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공화국에서 살아남기 - 김주덕 변호사의 사기 예방 프로젝트
김주덕 지음 / 가야북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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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은 살아볼수록 겁이 나는 곳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면서부터 처음에 제일 날 힘들게 했던 건 전세 아파트 계약이었다. 생각 같아선 구박을 받아도 계속 부모님 그늘에 있고 싶었건만,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방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어쩌랴. 그런데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생각하니 여러 예방책을 세우게 되었다. 등기부등본도 두 번, 세 번 떼어달라고 했고, 주인이 불안정한 사업을 하는 사람인지(본인의 의지가 아닌 채로 망할 수도 있지 않은가! -참고로 고의성이 없으면 형사사건이 안 되고 민사사건이란다. 즉, 금전상의 피해를 입힌 사람을 고소해 벌을 받게 할 수는 없고, 채무불이행에 대한 민사사건으로 배상을 하도록 하는 방법밖에 없단다!), 은행에 잡혀있는 대출도 부동산에서 함께 가서 말소하도록 잔금도 주인이 아닌 부동산에 이체해주었고, 말소하자마자 증명서를 부탁했다. 비행기 값이 들어도 미리 한번 내려와 동사무소에 가서 계약서를 갖고 확정일자를 받았다. 남들은 별 것 아닌 것 갖고 그렇게 유난을 떠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 당시 내 전 재산이었다. 남들 눈에는 새발의 피지만 나중에 이름도 없는 요양원에서 주민등록증도 뺏기고 매 맞으며 남은 여생을 보내지 않으려면 그 정도는 해놓아야 했던 것이다. (오바란 거 안다. 하지만 남편도 새끼도 없는 내 미래를 누가 알랴!) 이 모든 게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했던 일이다.

세상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연일 사건, 사고가 뉴스로 전해지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이 사회에 대해 그런 경계를 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참 슬픈 일이지만 현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이 책의 제목 사기공화국은 우리 현재 사회를 말할 수도 있고, 사기가 만연하는 사회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기꾼들이 득실거리는 사회, 틈만 나면 비집고 들어와 타인을 등쳐먹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그곳이 바로 대한민국, 사기공화국이다. 이 책은 ‘왜’ 사기를 당하는지, ‘구체적인 사기수법’은 어떤지,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쓴 비교적 상세한 전천후 보고서다. 오랜 세월 형사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를 거쳐 현재 변호사를 하고 있는 저자는 사기꾼, 피해자를 오랫동안 봐왔고, 실제로 법이 어떻게 이들을 대하는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저자가 단순한 사건만을 열거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사기꾼과 피해자의 심리까지 꿰뚫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먼저 ‘돈’이 최고의 권력으로 자리 잡은 이 나라의 현실을 설명한다. ‘돈’이면 뭐든 다 된다는 물질만능주의와 어떻게든, 무슨 수를 쓰든 많이만 벌면 된다는, 이 사회에 만연하는 도덕적 해이를 말한다. 일하지 않고 노력을 덜 들이며 많이 버는 방법을 쫓고, 단번에 일확천금을 하려고 욕망을 불사르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아직도 사람만 믿고 빌려주는 주먹구구식 거래는 더 많은 사기에 노출되게 하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법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사기에, 사기당한 사람의 피폐 정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벼운 사기범 처벌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도둑과 강도에 비해 사기죄는 ‘사람을 속여 재물을 편취하는 것이고, 가장 기본적인 무기는 거짓말’이라고 한다. 분식회계 같은 회사의 거짓말로 회사가 망하고 나면 결국 공적 자금이 들어간다. 그건 곧 우리의 세금이다. 개인의 재물 편취 사기뿐만 아니라 이런 대규모 사기까지 개인부터 사회까지 전반적으로 사기에 대한 의식을 새로이 하고 사기가 발을 못 붙이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사기의 재구성에서는 애정사기부터 결혼사기 취업사기 이자사기 부동산사기 피싱사기 프랜차이즈사기 주식사기 도박사기 역술사기 사이버범죄사기 보험사기 브로커사기 외국투자사기 국제결혼사기 등등 별별 사기가 다 나온다. 일단 케이스를 하나하나 보여주고 원리를 설명해준다. 왜 사기를 당했는가. 그 다음엔 사기꾼과 피해자의 심리가 나온다. 왜 당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리고 또 다른 신종 케이스도 보여준다. 사기 케이스를 다 열거할 수는 없다. 원리를 이해했고, 왜 당하는지 심리를 이해했다면 이제 응용하는 것은 내 역할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는 저자의 속 시원한 말투다. 객관적으로 사건을 얘기하면서도 이래서 당했다, 저래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등의 설명은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이 재밌다. 정말 말솜씨가 그만이라 읽는데 전혀 지루할 틈도 없이 빠져든다.  

