 우리가 흔히 접하는 히트곡Tube의 비밀을 들추어 보여준다.

 

유행가 가사를 보면 그 시대를 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70-80년대는 감시가 심하고 표현의 자유가 억눌려 있었긴 해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은유적이고 아름다운 가사가 많았죠. 이런 가요들을 듣고 자란 제가 (그렇게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들어도 요즘 노래 가사들은 아무 내용이 없고, 아무 의미도 없고, 오히려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은데 저보다 더 어르신들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이런 측면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좀 더 정돈되게 풀어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에 이 책을 골랐습니다.

 

인문예술잡지 F 2호 - 예술가의 스테이트먼트, 2011
나탈리 에니크, 유운성, 방혜진, 이상길, 주일우, 김수환, 정의진 (지은이) | 문지문화원사이 | 2012년 1월

인문예술잡지 F 2호 ‘예술가의 스테이트먼트’에서는 ‘러시아 미래주의 선언문’에서부터 1968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사이버네틱 세렌디피틱’ 전시 서문, 그 밖의 여러 자료들까지 다양한 예술가들의 스테이트먼트를 살펴보며, 그것이 어떤 정교한 (비)의도를 내장하고 있는지, 예술(가)과 스테이트먼트는 어떠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인문예술, 특히 대중예술을 논하기 위해 '잡지'만큼 좋은 포맷이 있을까 싶습니다. 빨리 빨리 흘러가는 문화의 흐름과 당대의 예술인들을 쉽고 재미있게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잡지이고, 말 그대로 잡다하고 다양한 내용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으니까요. 이번 호는 예술과 스테이트먼트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하니 더욱 궁급합니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개정판 
슈테판 볼만 (지은이), 조이한, 김정근 (옮긴이) |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2012년 1월

2006년 출간된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의 개정판.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성경을 든 성녀 마리아에서「율리시스」를 읽고 있는 메릴린 먼로까지 수많은 예술가를 사로잡은 책 읽는 여자들의 그림을 통해 독서의 역사를 추적한다. 번역을 맡은 조이한과 김정근이 독서와 여자에 대한 글을 직접 수록하여 더욱 흥미롭게 독서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그런가요?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한가요? 아직도 많은 나라들에선 여자가 영화를 찍거나, 축구를 하거나, 암튼 말도 안 되게 기존에 남자들만의 영역이라고 믿어왔던 분야에 진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실제로 학문이나 독서 역시 아주 오랜 과거에는 많은 문화권에서 오로지 남성 및 권력층에게만 허락되어 왔던 것이죠. 그래서 여성에 초점을 맞춘 독서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니 궁금해집니다. 이제는 더 이상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라는 명제가 큰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됐지만 그래도 위험해지고 싶네요. :)

 

왼쪽-오른쪽의 서양미술사
제임스 홀 (지은이), 김영선 (옮긴이) | 뿌리와이파리 | 2012년 1월

왼쪽과 오른쪽의 상징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세밀히 분석하고 그 상징이 서양 사회와 문화에 어떻게 스며들어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의 풍부하고도 미묘한 의미를 찾아내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벨라스케스, 피카소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남긴 명작들의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왼쪽과 오른쪽은 정말 단어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사회적인 맥락에 놓고 보면 논란이 많은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미술 속에서도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니 어찌 보고 싶지 않겠어요. 궁금합니다. 미술 속 왼쪽-오른쪽.


4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주크박스의 철학-히트곡
페테르 센디 지음, 고혜선.윤철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15,000원 → 14,250원(5%할인) / 마일리지 450원(3% 적립)
2012년 02월 08일에 저장
절판

인문예술잡지 F 2호- 예술가의 스테이트먼트, 2011
김수환 외 지음 / 문지문화원사이 / 2012년 1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2012년 02월 08일에 저장
절판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개정판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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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왼쪽-오른쪽의 서양미술사
제임스 홀 지음, 김영선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2년 1월
33,000원 → 29,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6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18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2년 02월 08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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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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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삿날 밤이면 어른들은 죽은 조상들이 들어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모든 문을 열어놓았다. 나는 늘 제삿날이 아닌 밤에는 그 사람들이 어디서 밥을 먹는지 궁금했다.-14 쪽

나 같은 아이들만 귀를 쫑긋 세우고 시에 귀를 기울였을 뿐, 다른 어른들은 대개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겪고 고통에 찬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다지 관심들이 없었다. 아마 할아버지 또래의 다른 남자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본다 하더라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34쪽

그것이 수많은 키스의 종류 중 프렌치키스라고 하는 것이며...... (중략) 나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46쪽

