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게 무섭고 늙는 게 언짢다. 한 해의 말미에 이르면 그 증세는 더욱 심해진다. 추운 바람, 훌쩍 커버린 아이, 무언가 조금씩 세월의 결이 아로새겨지는 낯선 나의 얼굴, 다음 해의 달력들. 이제 내가 살아 온 시간 만큼 더 살 수 있다면 나는 완연한 노인이 된다.

 

재미있는 책, 영화, 일상의 자잘한 불평 사항들, 가족에 대한 서운함, 놀라움, 소소한 기쁨 들을 주고 받다 갑자기 '죽음'이나 '노화'의 두려움을 가지고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는 어렵다. 아니, 설사 그게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남는 것은 공감의 기쁨조차도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더 제가 죽고 나서도 완강하게 버틸 물건을 사는 지도 모른다. 그 순간 만큼은 이 물건과 영원히 살 것 같고 불멸과 손을 잡을 듯하다.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도 그러지 않았던가. 사물이 우리를 이긴다고. 그러니 소비가 반드시 지탄 받을 말한 일은 아니기를. 그것마저 아니면 죽음과 떨어질 수가 없다. 그러니 사는 일은 끊임없이 소유하려는 무용한 시도들이다.

 

 

 

 

"바이제너가 나를 위해 네가 옛날에 치던 피아노로 <나비>를 연주해 주었다. 그 곡을 듣고 내가 받은 인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도대체 단 하나의 음조차 이해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런! 물론 이 작품 속에는 눈물이 솟구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긴 하다. 하지만 특히 마지막 부분 때문에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우울해지고 말았단다. 멀어지는, 소멸해가는그 소리들은 노년의 모습이야. 해마다 하나씩 소리가 수명을 다해 사라지고, 이윽고 더 이상 우리의 소리를 들려줄 수 없는 날이 오는 거야. 자기 뒤에 긴 울림을 남기는 사람, 자신의 힘을 우수한 이들에게 물려주는 사람은 행복하겠지. 내 마지막 시간이 이 먼 속삭임 같은 것이 되기를......

-미셀 슈나이더 <슈만, 내면의 풍경> 중 

 

슈만의 어머니가 아들의 음악을 듣고 묘사한 노년과 죽음은 그녀가 아들의 음악을 듣고 그랬던 것처럼 눈물을 솟구치게 한다. 멀어지는, 소멸해 가는 소리들과 죽음으로 가는 우리의 삶을 교차시키는 그녀의 예리하고 섬세한 시선은 슈만이 왜 그토록 평범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처절하게 예민하게 자신의 내부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고통을 감지하는 촉수로 하나 하나 걸러내며 분투했는 지를 암시하는 것 같아 의미심장하다. 슈만이 언어로 도저히 채집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소리화했는지 어휘의 광대함으로 분해하고 두드리고 모으고 펼쳐 내는 저자 미셀 슈나이더의 곡진한 노력과 아찔한 재능은 이 손바닥만한 책자에서 슈만의 삶을, 인간의 유한한 삶과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예술의 그 무모하지만 한결같은 아름다운 소망을, 진정 제대로 적시에 형상화해내었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한 살을 더 먹으려는, 이제 곧 불어올 살을 에이는 바람 앞에 서 있는 모두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책. 슈만의 음악을 잘 모르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신병에 시달리며 세상에서 사랑했던 아내 클라라로부터도 점점 고립되고 자신의 내면에서까지도 추방당하는 이방인의 겉으로 드러난 삶은 주석으로 물러나고 대신 그가 노래했던 소리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그의 수수께끼를 해독하려는 그 무용해 보이고 무모해 보이는 시도들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슈만은 정신병원에 28개월이나 갇혀 있었지만 정작 그의 죽음은 자의적인 식사 거부에서였다. 그의 죽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슈만의 삶은 '죽음' 앞에 무력하게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묘사했던 죽음으로 가는 도강에서 그의 소리가 하나씩 사라지고 소거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어머니가 꿈꾸었던 죽음처럼 자신의 뒤에 긴 울림과 먼 속삭임을 떨군다. 그것은 슈만의 음악. 미셀 슈나이더가 "지상에 체류한다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부채와도 같다."고 이야기한 것을 기억한다면 슈만은 음악으로 그 부채를 상환하고 떠남으로써 죽음을 완성한다.

 