사기의 구성요건에서는 누가 왜 사기를 당하기 쉽고 누가 사기꾼인가에 대한 얘기와 사기를 당했을 때 해야 할 일 등을 상세히 알려준다. 친구 중에 정말 의심 많고 똑똑하고 지적인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3천만 원의 사기를 당했다고 얘기했다. 그것도 형부한테. 내용인즉슨, 임대사업을 하던 형부가 투자를 부탁해왔는데, 처음에는 1천만 원의 적은(!) 돈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월 20만원의 높은 이자를 주는데, 몇 달 문제없이 계속 이자가 들어오자, 3천만 원의 적금을 든 것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까지 해 집어넣은 것이다. 결국 사업은 부도가 났고 친구는 원금을 못 찾은 것은 물론, 사기당한 돈까지 적금을 부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너 같이 똑똑한 애가…”라는 내 말에 친구는 “그게, 욕심이란게 한순간이더라구…”라고 했다. 똑똑한 척하는 사람들이 더 쉽게 당한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자만심에 상대의 신분도 확인하지 않고 뻔히 보이는 사실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다. 사기사건의 동기는 ‘궁핍이 아니라 탐욕’이라고 저자도 말한다. 욕심이 문제인 것이다. 귀가 얇은 어리석은 사람들, 자기분야에선 똑똑할지 몰라도 험한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들, 거절 못하는 마음 약한 사람들,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사기 당하기 쉽다고 한다. 그럼 누가 사기꾼인가. 본인은 절대로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더 진실한 척, 착한 척, 자신에 대한 정보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면서 말이 많은 사람, 알게 된지 얼마 안 돼 돈 얘기를 꺼내는 사람, 거래를 서두르는 사람들이다. 예전엔 깔끔하고 세련된 스타일이 많았지만 이젠 어리숙한 척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사기 예방 십계명에서는 외부적인 사기환경 뿐만 아니라 사기꾼을 끌어당기는 내부적 요인에 대해서도 중요성을 역설한다. 평소에 사기에 대해 관심을 갖고, 남을 쉽게 믿지 말고, 사람을 잘 분별하고, 허황된 욕심을 부리지 말며, 거래는 신중하게(개인 간의 돈거래는 원칙적으로 금지!) 하고, 매사를 철저히 확인하고(서류작성!), 법과 제도에 허점이 많으니 절대로 법을 너무 믿지 말고, 일 처리할 때는 신속한 대응을 하고 사기를 당하면 신속한 조치를 취하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줄 알아야 하고, 사기를 당해 재산을 잃었다고 자기 자신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는 열 가지다. 저자는 각 단계별로 아주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놓았다. 

결국 이 책은 사기에 대한 보험이다. 당하고 읽으면 늦는다. 전 재산 모두 사기 당하고 집안과 사업은 엉망진창이 된 다음에 후회해 봤자다. 당하기 전에 조심하고 예방을 해야 한다. 증명하기 어려운 사기, 법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내가 조심해야 한다~! 첫눈에 반하는 연애처럼, 교통사고처럼 사기도 한순간이다. 눈에 콩깍지가 쓰이는 것이다. 서두르면 사기 당하기 쉽다. 일은 천천히, 대신 일이 벌어진 다음에는 신속하게 대응을 해야 한다. 또한 돈 얘기가 나오면 종교도 이단이듯, 돈을 빌려달라는 진실한 재벌 2세, 능력 많은 사업가는 이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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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 - 내가 뉴스를, 뉴스가 나를 말하다
김주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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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지적인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 그녀가 바로 김주하이다. 처음에 김주하를 봤을 때가 생각난다. 김주하는 어느 날, 약간은 중성적인 얼굴에 굵고 낮은 목소리로 MBC 뉴스에 등장했다. 뉴스의 특성상 그런 것이겠지만, 웃지도 않고 얼굴선도 아주 가냘픈 여성적인 프로필도 아니었고 더구나 목소리는 마치 남자 같았다. 모든 이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9시 뉴스의 앵커인 그녀는 어찌 보면 그 등장이 그리 화려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엔 그랬다.

