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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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는 극심한 가난 속에 떠돌이처럼 친구들의 집을 오고 가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악상으로 작곡했다. .

그는 악상이 떠오를 때면 친구와 식사 도중에 메뉴판에도 음표를 그렸고 잠을 자던 중에 악상이 떠올라 밤새 작곡하다가 새로운 곡이 떠오르면 앞서 작곡했던 것을 다음으로 미루는 경우가 많았다.

방탕한 생활로 얻은 매독 후유증으로 인해 건망증이 매우 심해진 슈베르트는 쓰던 곡을 곧잘 잊어버린 경우가 많았고 평생 동안 자신의 피아노를 8개월밖에는 가지지 못해서 대부분의 곡을 기타로 작곡하거나 허밍으로 음을 완성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세상에 남겨 놓은 실내악곡은 악기로 연주되는 가곡 처럼 악기 특유의 음색으로 노래하듯 울린다.

애절한 선율로 가득 찬 슈베르트의 현악 오중주는 음악가들에게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듣고 싶은 곡으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장례식 때 슈베르트 현악오중주 C장조 D.956, 작품163/2악장 아다지오를 연주 해 달라고 부탁했고, 바이올리니스트 조셉 선더스는 자신의 무덤 비석에 이 곡 제1악장의 제2주제를 새겨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슈만은 때 이른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며 슈베르트 사촌 형에게 찾아가 자필 악보를 보여 줄 수 없냐고 부탁했을 정도로 듣는 이들에게 한 없는 슬픔과 애수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다.

최고의 음악가 였던 베토벤의 시대에 태어난 슈베르트는 웅장한 화음으로 가득 채우는 화려한 교향곡 보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첼로의 악기로 구성된 실내악 화음에서 악기 고유의 음색으로 침울하면서도 풍성한 소리의 화음을 완성했다.

슈베르트의 작품은 후대의 낭만파 음악의 꽃을 피우게 만들었다.

(c) Untitled Blue, Green, and Brown ,Mark Rothko,1953

색면 추상화 작품을 남긴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한 가지 또는 두 세가지 색 만으로 세기의 작품을 완성했다.

물감 몇 개와 캔퍼스 그리고 붓만 손에 쥐고 있으면 누구나 칠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어린 시절 부터 물감 섞이 놀이를 해 본 이들이 익히 알고 있는 기본적인 색의 배합만으로 완성 할 수 있을 것 처럼 보인다.

하양과 빨강의 색이 겹치면 분홍빛이 나오고 빨강과 푸른색이 뒤섞이면 보라 빛이 나오고 푸른색을 더 많이 배합하면 질흙 같은 검은 빛이 나온다.

마크 로스코는 가장 먼저 커다란 붓으로 흰 색 캔퍼스 바탕에 흰색과 갈색을 뒤섞은 밑바탕 색을 칠하고 붉은 빛을 덧칠해서 분홍빛을 나오게 하고 마지막 붉은 선홍색을 제법 큰 면적으로 칠하고 스펀지에 물을 적셔서 번지는 기법을 구사했다.

마크 로스크의 단순해 보이는 색감과 기법을 상세하게 분석 해 보면 세상에 쏟아져 내리는 빛을 시시각각으로 분석해서 기하학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c) UNTITLED NO. 17, Mark Rothko,1961

도형의 윤곽선이 뚜렷하지도 않고 경계선 조차 선명하지 않는 이 작품은 도형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도 없고 색의 조화도 그리 썩 훌륭해 보이지 않는다.

윤곽선은 뭉개져서 성기게 칠해져 있지만 묘하게도 자세히 바라 볼 수록 색의 경계선이라는 것이 무의미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크 로스코는 작품의 이름을 정하지 않고 숫자로 표기 했지만 스케치 노트에 '비극, 황홀경, 죽음' 같은 단어를 적고 나서 '황홀한 죽음'이라는 단어를 마지막에 써 놓았다.

고대 건축 양식과 연극, 음악에서 회화적 영감을 얻었던 마크 로스코는 초기 시절엔 엄격한 형식에 얽매여서 완벽한 구도를 갖춘 작품을 완성 하는데 몰두 하다 차츰 구상주의적이면서 사실주의를 표방한 회화에서 벗어나 오선지 위에 화음을 그려 넣은 음표처럼 색과 형태가 층을 이루고 차례 차례 배열되는 수직성을 갖춘 추상 주의 작품으로 발전 시켜 나갔다.

그는 붓을 들고 캔퍼스 앞에 설 때면 슈베르트의 실내악 음악을 틀어 놓고 오선지에 음표를 채워 넣는 물감을 덧칠했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감미롭게 흘러가는 선율 속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불협화음과 함께 조성이 바뀌어 버린다.

이 기법은 놀라울 정도로 마크 로스코가 색을 다루는 기법과 매우 흡사한데 강렬한 색조의 대비를 통해서 그림이 걸려 있는 장소에 따라 색의 움직임과 활력이 달라진다.

