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에만 나오는 제철 음식과 제철 간식이 있듯이 2025년 한 해의 끝자락에 펼쳐 든 책이 있다.















‘세계 최초 시 서바이벌 오디션이 시작됐습니다./ 지금 바로 투표해주세요’ 상상은 뻗어 나간다. ‘“자 이번엔 금지어 미션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린 단어는 시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계, 미래, 사랑, 기계, 영원, 천사. 바다, 숲, 여름, 겨울, 비, 눈, 유령, 죽음!”// 습작생들은 탄식했다 심하게 좌절한 습작생의 경우 상담 치료를 신청하기도 했다…”
-고선경의 ‘스트릿 문학 파이터’. 중에서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서 이듬해 10월 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를 펴낸 고선경 시인은 지금까지 16쇄(3만부)를 찍어낸 문단의 아이돌이다.
등단 때부터 ‘시적 패기’가 돋보였던 고선경 시인은  어린 시절 서른 살이 되면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 막연한 생각을 품었었다.
현실이라는 냉정한 세상에서 시인은 많이 미끄러지고 실망하고 상처 받으며 앞을 향해 나아갔고 그렇게 끄적인 시들은 독자들에게 ‘힙한’(멋진) 것으로 소비하는 ‘텍스트힙’이 되어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서른 살을 앞둔 고선경 시인은 우울이나 침울한 감정은 거둬 내고 어떻게 해야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지를 궁리하며 독자들에게 한결같이 더 많이 사랑하고 사랑 받을 묘책을 꾸민다.

가슴 떨리게 설렜던, 손에 땀을 쥐도록 긴장하느라 자주 우스워졌던, 수도 없이 흔들리느라 내내 멀미를 느꼈던, 0.1을 뺀 나머지만큼 사랑했던 나의 이십대.

-고선경의 29.9세「나 여기 살아」중에서


난다의 ‘시의적절’ 시리즈의 2025년 한 해의 마지막 12월의 작가 고선경 시인은 스물아홉의 겨울날 겪는 두근거림과 불안, 아픔과 설렘을 특유의 유쾌한 입담과 시적인 패기로 펼쳐 보인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무슨 일을 벌릴 것 만 같이 통통 튀다가 독자에게만 비밀스러운 쪽지를 슬쩍 보여 줄듯 말듯 밀당을 하기도 한다.

짝사랑을 하다 너덜 너덜해진 가슴을 부여 잡다가도 돌연 구체적인 사랑을 위한 계획을 세우며 아직 만나지 못한 상대를 향한 연서를 쓰기도 한다.

좋아하는 간식을 먹으며 사랑의 모양이 느껴지는 순간을 상상하는 시인의 엉뚱한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기다가 청포도 맛 사탕을 입 속에 넣은 시인이 사람의 감정은 어떤 포장지나 사탕의 껍질로 감쌀 수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시인이 빚어낸 시어들을 읽는 동안 마치 서로 대화 하듯 시인이 따라 주는 콜라를 나눠 마시며 시인이 읽고 있는 시를 찾아 읽다 보면 어느 새 시인의 나이 29.9세에 다다라서 함께 손을 맞잡고 서른의 문턱을 향해 간다.

매일 쓰지 않더라도 매일 쓸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은 독자에게 이런 비밀을 털어 놓는다.


네 미래의 시는 아마 너를 기대하고 있을 거야


시대를 막론하고 시는 대중들에게 잘 읽혀지지도 않고 잘 쓰이지도 않는다.

무엇이 시를 시이게끔 하는지, 시인조차 알 수 없는 시대에 시를 읽는다고 앞 날이 밝게 빛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시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 두 눈을 번쩍이다 입가에 미소를 띄우게 된다.

오늘의 운세 따위를 믿는 건 아니지만

머릿속이 답답하니 주변을 정리하라길래 창문을 열고 쓸고 닦고 방 청소를 했다.

창밖은 건물뿐이지만

잘 보면 사다리꼴 모양의 하늘이 빼꼼 청명함을 드러냈다.

책상 서랍 속에는 찢어진 노트 한 장

뒤집어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 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

그게 꼭 부적 같아서

바깥만 나가면 하늘이 드넓다는 걸 알게 되어서

바깥을 씩씩하게 걸었다.

하늘색이 행운의 색깔이라는 건

보통 행운이 아니다.

나도 부적 하나 써 줄게

만사 형통이나 만사대길 말고

남을 돕는 팔자를 가진 이의 이름 하나 적어 줄게

그러니까 이 시 꼭 사서 간직해

알았지?

-고선경 <신년 운세> 중에서


뒷통수를 후려 치고 싶은 일들 그리고 원통하고 후회하며 미련이 남은 일들로 가득 차서 새로운 한 해가 시작 되면 운이 트일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신년 운세를 보러 가서 마뜩 잖은 점괘를 받았을지라도 훌훌 털어버려야 한다.

자연 세계에서도 너무 멋지면서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있지 않은가?

2025년 한 해 동안 많이 후회하고 많이 슬퍼했을 지라도 추운 겨울을 견뎌낸 나무에서 푸르른 잎사귀가 돋아나듯 온갖 세파와 풍파를 견뎌내는 동안 어느 순간엔 반짝 반짝 빛이 나는 날이 찾아 올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먹고사는 건 흔히 주어지지 않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이 벅차고 눈부신 건 아니다. 때로는 이 일이 나를 지치게도 하고 내가 이 일을 의심하게도 만든다. 하지만 이 일을 하는 한, 일의 어려움에 대한 불평은 함부로 입 밖에 내고 싶지 않다. 원래 사랑이란 언제나 경이로움과 피로감이 동반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이 일을 오래오래 사랑할 궁리를 하고 있다.

―고선경, 12월 16일 산문, 「29.9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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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5-12-31 1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콧님 새해에도 멋진 나뭇가지에 푸릇푸릇 풍성한 잎이 나는 한해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