그렇게 그녀는 저녁마다 뉴스를 전해주었고 특별하게 튀는 것도 없이 객관적이고 중성적인 방송을 했던 것 같다. 그런 그녀의 자취를 잃은 것은 내가 더 이상 뉴스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젠 텔레비전도 없으니 더군다나 그녀를 볼 일이 없었다. 다만 그녀가 앵커에서 기자로 변신했다는 소식만 잠깐 들었을 뿐이다. 그런 그녀가 너무나 아름답고 미소 띤 모습으로 자신의 책과 함께 내게 다가왔다.

보통 앵커라고 하면, 더구나 화려한 저녁 9시 뉴스의 여성 앵커라고 하면, 그 속내가 얼마나 궁금할까. 요즘은 탤런트나 영화배우보다 여성 아나운서나 앵커에 대해 더 궁금해 하는 일반인들이 많은 것 같다. 지성의 이미지가 그녀들에게 따라붙기 때문이리라.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미모뿐만 아니라 지성까지 완벽하게 갖추었으니 그녀들은 분명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서 다른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리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어떤 특별한 모습이나 숨겨진 사생활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겠다. 이 책은 그런 모습보다, 인간 김주하가 대한민국의 한 여성으로서 어떻게 방송사에 들어갔으며, 어떻게 방송을 했으며, 또한 어떻게 기자로 변했는지 그녀의 참모습과 그 이면의 노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제일 먼저 든 느낌은 이 특별해 보이는 여자가 우리와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특별히 잘난 것도 특별히 못난 것도 없이 그저 우리와 비슷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일과 가정 그리고 여자로서 뭐든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노력하고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 당신이었다. 방송사에 들어가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공부하고 노력한 모습, 방송을 하면서 벌벌 떨고, 욕까지 얻어먹으며 방송을 배운 것, 기사를 잡기 위해 사기도 당하고, 휴일에 친인척(!)까지 동원해 일을 해내는 것, 뉴스를 하고 또 기자로서 기사를 취재하면서 우리와 똑같이 흥분하고 울분을 토하고 또 슬픔으로 함께 눈물짓기도 하는 인간적인 김주하가 이 책안에 들어있다. 월드컵의 함성도 황우석 사태도 김주하는 바로 곁에서 함께했던 것이다. ‘(...) 나같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하지만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이들에게 말한다. 진정 원하는 것이 있다면 끝까지 노력하라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만큼 노력해 보라고.’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뉴스가 만들어져 우리에게 전달되는 과정, 사건을 취재해 기사를 쓰는 생생한 현장이 모두 들어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건, 사고, 인물들의 이면이 그대로 담겨있다. 우리가 실제 방송을 통해 보는 건, 빙산의 일각인 것이다. 완벽해 보이는 무대 뒤엔 우리가 모르는 열악한 환경이 자리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또한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여성 앵커라는 자리에서 여자로서 갖는 어려움, 방송계에서 여자가 겪는 일들, 세상이 변해도 여전히 보수적인 방송세계에서 나름의 자리를 찾아가는 여성의 모습이 애틋하게 그려져 있다.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닌 것이다.

‘여자라는 이름을 앞세워 당장이 편안하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하지만 그건 후배에게 선배들이 어렵게 닦아 놓은 길을 막아버리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내 딸에게, 내 후배에게 자랑스러운 여성이, 아니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당장의 안위보다는 힘들어도 여성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맡은 바 일을 잘 하는 건 당연한 시대가 됐다. 직접 아이디어를 제출하고 일을 만들어 리더가 되어야 한다. 선배들이 눈물을 흘리며 닦아놓은 길을 조금씩 더 넓혀가야 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몇 배를 노력해 위 시대의 처음이 됐던 선배들의 노력을 생각해야 한다.’

