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은 노래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영어권 작가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white'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왠지 모를 반감이 들기 시작했다. 미국드라마에서 보던 다인종이 한데 어우러져 서로 교감하는 장면은 사실 지나치게 이상적인 장면이기에 반드시 도식처럼 삽입된 것이라는 감정적인 해석도 함께 왔다. 아직도 우리는 인간이기에 다 같이 서로를 존중해 주기에는 너무나 욕심이 많다. 사는 일에 욕심이 게재되지 않고 생존이 영위되는 일이 가능할까? 다 같이 고결하고 다 같이 서로의 눈을 맞추며 함께 걸어가는 현실에서 삶이라는 이야기가 진행될 수는 없는 것일까? 미국의 대통령은 단지 태어날 때의 피부 색깔 하나로 자신들의 특권을 인정해 달라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짐승 같은 소리라고 일갈하는 대신 비난의 초점을 교묘하게 이동시킴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욕망과 편견을 드러냈다.


사회적 약자의 프레임에는 수많은 판단 기준이 혼재한다. 경제,성별, 인종, 가치관, 연령. 그러니 결국 그 누구라도 완벽한 승자가 되기란 절대적 패배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항상 언제나 처절하게 지는 사람들이 한켠에 있다. 그럼에도 언제나 역겹게 끈질기게 이겨대는 그들이 있다. 욕심쟁이를 욕하는 이야기는 쉽다. 하지만 항상 지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조심스럽고 어렵기 그지없다.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는 그러한 지는 자들에 대한 성찰이다. 지고 마는 자들에 대한 연민이다. 그리고 연가다. 아름답고 처절하기 그지없는 절창에 한동안 아연해졌다.


남아프리카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백인 여성인 메리는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층, 인종에 대하여 큰 자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운이 지독히도 나쁜 농장주 리처드를 만나 늦게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불행하고 힘든 유년이었지만 비교적 순탄한 처녀 시절을 누린다.  그러나 흑인노예들의 노동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농장주의 아내가 되며 그녀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상황의 안온하고 안전한 상황에서 누렸던 자신의 삶의 연약한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며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인종을 의식하고 자신이 부리는 흑인 노예들에 감정적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외부와 단절된 시골에 갇혀 흑인 노예들에게 자신의 무력감을 해소하며 말 그래도 인간으로서도 여성으로서도 점점 나빠져 간다. 메리에게 아니 그 나라의 그 사회의 그 시간에서의 백인들에게 이미 자신들이 오기 전에 그 땅에서 살고 있었던 흑인인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과는 도저히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메리는 전형적인 백인 여성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노예를 무시하고 괴롭히고 수족처럼 부리려 드는 모습은 지금 여기에서 그 모습을 상상하는 우리를 심히 역겹게 하지만 그녀를 전적으로 미워할 수는 없는 그 무엇이 있다. 도리스 레싱은 메리를 적나라하게 그리지만 메리 안의 '그 무엇'의 이물감이 독자를 밀어내지 않도록 주도면밀하게 그녀의 모습을 조종한다. 그녀의 살갗에는 우리의 못난 모습이 새겨져 있어 그러한 것일까? 과연 그러한 사회적 압력과 제도하에서 그것에 반역할 용기와 신념이 시대와 사회의 프레임 안에 개인을 가두었을 때 쉬운 일일까?


그녀가 결혼 제도 안에서 자본주의의 열패 안에서 추락해 가며 또다른 의미에서의 약자를 하대하고 괴롭히는 모습은 분명 낯선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복합성과 모순은 생의 의지 안에 잠복되어 있어 언제 그 추한 외형을 드러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어제는 거액을 기부하고 오늘은 식당이나 가게의 직원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는 모순은 바로 한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다.


메리가 흑인 노예 모세에게 느끼는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과 거부감은 도리스 레싱의 모호하지만 아름다운 언어로 상당 부분 해석을 독자에게 맡겨버리고 만다.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메리가 모세를 증오했는지 사랑했는지 아니면 그 둘다였는지를. 비참한 최후 앞에서 자신을 결박해버린 그 처참한 배경마처 아름답게 관조해버리는 그녀의 시선은 그 자체로 모순의 결정체다. 이도 저도 아니지만 그 자체로 그게 삶이 되어버리는...삶은 언제나 언어 저 너머까지 날아가 버려 도저히 말로써 담아낼 수 없다. 언제나 저기까지 언어로 밀고 나가려하지만 그 언어의 마침표는 삶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만다.