동지애는 여자들의 여성성을 무시하고 그들을 남성처럼 바라본다는 것을 뜻했다. 그렁 분위기 속에서 연애감정은 어느 정고 근친상간이나 동성애의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50쪽

말하자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술이 취해 불콰해진 얼굴로 여럿이 몰려가 창녀와 하룻밤 자는 일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었지만, 학생회 내부에서 연애하다가 생기는 성욕은 개인적인 것이었다.-53쪽

사랑은 그 모든 것이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까닭은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이었다.-68쪽

마치 네가 나를 만나러 올 때면 늘 그렇듯이, 번개처럼. 나를 만나러 올 때는 항상 그렇게 달려와, 알았지? 그때는 정말 사랑받는 느낌이거든.-99쪽

우리는 그 누구라도 그 어느 곳에서든 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죽음보다도 더 우연적인 것처럼 보였다.-121쪽

"너와 지낸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어."라고 쓰고 나면 더이상 쓸 말이 없었다.-132쪽

하지만 며칠 두고 보니 공연히 문상하러 왔다가 자기 일 때문에 우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133쪽

변호사는 대단히 건조한 목소리로 "그것 참 재미난 시구나. 그런 것도 시가 될 수 있느냐?"라고 논평했다. 그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었으므로, 사실 변호사는 아무런 의견도 밝히지 않은 셈이었다.-210쪽

문제는 그게 우연한 폭행이었다는 점이었어요. 폭력에 관한 한 제비뽑기를 하는 사회인 거죠.-329쪽

섭동에 대한 문장도 그때 외웠다. 별들의 집단 내에서 각 별들은 중심 주위를 돌게 되는데, 이런 운동을 일으키는 주된 힘은 집단 전체의 중력이다. 그러나 별들은 가까이 지나는 다른 별들로부터 계속 인력을 받는다. 이때 두 천체가 서로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충돌이라 하고, 진행경로를 바꾸면서 서로 비켜가는 경우를 조우라고 한다. 조우가 일어날 때는 섭동을 통해 서로간의 에너지의 주고받음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진행경로와 속도가 변하게 된다. 그게 바로 섭동이다. 천왕성의 경로가 불규칙한 까닭은 그 근처에 있는 다른 행성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353쪽

그때부터 나는 당혹스러운 일 앞에서 당혹스러워 하지 않는 자들을 불신하게 됐다.-362쪽

"아니, 체온에 관한 문제. 1927년에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발터 벤야민은 [모스크바]라는 글을 쓰는데, 거기 보면 베를린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없다는 것, 보도가 귀족적으로 넓고 귀족적으로 황량하다는 것이라고 적혀 있거든. 모스크바는 베를린보다는 훨씬 더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는데, 그건 혹독한 추위 때문이었지. 벤야민은 추위 때문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거든. 일기에 보면 나오지."
"벤야민도 사랑하는 사람이 모스크바에 있었나봐요."
"맞아, 아샤란 라트비아 여자가 있었어."-369쪽

"이런 세상에서 제게 필요한 것은 오직 커다랗고 하얗고 넓은 침대군요. 그렇군요."-372쪽

이제는 누구도 꽃을 꽂지 않는 꽃병-378쪽

"그렇게 하면 그게 내가 살아온 삶이 되는 걸까요?"
지금은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그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처음에는 어설프게, 그 다음에는 논리적으로.-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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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dmswn7796 2012-02-27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arma님 안녕하세요. 블로그에 올리신 글들 재미있게 때로는 생각에 잠겨 한참을 보았습니다. 알라딘 공모댓글 다신것 보고 저도 무척 좋아하는 문장이라 클릭해 들어와보았는데 이런 세계가 있어 즐거웠어요 ㅋㅋ 오늘 산울림극장가서 karma님 같다하는 분께 살며시 말이라도 걸어보려구요 ㅋㅋ

karma 2012-02-27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네, 안녕하세요 :)
어디에 공모댓글을 달았는지 기억이 희미하네요.
그리고 오늘 산울림극장에서는 저를 만날 수 없으시겠지만 언젠가 뵈어요-
 
저지대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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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참 예쁘지요. 책 속의 삶은 참 끔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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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시의 루브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오후 네 시의 루브르
박제 지음 / 이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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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써도 그런데, 책을 써도 그런가보다. 좋아하는 작가나 좋았던 책에 대한 서평은 더 잘 써진다. 애정과 진심이 담기니까 저절로 잘 쓰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오후 네 시의 루브르] 저자의 친절한 해설 중에서도 단연 고야에 대해 쓴 글이 좋았다. 책에서 저자는 고야를 특히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걸 말하지 않았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795년 왕립 아카데미 원장, 1799년 수석 궁정화가의 자리에 오른 고야. 그는 명성과 성공에 집착했지만, 내심 상류층을 비난하고 조롱했다. P.93