처음에 이 책을 잡았을 때 제일 궁금했던 건, 왜 방송의 꽃인 앵커를 마다하고 발로 뛰는 기자를 선택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차가운 눈과 가슴으로 정보를 분석해 전달해주는 일이 앵커라면, 기자라는 직업은 직접 세상에 나가 온몸으로 부딪치는 것이 아니던가. 김주하는 현장을 누비는 뉴스를 통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좀 더 실감나는 현장의 생생함을 흥분과 함께 그대로 전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법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가난과 무지까지도 우리에게 속속들이 보여줘 이 사회를 움직이고 싶은 것 같다. 평범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치와 아름다움 모두 보는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녀는 그런 마음으로 뉴스데스크에 여성 앵커로 앉을 것이고 또 발로 뛰는 김주하 기자로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내 눈엔 더 아름답고 빛을 발하는 김주하가 보인다. 그녀가 그런 모습을 잃지 말고 그녀의 작은 힘으로, 엄청난 노력으로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길 바란다. 그녀의 미소로 이 세상이 조금은 더 따뜻해지는 것 같다. 평범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여자, 김주하… 누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김주하에게서 평범하지만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당신이 보인다. 김주하는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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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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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름다운 작품이다. <오래된 정원>의 강렬한 사랑과 이념의 정수 이후, 진흙 속에서도 진주는 역시 진주이듯, 정말 고운 진주가 바리데기라는 소녀를 통해 살아났다. 배경이 북한일 뿐, 이 이야기는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보편성의 극치이다. 영혼을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인물이지만, 인간다운 모든 면을 가진 보통의 인물이기도 하다. 독재체제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인 세상이다. 약한 인간은 어디서나 짓밟히고 어떤 체제도 자신과 맞지 않는 인간은 핍박한다. 중요한 건 어떤 조건이든, 이 세상을 살아내는 인간 모두, 생명수를 알아보는 마음이다.  

사람은 다 같다. 한번 태어나 살고 둑는 건 다 같다. 그런데 왜 내 잘못이 아닌데, 왜 내가 선택한 게 아닌데, 그런 부모를 만나고,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가. 왜 여자인 것만으로도 원죄인 인도에서 태어났는가. 왜 흑인으로 태어나 노예 생활을 했는가. 왜 부모 공양하고 제사를 모셔야하는 한국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는가. 따지기 시작하면 우리네 인생은 불공평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다. 왜 좀 더 좋은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했는지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은 주어진 조건과 환경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진보시키는 능력이 있다. 개인의 조건이든 사회적인 어떤 체제이든.   

지독한 1인 독재 체제인 1980년대인 북한에서 바리는 태어났다. 여전히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는 일곱째마저도 딸을 낳자, 휑하니 집을 나가버리고 엄마는 아이를 숲에다 갖다 버린다. 그런 아이를,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살린다. 그렇게 한 소녀가 태어나 부자도 아니고 문명의 이기가 다 갖춰진 곳도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대가족 안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갑자기 밀어닥친 불행에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서로의 생사조차 모르게 된다. 체제의 불행과 가난은 약하디 약한 개개인에게 극도의 불안과 불안정성으로 다가온다. 더 이상 삶은 없다. 남은 것은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삶을, 인간을, 세상을 용서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북한 말, 찰지고 맛난 그 사투리 안에 내 어릴 적 정서가 다 녹아드는 듯 아름답고 고운 우리말을 상기시킨다. 수도권에서만 살았지만, 이 작품은 외국어, 외래어 그리고 이제는 인터넷 용어까지 판을 치는 요즘 세상에 맑은 샘물 같은 신선함을 주었다. 정겹고 따뜻한 분위기에 흠뻑 젖다가, 바리가 불행을 겪는 대목부터는 가슴을 쥐어뜯는 듯, 함께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때론 눈물을 쏟다가 바리가 보는 혼령들에게마저 애틋함을 느끼기도 한다.

한 점 옥의 티로 보인 부분은 결말이었다. 끝부분의 모든 세상 문제에 해답을 주는 듯한 그 시도는 좀 작위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쩌면 현대의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정답 이상의 교훈이 될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보다 이 작품의 집약은 할머니가 바리에게 해주던 바리공주 얘기가 아닐까. 부모님하고 온 세상 사람들을 살려주려면 생명수 약수를 가지러 가야 한다.