노예 모세가 자신을 인간으로 취급해 달라는 그 당연한 요구로 그녀를 굴복시켜버렸듯 메리 또한 남편과 사회에 그 자신을 결혼 제도 안의 양순한 아내가 아닌 욕망과 꿈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해달라는 그 기본적이고 쉬워보이지만 한없이 어려운 요구를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떨구어 놓고 가버리고 만다.


그냥 머물러 있는 것. 그러다 그냥 쓸려가는 것. 메리의 슬픈 삶이 모세의 비참한 최후와 오버랩되어 잔상이 오래도록 남는 이야기에 오래도록 서성거리게 된다. 뒷맛이 씁쓸하면서도 장대한 이야기에 압도당하게 된다. 과연 오늘날은 메리의 시대에서 얼마만큼 진보되었는 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교양과 사회적 가면으로 위장하고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억압을 자행하고 자행당하며 오늘을 소비하고 있는 것인지를 성찰하지 않고는 반드시 어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지 않을까. 나도 자신이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17-08-21 0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선 너무 반가와요~~~~부비부비! 저 나비, 비비아롬나비모리입니다. 제가 모처럼 온 건데 어째 블랑카 님이 그렇게 된 듯한??ㅎㅎㅎ

암튼 이 책은 못 읽겠네요. 너무 화나고 슬프고 그럴까봐. 요즘 언급하신대로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인종주의에 더 불을 지피고 있는 현실이라~~~ㅠㅠ 뭐 세상이 이렇게 거꾸로도 돌아가는 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휴

blanca 2017-08-22 02:43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나비님 생각했었는데 왜 이리 뜸하셨어요! 막내도 많이 컸지요? 저도 요즘은 좀 뜸하게 됩니다. 시간이 참 빠르죠? 알라딘에 온 게 어언 십 년 전이라 생각하니...참 기분이 묘해요. 이 책은 강력 추천합니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첫작품이라네요. 원서로 읽으면 더 절창일 것 같아요.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 피아니스트의 아흔 해 인생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시모어 번스타인.앤드루 하비 지음, 장호연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가 들면 그 때의 그 어떤 날을, 어떤 사람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일주일 내내 행복해질 수 있었던 그 설레는 느낌은 다시 맛보기 어렵다. 생일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은 이제 그 때 내가 챙겨야 할 사람들, 준비해야 하는 일들로 채워진다. 나이가 들면 그 때의 내 앞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은 시간과 공간은 간데 없다. 대신 여기 내가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이 나를 포박한다. 나이가 들면 이제, '절대', '정말', 같은 부사앞에서는 잠시 멈칫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분명 잃게 되는 다시는 찾기 어려운 것들이 생긴다.


나이가 들면 이제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말로 내 생활 전반이 흔들리거나 누군가가 나를 부정했다고 해서 내 전존재를 무의미하게 느끼게 되거나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그대로 무릎 꺾여 다시는 일어나기 힘든 경우는 그 전보다 줄어든다. 어떤 이론이나 논리로 상황을 깔끔하게 재단하거나 일어날 일을 예견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섣부른 믿음은 저만치 뒤로 밀려난다. 지혜나 깨달음의 축적이나 경험을 통한 학습된 효과로만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물론 나의 삶을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것들만으로 내 전존재나 내 삶 전체를 조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어렴풋한 자각에서도 비롯되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나이듦과 노인이 된다는 것, 죽음이라는 그 확연한 예정된 종말로 서서히 다가서는 일, 그리고 삶.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설명하기 힘든 힘, 섭리. 그래서 아흔이 가까운 거장 피아니스트와 환갑이 넘은 시인이 나누는 <말>을 듣는 과정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을 선망으로 물들였던 <스탠 바이 미>의 그 배우 에단 호크에게 헌정된 인터뷰집이라니...