마크 로스코 그림 앞에 서면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두 가지 또는 세가지 색 사이의 경계선이 여러 층으로 겹쳐 보이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직사각형의 가장자리에서 감정이 요동치듯 일렁이는 강렬함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c)Rothko Chapel, Houston, 1971

스스로 생을 마감 한 마크 로스코는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예술은 분명 예술이 작용하는 시대의 모든 지적 과정과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크 로스코(1903-1970)

마크 로스코가 세상에 남긴 예술의 지적 영감을 받은 세기의 작가가 있다.

나는 1970년 11월 27일 생이다.

처음 내 생일을 삼촌에게 말했을 때, 삼촌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책장에서 두툼한 화집 한 권을 꺼내 왔다. 날카로운 책장에 손을 베이지 않기 위해 삼촌은 면장갑을 끼고 책장을 넘겼다.

마크 로스코라는 화가야.

삼촌이 말했다.

1903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가족과 함께 브루클린으로 망명했고 1970년 2월 25일에 죽었어. 그러니까. 이 사람이 죽던 날을 전후해서 너는 처음 생겨 났겠구나.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 중에서


작가 한강이 2005년 가을 무렵부터 구상에 들어간 <바람이 분다. 가라>는 2007년 계간지 『문학과사회』에 연재를 시작해서 이듬해 가을까지 일 년 반 동안 연재하다 다시 일 년 남짓의 시간을 들여 처음부터 새로 고쳐서 장장 4년 6개월여의 긴 시간 끝에 탄생한 작품이다.

새벽의 미시령 고개에서 사십 년이란 시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난 두 차례의 자동차 사고를 둘러 싸고 그에 얽힌 인물들의 내밀한 사연이 진실을 캐묻는 화자 이정희의 기억과 힘겨운 행보를 따라 전개되는 이 작품은 촉망 받던 한 여자 화가의 의문에 싸인 죽음을 두고, 각자가 믿는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격렬한 투쟁을 치르듯 온몸으로 부딪치고 상처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는 잠자코 그림을 들여다 보았다. 화면의 가운데가 분할 되었고 서로 다른 색채의 커다란 사각형 두 개가 바탕색을 향해 번지며 스며 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색채가 번지게 하기 위해서 붓 대신 스펀지를 쓰기도 했다고 해.

색채들의 충돌이 인간의 내부에서 스며 나오는 감정처럼 느껴진다는 것에 나는 놀랐다.

시작도 끝도 없던 혼돈이 방금 갈라져 피 흘리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그토록 단순한 구도의 비구상 화면에서 극적으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 중에서


“그날 새벽 폭설이 그 모든 흔적을 덮었다”라는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바람이 분다. 가라>는 촉망 받던 여류화가 서인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비밀을 밝히려는 그녀의 친구 이정희와 서인주의 죽음을 신화화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신전에 올리려 하는 남자 강석원의 감정의 흐름들이 과거와 현재의 시간 속에서 치열하게 충돌하고 부딪치면서 격렬한 숨과 서사의 파동으로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꿈틀거린다.

작가 한강은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매 순간 흔들리고 번민 하는 삶의 날카로운 경계 위에 서 있는 당신은 지금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살아내는 것으로 진실한 빛을 얻을 수 있는가?

이 그림을 처음 마주 하는 순간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갔다가 살짝 뒤로 물러 섰다가 제자리에 멈춰 서서 그림을 바라 보는 동안 캔퍼스를 가득 채운 색들에 서서히 스며 들어간다.

마치 성소 앞에 서서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 하듯 그저 거대한 그림의 색 앞에서 하염없이 밀려 드는 감정의 선율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전시장 밖을 나오니 바람이 불어 온다.


이 바람은 어디서 불어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리고 지금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 번의 삶에서 여러 인생을 살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디 마디 끊어지는 것이었다고,

어떤 마디의 기억들은 전생처럼 멀고 어둑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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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4-10-31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님의 작품 분위기랑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정말 잘 어울리는것 같아요! 한강의 회화버전이 로스코이고, 로스코의 소설 버전이 한강이라고 할 정도로요!ㅎ 즐건 저녁시간되십시요!ㅎ

scott 2024-11-04 18:25   좋아요 2 | URL
막시무스님 잘계신거죠!
마크 로스코 전시를 서울 페이스 갤러리에서 열었습니다
혹시 관심 있으시면 서울 나들이로 ^^

Falstaff 2024-11-01 0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슈베르트의 D.956 아다지오 악장. 오랜만에 듣습니다.
도라이 쿳시는 이 아다지오 악장 자체가 섹스라고 주장하느라 상대로 하여금 그만 김이 팍, 새버리게 만들었다지요. ㅋㅋㅋ

scott 2024-11-04 18:26   좋아요 2 | URL
퐐스타프님에게 슈베르트의 아다지오는 ㅎㅎㅎㅎ

Falstaff 2024-11-04 18:37   좋아요 2 | URL
아이작 스턴에 대한 경의지요 뭐.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