‘저어 해가 저무는 서천 서역에 가믄 세상 끝에 약숫물이 있다구 그랬지비. 병든 나라 지나 물 건너고 산 넘고 가는 동안에 신령님들이 도와주고, 왼갖 사람 빨래 해주고, 밭 매주고, 시키는 천한 일 다해주고, 귀신 물리치고, 지옥에두 다녀오지. 지옥에 갇힌 죄인들 구제해주고 서천에 당도하니 장승이 기달리구 이서. 장승하고 내기 시행에 져서 살림해주고 아 낳아주고 석삼년을 일해 주어야 약수를 내주갔다구 허는 거이야. 저어 세상 끝이서 온갖 고난을 겨끄다가 돌아오는데 저승 가는 배들을 구경하지. 황천으로 흘러가는 배 위에 가즌 업보를 걸머진 혼백들이 타구 있대서.
할마니 생명수 얻은 거는 빠쳈다.
오오 기래, 할마니가 깜박했다. 생명수 약수를 달랬더니 그놈에 장승이가 말허는 거라. 우리 늘 밥 해먹구 빨래허구 하던 그 물이 약수다.
기럼 공주님이 헛고생 한거라?
바리야, 기건 아니란다. 생명수를 알아볼 마음을 얻었지비.
거 무슨 말이웨?
이담에 좀 더 살아보믄 다 알게 된다. 떠온 생명수를 뿌레주니까니 부모님도 살아나고 병든 세상도 다 살아났대. 그담부턴 바리 큰할미는 우리 속에 살아 계신다누. 내 속에 네 속에두 있댄하지.’   

이 세상 모든 곳에, 어떤 체제하든, 인간은 모두 생명수와 함께 호흡하고 마시고 함께 살고 있다. 다만 그 생명수를 알아볼 마음을 못 얻었을 뿐… 정말 아름다운 작품,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황석영 선생님, 감사합니다… 어떤 삶을 살든, 어디에서 살든, 어떻게 살든, 생명수를 알아보는 마음을 얻으라고 일러주셔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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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04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달래님이 읽은 바리데기, 잘 읽고 갑니다. 오래된 정원,에서도 작가의 이야기꾼
다움과 아름다운 언어가 빛났지요. 좀 작위적이고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요.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빛과 그늘이 섞여있나봐요. 완곡어법이지만 조금 느껴지네요.
생명수에 대한 생각, 그것이군요.

홍수맘 2007-07-0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의 의미를 이해했어요.
"황석영"님 하면 <장길산>이 먼저 떠올라요. 그리고, 어렴풋이 어떤 사실을 계기로 제가 좀 멀리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
이 책과 함께 <장길산>도 이제는 다시 찾아 읽어보고 싶어 졌답니다. ^^.

진달래 2007-07-05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오래된 정원>에서 전 사랑에 중점을 두고 읽었어요. ^^ 이 작품은... 완곡어법... ^^;; 리뷰에도 썼지만, 문학에서 어떤 정답주기나 교훈주기... 이런 거 개인적으로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그래서요... 책은 아주 좋아요. ^^

홍수맘님, 아, 전 아직 <장길산>을 못 읽었어요. ^^;; 꼭 찾아봐야겠네요. ^^*

2007-07-09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09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09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년 6월에 읽은 나의 책들이다.  

81. 사랑은 배워야 할 감정입니다, 월터 트로비쉬, 한국 기독학생회 출판부
82. How to read 셰익스피어, 니콜러스 로일, 이다희역, 웅진지식하우스
83.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존 반빌, 정영목역, 랜덤하우스 코리아
84. 우리들의 스캔들, 이현, 창비 
85. 내 이름은 임마꿀레,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김태훈역, 섬돌
86. 하얀 달의 여신, 천양희, 하늘연못 
87. 감기, 윤성희, 창비
88. 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창비 
89. 이현의 연애, 심윤경, 문학동네
90. 바리데기, 황석영, 창비 

여전히 바쁘고 일도 많고,
그런 와중에도 시간 나면 책을 잡았으니,
내 상황에 이 정도면 많이 읽었다고 자부한다.
내게 개인 사생활은 없고 결국 보면
책 읽는 생활이 내 사생활의 전부인 것 같다. 

