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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윤성희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평점 :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윤성희의 <감기>를 잡았다. 사실 처음 가방에 넣었던 건, 다른 책이었는데, 그 책을 빼고 떠나기 직전에 도착한 이 따끈따끈한 책을 대신 넣었다. 그래서 옆자리에 늘 코고는 할아버지나 담배 냄새나는 아저씨 대신, 처음으로 쌈박한 젊은 오빠가 앉아 작업을 거는 것도 모르고 이 책에 빠져 버렸다.
술술 풀리는 황당한 이야기 하며, 감칠 맛 나는 대사 하며 처음에 이 작품은 ‘여자 성석제’, 아니 ‘여자 김영하’를 떠올리게 했다. 아무 때나 픽픽 터지는 웃음 하며, 골 때리면서 어이없는 대사들이 너무 웃기고 재밌었다. 하지만 결말마다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허무가 자리하고 있을 줄이야… 결국 웃기는 인생, 꿀꿀한 인생들 모두 우리가 그리 쉽게 생각할 것들은 아닌 것인가. 아니, 어쩌면 우리 인생은 그리 허무한 것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게 평범하고 별 볼일 없는 인생도 끝까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 그래도 우리는 사니까 말이다.
<구멍> <하다 만 말> <등 뒤에> <감기> <재채기> <리모컨> <저 너머> <이어달리기> <안녕! 물고기자리> <무릎> <부분들> 모두 11편의 좀 ‘짧은 많은’ 단편들이 들어있는 작품집인데, 웃긴 건, 다 읽고 책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감기>나 <이어달리기> 등 한, 두 작품을 제외하고는 도대체 왜 제목이 저런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책을 읽다가 왜 제목을 그런 식으로 붙였는지 이해하게 되면 책을 다 이해한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 작품집은 결말마다 허무로 마무리를 짓는 것처럼 제목이 왜 저런지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스토리의 재미나 이해에 별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특이했다. 한편으론 폴 오스터 같이 황당하고 어이없는 스토리를 소재로 잡아 꽉 짜인 구성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재미가 있으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철학이 연결되지 않거나 너무 차원이 달라서 그 비유가 어쩌면 충분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둘 다 이해해도 좋고, 하나만 이해해도 적당히 재밌고 가치가 있다고 보지만, 좀 더 독자들이 다가가고 100%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것 같아 그 배려는 좀 아쉬운 점이었다.
제일 재밌게 읽은 <구멍>과 <하다 만 말> 그리고 <이어달리기>는 정말 짧고 간단간단한 문장들이 현대적인 감각을 한껏 살려주고 간결한 유머와 센스 있는 대사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두 번이나 작품집 전체를 살펴보면서 밑줄 그은 곳도 많고 즐겁고 재밌는 부분도 많았지만, 스토리는 책을 보거나 출판사 보도기사를 보면 되겠고, 여기선 나를 놀라게 했던 몇 부분만 소개한다. 그러니 앞, 뒤의 연관관계는 별로 없겠다.
사연을 응모해서 여행 티켓을 얻어 부모님을 여행 보내는 딸을 여행 떠나기 직전 안아주는 엄마 옆에서 아버지의 “내 혈압약 챙겼어?”에 기절하는 줄 알았다. 아버지가 말없이 집을 나간 사이, 엄마는 외할머니 얘기를 해주고, 마지막에 덧붙인다. “걱정 마라. 그걸 견뎠는데 이쯤이야.(...)” 그래, 이쯤이야, 바로 그거다. (구멍)
집이 쫄딱 망하자, 식구들 모두 갖고 있던 통장들을 다 내놓는 타임, 어머니가 이불 홑청을 벗기니 통장이 하나씩 나왔다. 정작 집안을 쫄딱 망하게 한 아버지의 한 마디, 기절하겠다. “다른 이불도 다 벗겨?” 또 작가는 여기서 뻔하디 뻔한 사기를 친다. 하지만 그게 무척 귀엽다. “너 맞아? 맞으면, 공 흔들어 봐.” (하다 만 말)
아버지, 사내, 남자 사이의 이야기. ‘나사가 빠지면서 생긴 구멍 사이로 빛이 새어나왔다. 바람이 구멍들을 넘나들었다.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을 보려고 기차를 타고 세 시간이나 갔어요. 앞으로 연애를 하려면 꽤 피곤하겠어요. 그건 그렇고, 아버지 얼른 이 구멍들을 막아주세요. 추워요.’ (감기)
“저 드라마 봐요. 주인공이 암에 걸려서 죽는다고 시청자들이 얼마나 욕하는데. 드라마보다 더 진부해. 쪽팔려 죽겠어.” 이 한 마디에 정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들어가 있는 걸까. 이 여자, 진짜로 암으로 쪽팔려 둑었다~! (리모컨)
전복된 버스의 승객들을 네 딸이 구했다. 기자가 그 엄마를 인터뷰한다. 국밥집을 하는 엄마는 도마 이야기부터 딸들 이야기 등등을 거쳐, 첫째에게 배운 우울증 퇴치 방법을 말한다. 그게 바로 명상법~! 엄마는 그 명상법으로 이어달리기를 상상한다. (이어달리기)
‘그가 숨을 헐떡였다. 청년이 오른손을 그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힘내세요. 무릎에 올려놓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면서 청년이 말해다. 그는 왼쪽 무릎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갑자기 잊고 있던 수많은 장면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는 그에게 다가와 그의 두 무릎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던 큰누나. 걱정 마라,라고 말하면서 주먹으로 그의 무릎을 툭툭 치던 아버지. 그의 무릎을 베고 낮잠 자는 걸 좋아했던 남동생. 식구들은 많고 집은 좁아서 마루에 모여앉으면 서로의 무릎이 닿았다. 그의 가족들은 한겨울에도 추위를 느낀 적이 별로 없었는데, 그게 서로의 무릎이 닿도록 모여앉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이제야 알았다.’ 어쨌거나 삶은 서로 무릎을 맞대고 지지고 볶는 맛이다~! (무릎)
“생각해보니까, 세상 사람들 모두가 기적 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손가락이 바위틈에 끼여 빠지지 않아도 ‘생각해보니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았다.’ 그렇다. (부분들)
올 여름 한국문학 티셔츠에 윤성희의 <감기> 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