배우 에단 호크와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의 친분은 에단 호크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게 되면서 비롯된다. 둘은 할리우드와 클래식 음악계, 적지 않은 나이차를 건너 뛰어 자신의 재능과 삶을 통합하려는 그 고단하지만 의미 있는 여정에서 만나 진한 공감을 나누게 된다. 자기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과 노력, 열정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그것에 안주하거나 그것의 부산물들을 절제 없이 향유하는 대신 더 거대한 생의 과제와 영혼의 탐사, 성숙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며 나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세속적 견지에서 보는 '성공'이라는 열매는 때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치거나 그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나가는 데에 오히려 거대한 난관으로 작용했는지 수많은 예가 있지 않은가.


여든여덟 살의 노인이 30년간 은퇴했다가 다시 나와서 독주회를 열고 계속해서 가르치고 삶과 죽음, 우주를 둘러싼 그 수많은 답해지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독선적으로 자신의 논리나 아집을 강요하는 대신 겸허하게 "나는 대답이 없어도 됩니다."라고 자인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깊은 가르침을 주는 울림을 준다.


잘 늙어가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7-18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직접 겪어보면 알 수 없는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대답이 없어도 됩니다˝라는 번스타인의 말이 비트겐슈타인의 격언(˝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과 일맥상통합니다.

blanca 2017-07-19 06:45   좋아요 0 | URL
비트겐슈타인이 그런 말을 했군요. 비트겐슈타인은 꼭 도전해 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있어요. 철학도 삶도 흥미롭더라고요.
 

 당시로서는 드문 숏컷 머리, 커다란 눈, 그리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자아이가 교탁 앞에 초임 교사였던 담임 선생님과 함께 서 있던 그 날은 생생히 기억에 아로새겨져 있다. 아이들은 술렁거렸다. 그 아이는 특별했고 여느 아이들과 달랐다. 모두가 나를 포함해서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같다. 우리 모두는 그 아이를 좋아하고 때로는 선망하고 질투할 준비가 되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이 책의 도입부를 읽었을 때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특별함을 가진 아이의 등장. 그리고 내 삶으로의 진입. 그 이전과 이후는 결코 같아질 수 없다. 내가 형언하기 힘들었던 그 막연한 감정들이 차곡차곡 말로 풀어지는 느낌은 신비롭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한 것이었다. 무언가 아주 소중한 곳을 들킨 기분.

 소년 들의 우정이 속된 말로 박살 났을 때 나도 그 아이와 숱한 우정의 위기를 넘기며 그 눈부신 시절을 함께 하다 결국 맥없이 그 아이와 특별할 것도 없는 어긋남을 경험해야 했을 때의 그 시간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이 이야기의 견인은 시종일관 2차 세계대전을 둘러 싼 역사적 상황이지만 그런 구획 안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하지 않아 인상적이다. 결국 누구나 아이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우리 모두가 통과한 그 아픈 성장통의 지점이 영롱하게 형상화되어 있어 도저히 슬퍼하지 않고는 들을 도리가 없는 이야기들이 흩어져 기다리고 있다.
























관계라는 건 참 묘해서 어떤 언어의 구획 안으로 다 우겨 넣을 수는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테면 여기에서의 그녀와 빌의 관계가 그렇다. 빌은 남자다. 그녀는 여자다. 그녀는 결혼했고 빌은 아직이다. 실험실을 만들고 유지하고 때로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기기도 하고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그녀의 하소연을 밤새 들어주기도 하는 빌과의 관계는 그녀 자신의 고백처럼 세상의 관습이나 통념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가족과 함께 행복해도 어느 한켠에서 외로운 빌을 생각하면 그녀의 마음은 아프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과학자가 되는 과정에서 빌을 얘기하지 않고 그녀는 자신을 제대로 설명해 낼 도리가 없다. 모두의 이해를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과학자로서의 그녀보다 그런 평범하지 않은 관계에서의 질곡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그녀가 더 와닿았다. 과학은 때로 명쾌하지만 인간 관계는 그렇지 않다는 데에 묘미가 있으니까.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러한 한 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때로는 덧없는 인간 관계들이 과연 내가 죽고 남길 사물들보다 강할까? 라는 좀 엉뚱한 생각을 하는 중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7-07-11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서 랩걸을 무척 좋아해요. 특히 팔을 물어뜯는 여자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똑똑한 애들은 그래도 괜찮다고 심드렁히 얘기하는 장면은, 읽으면서도 읽고난 후에도 기억에 남아요.

blanca 2017-07-11 23:3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페이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소개해 주신 대로 참 좋더라고요. 대담하게 솔직한 면도 있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준 책이에요. 여성으로서 기초분야의 과학자가 된다는 것, 가정을 이루고 아이까지 낳고 남자 동료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연구소도 운영하는 과정의 힘듦, 보람 등이 와닿았어요.