이제 문제는 리뷰다.
리뷰 쓰는 시간도 아까워, 그냥 책만 읽고 싶다. *^^* 
읽을 책도 많고, 읽고 싶은 책도 많은데,
난 여기서 밥 벌어먹는데 시간을 다 보내고 있으니, 참...

그래도 이번 달엔 1주일 휴가가 잡혀있다. 
놀러가자고 꼬셔도 꼼짝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책만 보는 날 보며 언니가, 

"넌 정말 몸보다 마음이 늙었어..."라고 아무리 놀려봐야, 

 난 어디 안 가고 책만 볼 거다~!
이젠 내가 봐도 병색이 짙은 것 같다. ^^;;

책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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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7-07-03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하는 일을 못하면 병나죠. 책병이겠습니까? 책치료는 아니구요?
책만 보며 지내기엔 1주일은 짧은 듯 하군요. 그래도 알차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진달래 2007-07-04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을 너무 모르고 책만 본다고 지인들은 말들이 많네요. ^^;;
그래도 뭐, 이것밖엔 좋은 것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
 
감기
윤성희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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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윤성희의 <감기>를 잡았다. 사실 처음 가방에 넣었던 건, 다른 책이었는데, 그 책을 빼고 떠나기 직전에 도착한 이 따끈따끈한 책을 대신 넣었다. 그래서 옆자리에 늘 코고는 할아버지나 담배 냄새나는 아저씨 대신, 처음으로 쌈박한 젊은 오빠가 앉아 작업을 거는 것도 모르고 이 책에 빠져 버렸다.

술술 풀리는 황당한 이야기 하며, 감칠 맛 나는 대사 하며 처음에 이 작품은 ‘여자 성석제’, 아니 ‘여자 김영하’를 떠올리게 했다. 아무 때나 픽픽 터지는 웃음 하며, 골 때리면서 어이없는 대사들이 너무 웃기고 재밌었다. 하지만 결말마다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허무가 자리하고 있을 줄이야… 결국 웃기는 인생, 꿀꿀한 인생들 모두 우리가 그리 쉽게 생각할 것들은 아닌 것인가. 아니, 어쩌면 우리 인생은 그리 허무한 것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게 평범하고 별 볼일 없는 인생도 끝까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 그래도 우리는 사니까 말이다. 

<구멍> <하다 만 말> <등 뒤에> <감기> <재채기> <리모컨> <저 너머> <이어달리기> <안녕! 물고기자리> <무릎> <부분들> 모두 11편의 좀 ‘짧은 많은’ 단편들이 들어있는 작품집인데, 웃긴 건, 다 읽고 책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감기>나 <이어달리기> 등 한, 두 작품을 제외하고는 도대체 왜 제목이 저런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책을 읽다가 왜 제목을 그런 식으로 붙였는지 이해하게 되면 책을 다 이해한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 작품집은 결말마다 허무로 마무리를 짓는 것처럼 제목이 왜 저런지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스토리의 재미나 이해에 별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특이했다. 한편으론 폴 오스터 같이 황당하고 어이없는 스토리를 소재로 잡아 꽉 짜인 구성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재미가 있으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철학이 연결되지 않거나 너무 차원이 달라서 그 비유가 어쩌면 충분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둘 다 이해해도 좋고, 하나만 이해해도 적당히 재밌고 가치가 있다고 보지만, 좀 더 독자들이 다가가고 100%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것 같아 그 배려는 좀 아쉬운 점이었다.

제일 재밌게 읽은 <구멍>과 <하다 만 말> 그리고 <이어달리기>는 정말 짧고 간단간단한 문장들이 현대적인 감각을 한껏 살려주고 간결한 유머와 센스 있는 대사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두 번이나 작품집 전체를 살펴보면서 밑줄 그은 곳도 많고 즐겁고 재밌는 부분도 많았지만, 스토리는 책을 보거나 출판사 보도기사를 보면 되겠고, 여기선 나를 놀라게 했던 몇 부분만 소개한다. 그러니 앞, 뒤의 연관관계는 별로 없겠다.