 

이중성은 고야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처세술이 능한 인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오래된 신분제도나 역사의 흐름을 홀로 무너뜨릴 수 없었던 한 예술가의 한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P.95

 

꼼꼼한 붓질을 구사하지도 않았기에 그림의 표면을 가까이에 보면, 서로 관계 없는 물감 덩어리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감상자가 뒤로 물러날수록 형체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전체적 조화가 이루어지며 인물의 내면적 특성까지 화면에 담겨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P.96

 

프란시스코 고야의 <솔라나 후작부인의 초상>을 소개하며 고야에 대해 쓴 글 중 일부다. 특히 고야의 이중성에 대한 변명에서는 그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잘 드러난다. 나 또한 고야를 위한 저자의 변명에 보태고 싶다.

 

예전부터 예술가들은 대부분 모순된 관념과 가치관을 드러내왔다.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작품이나 공식 석상에서의 태도가 실제 삶의 모습과는 다른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예술가들은 대개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다. 때로는 그 이중성과 자기모순이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거나 철저히 감춰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마도 예술가들은 그러한 양극성의 충돌을 통해 내심 겪게 되는 괴로움을 작품으로 승화 혹은 합리화했던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나는 현명한 사람일수록 쉽게 확신이나 확언이나 확답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보다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마음에 느껴지는 예술가들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하나의 가치관을 확고하게 간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다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 작품이 많지 않고 작품 이외에 대한 것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더욱 매력적인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미치광이들의 배> 중 일부.

 

또한, 물은 단단한 뭍과는 달리 언제 변할지 모르며 통제할 수도 없는 까닭에 비이성적인 상태를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물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은 정결한 영혼이라기보다는 악마적 본능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로 그려졌다. 그런가 하면, 혼자 힘으로 건너기 어려운 물을 건너게 해주는 배는 교회나 운명 공동체를 상징한다. P.107

 

나는 이 해설을 보기 전까진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굉장히 현실사회에 불만이 많고 체제전복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는 보스가 굉장히 도덕적인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나라면, ‘언제 변할지 모르며 통제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진 물을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보스가 사랑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저자는 그러한 비이성적인 상태를 악마적 본능과 미치광이로 연결시켜 보스의 관점을 말한다.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뒤집는 새로운 시각이다. 신선했다.

 

 

(페트루스 크리스투스의 <금세공 작업실의 성 엘리기우스> 속의) 이 볼록거울은 평면 그림에서 제삼의 공간을 창조하는 반 에이크의 선구적인 기법이었다. 감상자가 이차원 그림을 바라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림 속의 등장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삼차원 공간을 공유하게 해주는 효과이다. 회화의 한계적 공간을 뛰어넘어 개념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캥탱 마시의 <돈놀이꾼과 그의 아내>에서) 열린 뒷문 사이로 보이는 안뜰도 비슷한 구실을 하는 장치로서 이는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미술이 창안해낸 특징적인 공간 구성이다. P.115

 

캥탱 마시의 <돈놀이꾼과 그의 아내>에 대한 설명 중 일부이다. 캥탱 마시의 이 그림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작품들 중 더욱 좋아하는 그림이다. 도박판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과 인물에 대한 묘사가 훌륭했다.

 

[오후 네 시의 루브르]는 무척 부러운 작품이다. 칸트가 매일 오후 4시면 항상 같은 곳을 지나가 사람들이 시계 없이도 시간을 알았듯이, 루브르를 거의 매일같이 내 집처럼 드나들며 작품 하나하나를 꼼꼼히 보아왔기 때문에 나온 책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프랑스가 아닌 한국 땅에서, 매일 오후 10~11시면 잠들기 전에 멋진 작품 서너개씩 감상하고 잠들 수 있게 됐다.

 

 

그림 해설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일부에서 알랭 드 보통의 글을, ‘나도 다 아는 얘기’라고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막상 그렇게 잘 설명해보라면 못하듯이, 그림도 그냥 보이는 대로 말하는 것 같지만 막상 혼자 보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사실 이 책은 소설처럼 단숨에 읽을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한 작품, 한 작품씩 찬찬히 보아야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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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맨스티
최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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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맨스티’가 무슨 말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을 반복할 때의 효력은 안다. ‘오릭맨스티’는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 [앨리의 사랑 만들기(Ally McBeal)]에 나오는 괴짜 변호사 존이 당황할 때마다 내뱉는 ‘포킵시(Poughkeepsie)’ 같은 것. 단어라기보다는 소리이며 일종의 주문이기도 하다.