레삭매냐 2017-07-1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동급생은 저도 읽었는데 랩걸이라는 책은 처음이네요. 한 번 구해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blanca 2017-07-11 23:35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 <랩걸>을 추천합니다. 일단 책장이 잘 넘어가고요. 식물의 생태에 관련해서도 알기쉽고 흥미롭게 잘 설명해서 여러가지로 흥미로운 책이었어요.
 

 올리버 색스를 처음 만난 것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였다. 신경외과의라는 자신의 직업으로 병원이라는 공간 안에서 환자들과 교감을 나누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의 글쓰기 방식에 매료되어 하나하나 올리버 색스가 쓴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어떤 계보나 체계적인 순서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전방위적으로 그의 저작들을 탐하면서 마치 그를 잘 알고 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그가 평생 천착했던 소철나무, 주기율표에 대한 조금은 엉뚱한 지적 정열과  환자들을 어떤 병리학적 대상이 아니라 함께 그들의 삶에 교감하며 환자들의 이상 질환까지 그들 나름의 삶과 통합하여 삶 속에서 강인한 회복력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 특유의 치료 방식에 감동받곤 했다. 그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을 부각시키는 오만을 경계했다. 결국 자신의 이야기로 회귀하는 그 쉬운 순환 궤도에서 그는 물러섰다. 어렵고 고되지만 결국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 가끔 궁금하긴 했다. 왜 가족 이야기는 없을까? 결혼이나 사랑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을까, 아니면 공적 자아와 사적 생활의 경계가 엄격한 사람일까?



















 이러한 의문은 그가 죽음을 앞두고 세상을 향해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대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백하게 됨으로써 풀렸다. 전이된 암으로 죽음을 경건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기고문이 세상을 향해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하여 커밍아웃한 것이라면 그가 결국 죽음 앞에서 완성한 자서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동반자를 공개한 것은 그의 자유로운 영혼 앞에서도 수많은 금기와 사회적 금제 앞에서 당당할 수 없었던 진짜 자신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공론화한 것이기도 했다. 빌 헤이스. 그의 만년을, 마지막을 지킨 그의 사람의 이름이다.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사랑이었을까? <온더무브>에서 그는 평범하지만 따뜻한 동반자로 그려진다. 올리버 색스는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는 그 흔한 로맨스 한번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던 아쉬움을 너무 늦게나마 그러나 빌 헤이스를 통해 충만하게 느꼈던 것 같다.





이 책은 전적으로 빌 헤이스가 올리버 색스와의 관계를 그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 자신이 사진 작가이자 작가인 점을 감안한다 해도 이 책은 기대이상이다. 그가 어떻게 미국의 서부를 떠나 뉴욕이라는 친절하지 않은 도시에 정착하고 그 도시의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게 되는지 아름답고 솔직한 문체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종종 들리곤 했던 매점의 이민자 출신 점원 알리의 시니컬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아흔다섯 살의 할머니가 그가 찍어준 사진의 답례로 대신 그려준 그의 한 쪽 눈의 그림을 보며 불현듯 이 구십 대의 거리의 화가에게 내 눈도 그려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열망을 느끼게 된다. 흔들리는 뉴욕의 지하철에서 한없이 흐느끼던 그 남자는 이제 울음을 그쳤을까도 싶고 깔끔하고 근사한 모습으로 알리의 담배가게에 나타나 뜬금없이 연필깎이를 찾던 청년도 궁금해지게 된다.


올리버 색스와의 추억은 절제되어 있지만 그와의 대화를 평소해 남겼던 기록을 통해 충실히 복원해냄으로써 이 나이 든 너무 늦게 사랑에 빠진 남자의 달콤쌉쌀한 시간들이 눈부시게 형상화되어 있다. 물론 빌 헤이스가 직접 찍은 특수한 뷰파인더를 통과한 것만 같은 사람 좋아 보이는 올리버 색스의 미소도 함께.