사연을 응모해서 여행 티켓을 얻어 부모님을 여행 보내는 딸을 여행 떠나기 직전 안아주는 엄마 옆에서 아버지의 “내 혈압약 챙겼어?”에 기절하는 줄 알았다. 아버지가 말없이 집을 나간 사이, 엄마는 외할머니 얘기를 해주고, 마지막에 덧붙인다. “걱정 마라. 그걸 견뎠는데 이쯤이야.(...)” 그래, 이쯤이야, 바로 그거다. (구멍)

집이 쫄딱 망하자, 식구들 모두 갖고 있던 통장들을 다 내놓는 타임, 어머니가 이불 홑청을 벗기니 통장이 하나씩 나왔다. 정작 집안을 쫄딱 망하게 한 아버지의 한 마디, 기절하겠다. “다른 이불도 다 벗겨?” 또 작가는 여기서 뻔하디 뻔한 사기를 친다. 하지만 그게 무척 귀엽다. “너 맞아? 맞으면, 공 흔들어 봐.” (하다 만 말)

아버지, 사내, 남자 사이의 이야기. ‘나사가 빠지면서 생긴 구멍 사이로 빛이 새어나왔다. 바람이 구멍들을 넘나들었다.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을 보려고 기차를 타고 세 시간이나 갔어요. 앞으로 연애를 하려면 꽤 피곤하겠어요. 그건 그렇고, 아버지 얼른 이 구멍들을 막아주세요. 추워요.’ (감기)

“저 드라마 봐요. 주인공이 암에 걸려서 죽는다고 시청자들이 얼마나 욕하는데. 드라마보다 더 진부해. 쪽팔려 죽겠어.” 이 한 마디에 정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들어가 있는 걸까. 이 여자, 진짜로 암으로 쪽팔려 둑었다~! (리모컨) 

전복된 버스의 승객들을 네 딸이 구했다. 기자가 그 엄마를 인터뷰한다. 국밥집을 하는 엄마는 도마 이야기부터 딸들 이야기 등등을 거쳐, 첫째에게 배운 우울증 퇴치 방법을 말한다. 그게 바로 명상법~! 엄마는 그 명상법으로 이어달리기를 상상한다. (이어달리기)

‘그가 숨을 헐떡였다. 청년이 오른손을 그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힘내세요. 무릎에 올려놓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면서 청년이 말해다. 그는 왼쪽 무릎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갑자기 잊고 있던 수많은 장면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는 그에게 다가와 그의 두 무릎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던 큰누나. 걱정 마라,라고 말하면서 주먹으로 그의 무릎을 툭툭 치던 아버지. 그의 무릎을 베고 낮잠 자는 걸 좋아했던 남동생. 식구들은 많고 집은 좁아서 마루에 모여앉으면 서로의 무릎이 닿았다. 그의 가족들은 한겨울에도 추위를 느낀 적이 별로 없었는데, 그게 서로의 무릎이 닿도록 모여앉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이제야 알았다.’ 어쨌거나 삶은 서로 무릎을 맞대고 지지고 볶는 맛이다~! (무릎)

“생각해보니까, 세상 사람들 모두가 기적 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손가락이 바위틈에 끼여 빠지지 않아도 ‘생각해보니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았다.’ 그렇다. (부분들)

올 여름 한국문학 티셔츠에 윤성희의 <감기> 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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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6-26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무릎>의 문장이 마음에 와 닿아요. 요즘 거의 일본소설만 읽고 있는 경향이 있는 저에게 한번쯤 변화를 줘도 괜찮겠죠? 혹시 박민규의 <카스테라>의 수준을 넘어섰나요? 그 이상은 힘든데...

진달래 2007-06-27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한국문학 좋아합니다. ^^ <삼미 슈퍼스타즈...>는 넘 재밌게 읽었는데, <카스테라>와 <핑퐁>은 제 스타일이 아니어서 좀 별로였는데... <카스테라>와는 스타일이 약간 다릅니다. 전 이 책을 읽으면서, 폴 오스터와 성석제 그리고 김영하를 많이 떠올렸어요. ^^ 독특하고 웃기고 허무하기도 한 책이에요. ^^* 즐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