 

많은 어르신들이 이야기한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고, 그 쉬워 보이는 보통의 삶을 사는 것이 실은 가장 힘들다고 말이다. 개인적인 성향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쪽은 아니지만 어르신들의 말은 정말이다.

 

특히 내 나이가 되면 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들과 같은 삶의 궤적에 오르기 위해 고공분투 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 결혼에는 때가 있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못 만나면 결혼정보회사에라도 가입해야 한다. 결혼은 남들 다 할 때 해야 한다.

- 세상에 별 남자, 별 여자 없다. 결혼은 남들 하듯이 적당히 조건 맞고 적당히 마음 맞는 사람 만나서 결혼하면 된다.

- 결혼 준비에도 기본이 있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해가야 한다. 남들 하는 평수, 남들 하는 만큼의 혼수, 남들이 사는 브랜드.

 

그리고 오릭맨스티의 이름 없는 남녀도 서로 그렇게 만난다. 소개팅으로 만나고, 적당히 연애하다가 적당한 때 결혼해서 그냥 적당한 감정으로 적당하게 산다.

 

최윤의 건조한 문장들은 그들의 삶을 더욱 지루하고 메말라보이게 하지만 막상 그 삶을 살고 보면 나름대로 재미있는 순간도, 행복한 순간도, 또 진절머리 나게 불행하다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남들 다 하는 소개팅을 통해 남들 다 하는 시기에 결혼을 하고 또 남들 사는 것처럼 살면서 남들 다 한다는 낙태도 하고 바람도 펴보고 예상치 못하게 들어선 아이 때문에 당황도 하지만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라고 무덤덤하게, 혹은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최윤의 문장들은 마치 소설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같다.

 

습관적으로 매춘을 해도 아내는 모르고, 꽤 오랫동안 바람을 피워도 남편은 모른다. 서로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지루하게 지내다보면 가끔은 그것이 행복한 일이 아니어도 뭔가 인생에 새로운 사건 하나 일어났음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라도 하듯 사건은 일어난다. 일어날 뿐 아니라, 엄청나게 비극적이고 또 추잡하게 끝이 난다. 사건이 일어나는 지점은 내가 이쯤이겠지, 이때쯤 하나 터지겠지 하는 순간을 두어 번 넘긴 후였다. 그래서 그만큼 어마어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이미 그 전에 곪아 터졌어야 할 고름들이 가득 여물기만 하고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폭발력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평범해 보이는 소망과 욕망은 개개인에게 맞지 않는 무리한 레이스를 유발하고 이는 결과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크게 이탈하는 엄청난 비극을 낳는다.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남들이 사는 패턴을 자신에게 무리하게 끼워 맞추기 때문에 맞지 않을 수밖에 없고, 행복할 수가 없다.

 

엄청난 ‘비극적’ 사건 속에서 또 한 생명은 ‘극적’으로 구조된다는 점이 다소 식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오릭맨스티’는 결국 극적으로 살아남은 한 생명의 입에서 비로소 구현되는 주문이라 의미가 있다. 일반인의 입에서 발음되는 ‘오릭맨스티’는 결코 이 살아남은 자의 ‘오릭맨스티’와 같을 수가 없다.

 

또 결국 살아남아 자신의 비극적 과거를 두려움 없이 마주하는 순간, 그저 남들처럼 살고자 했던 이름 없는 남녀가 처음으로 그들의 이름을 찾게 되므로 ‘오릭맨스티’는 진정한 한 인간의 존재를 불러내는 주문이라 볼 수도 있다.

 

조지 오웰은 그의 책 [숨 쉬러 나가다]에서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당신 안의 그 느낌, 서두를 것 없고 두려울 것 없던 그 느낌, 당신이 겪어봐서 말해주지 않아도 알거나 겪어본 적이 없어 알 길이 없는 그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p.152

 

오릭맨스티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릭맨스티는 당신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말해주지 않아도 알거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 알 길이 없는 것. 하지만 알게 된다면 살다가 어느 순간 나지막이 오릭맨스티... 오릭맨스티... 하고 발음해볼 지도 모르는 것.

 

 

**************

여자는 말솜씨 덕분에 실제 그녀가 받아야 하는 대접보다 한결 나은 대접을 받는다. 그래도 바뀌는 것은 없다. p.8

 

결혼은 잘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값싼 숙소를 찾아 서울의 뒷골목이나 도시 외곽을 헤맸을 것이다. 대강만 계산해도 이 방면에서 결혼을 통해 그들이 가상으로 절약해 벌어들인 금액은 상당하다. p.70

 

"악아, 아가는 언제 만들 거니, 응?" p.73

 

여자는 행복하다. 분유나 기저귀 광고에 등장하는 광고 속의 핵가족처럼 행복하다.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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