산다는 것은 상실을 품고 있어 그 뻗팅기는 서로의 자장 안에서의 긴장 관계 때문에 한없이 애달플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무의미로 수렴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살기 위해서 나아가기 위해서 죽는 그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어떤 고결함을 포기하지 않은 올리버 색스의 이야기와 그를 사랑했던 한 남자의 아포리즘은 이 순간을 조금 더 충실하고 그럴듯한 것들로 채워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뭉클해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7-22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3 0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엄마의 골목 - 진해 걸어본다 11
김탁환 지음 / 난다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마는 아직 칠십이 되지 않았고 나와 단 둘이 여행을 간 적이 없다. 엄마의 고향은 부산이지만 엄마의 소녀 시절, 처녀 시절을 함께 더듬어 갈 기회는 아직 없었다. 엄마와 딸과의 관계는 엄마와 아들과의 그것과는 또 다른 것 같다. 수많은 일상들이, 구체성이 그 어떤 추상성을, 개요를, 일반화를 내리눌러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정작 나누어야 하는 그것과는 멀어지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 대화가 많다고 해도 그것의 대부분은 생활 그 자체에 가 닿아 있어 그 사람의 본질을 오히려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김탁환 작가가 어머니와 동행하며 어머니가 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작가로서의 배아가 싹 튼 진해의 골목 골목을 누비며 나눈 그 어머니와의 진짜 대화가 눈물겹게 부러웠다.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버지와도.


진해는 나에게 낯선 지명이다. 벚꽃이 피면 수많은 상춘객들이 일부러 그 허무하게 저버릴 것만 같은 무게를 이고 빛나는 찰나를 보기 위하여 내려간다는 그곳을 아직 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고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가보고 싶은 곳이 남아 있다는 건 어쩐지 좀 덜 채워져서 조금 더 욕심을 내어도 무방할 것 같아 안심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로가 좁은 2차선인 탓에 벚나무 가지들이 허공에서 서로 만나 벚꽃터널을 이룬다. 그 하얀 터널 아래로 걸어 내려가면, 인구 10만 명에 불과한 이 작은 도시의 특별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토록 새하얀 봄길을 걸어본 사람은 인생의 정갈함이 무엇인지 안다.

-p,124



그곳은 칠십 대 중반이 된 작가의 어머니가 무려 칠십 년을 보내며 이웃의 삼대의 가족과 소통한 공간이다. 작가를 낳고 키우고 단련시켜 훨훨 날려보낸 바로 그곳이다. 아들의 글을 어머니는 다 정독했다. 아들은 글 쓰는 이야기를 노모와 나눈다. 어머니는 함부로 간섭하거나 단정하거나 조언하는 대신 묵묵히 아들을 지지한다. 백석의 시집을 읽고 그 시집에 나온 음식을 직접 요리해 보는 어머니라니... 일찍 남편과 사별했지만 여인은 아들과 함께 걸으며 누빌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을 잘 여며 두어 행복하다. 하모니카를 불며 자신이 다 없애 버린 사진 속의 젊은 남편과 어린 아들들을 추억하는 나이 든 여인은 너무 멀리 보지 말고 하루 하루를 잘 살라고 이야기한다. 이제 사라질 것임을 알고 인정하고 수긍한 겸허함이 서글프지만 눈부시다.


이 이야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개인적이거나 감상적이거나 가볍거나 통속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 균형은 작가 자신의 글 그 자체보다는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에서 나오는 것 같다. 사회 전체의 애도로 감당하기 벅찼던 이야기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형상화하는 작가는 어머니의 격려를 지고 있다. 세상에 나오기 전에 우리는 어머니의 몸과 마음을 빌리지 않았던가. 결국 우리의 이야기는 어머니로부터 이어지는 생래적 한계를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개별성을 넘어선 어떤 공통의 공동의 영역이라 어머니와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 같지만 대단히 공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진해를 가본 적도 없는 내가 그 모자의 답사에 간접적으로 행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다.


표지는 보랏빛. 어둠을 뚫고 형형히 빛나는 벚꽃에는 사실 빛이 없을진대 그것은 어둠을 뚫고 나올 듯하다. 아름다움은 그러한 것이다. 이미 고정된 고착화된 모든 한계를 스미고 나오는 것. 그것은 생의 본질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 스러질 것임을 안다 해도 그것이 무의미와 동의어가 아닌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