산다는 것은 자꾸 빚만 늘어가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떠날 때도 홀가분할 수 없다.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들은 또 삶 자체를 가혹한 것으로 만든다. 주어진 것들과 적당히 타협하고 적절히 수긍하는 일이란 편하지만 때로 무의미하다. 모두가 슈만처럼 살 수는 없다. 떠나고 남는 것들로 우리의 삶이 규정지어지는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며 해의 끝머리를 부여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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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마치 귓전에 들리듯이 생생하게 꿈틀댔다. 한번에 다 읽어버리기 아까워 그리고 한번에 다 감당할 수 없는 격정의 양에 질려 되도록 음미하듯 읽고 싶었다. 분명히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러나 축약본에다 아직 그것들을 듣고 보고 느낄 깜냥이 안 되었던 터였던지 막연하게 음침하고 괴이한 느낌만을 받았었다. 이제 나와 나의 삶이 충분히 숙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니 죽을 때까지도 그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악덕의 화신 같은 사내와 당당하고 도발적이었던 여인이 나누었던 불멸의 사랑을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지켜볼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날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캐서린의 친정집에서 함께 자랐다 그녀가 린턴가와 결혼함으로써 그 집에 함께 와 그녀의 딸까지 돌보게 되며 한 가문의 영락에 얽힌 사연을 지척에서 지켜보고 때로는 그 사건의 중심에 뛰어들어 결정적 증언을 하기도 한 나이 든 하녀 넬리 딘의 회고담 속에 녹아 있다. 넬리 딘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나'는 록우드라는 런던의 신사로 린턴가의 오랜 저택 '티티새 지나는 농원'을 폭풍의 언덕에 사는 히스클리프로부터 세낸 청년이다. 4마일 정도 떨어진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를 위시한 세 남녀의 기묘한 동거와 우연히 그 집에서 묵게 되어 비몽사몽 간에 만나게 된 캐서린의 유령으로 인해 록우드는 이웃집의 내력을 하녀장 넬리 딘에게 조르게 되고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폭풍의 언덕의 어쇼가에 업둥이로 들어오게 된 히스클리프의 사연을 풀어내게 된다.

 

집시의 외모로 거리를 헤매던 히스클리프가 어쇼 남매와 맺게 되는 인연은 파국의 전조가 된다. 사내애 어쇼는 히스클리프가 아버지의 사랑을 찬탈했다고 여기고 그를 몹시 미워하게 되고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 붙어 다니며 가망 없는 사랑을 키우게 되나 이웃집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반듯한 도련님 에드거와 결혼하며 히스클리프와 '폭풍의 언덕'을 떠나게 된다. 캐서린이 당시 하녀 넬리에게 독백처럼 내뱉는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은 하나의 시 같다. 어쩌면 캐서린의 이야기는 우리가 젊은 시절 소진해 버리는 그 많은 실패하는 첫사랑에 대한 하나의 소고 같아 가슴이 저릿하다. 누구나 그 때는 '그 아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유리 조각이 박히는 듯한 아픎을 느끼지 않았던가.

 

내 삶에서 가장 큰 슬픔이 그 애였여.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그 애만 있으면 나는 계속 존재하겠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라 해도 그 애가 죽는다면 온 세상이 완전히 낯선 곳이 되어버릴 거야. 내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느낌이 없을 거야. <중략> 그 애는 내 마음속에 항상, 항상 있는 거야. 기쁨을 주려고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나 자신에게 항상 기쁨을 주지는 않잖아. 그 애는 기쁨을 주려고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으로 있는 거야.

-p.132

 

히스클리프는 지금까지 보고 들어 왔던 숱한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집시 같은 겉모습에 욕설과 악담과 폭력 그 자체다. 사랑하는 캐서린과도 격앙되어 저주와 폭언을 주고 받는다. 심지어 캐서린에 대한 애증은 그녀의 시누이와의 사랑없는 결혼의 강행과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학대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는 상식적이지도 않고 연민을 자아낼 구석도 없다. 에밀리 브론테는 끝까지 히스클리프의 개과천선을 기대했던 독자의 기대를 배신한다. 그는 여전히 그다. 그와 사랑에 빠졌던 캐서린 또한 자신은 천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21세기에도 이러한 이야기는 쉽게 용인될 수 없을 것 같다. 하물며 국교회 목사의 딸로 목사관을 평생 거의 벗어나지 못했던 19세기 초의 에밀리 브론테가 그려낸 이러한 인물형이 그 당시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 도발적인 이야기를 해내었는 지 상상이 가 섬찟했다. 에밀리가 그려낸 두 남녀는 로맨스의 주인공들로도 현실의 인간형으로도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광포한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마침내 그들이 낳은 딸과 아들이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서 그려지는 저간의 이야기들은 얼마나 격정적이고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애잔한지 책장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에밀리 브론테는 '죽음'에 세상의 '관습'에 고착된 '도덕관'에 도전장을 준엄하게 내민다. 그것은 억지스럽지도 않고 역겹지도 않다. "온 세상이 그 애가 한때 살아 있었지만 이제 내 곁을 떠나버렸다는 사실이 적혀 있는 비망록"이라고 되뇌이며 죽음을 맞는 히스클리프의 죽음은 늙은 충복 앞에서 희화화되기도 하지만 흔히 '끝'이라고 여기는 '죽음'도 뛰어넘어 간직하려는 그 무모하고 무력한 '사랑'에 대한 힘과 소망을 보여주는 것같아 울림이 크다. 밝은 곳만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은 쉬운 일이다. 어둡고 음험한 곳에서 벌어지는 질투와 욕망의 잔재를 끌어모아 잉걸불을 피어 낸 그녀의 위대한 펜 끝에서 가슴이 떨렸다.

 

위대한 이야기는 감히 불멸을 꿈꾼다. <폭풍의 언덕>은 그 어떤 모든 지평과 한계를 뛰어넘어 저 너머에 살아 스스로 생명력을 발한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온몸으로 반기고 천천히 다다가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담대함은 에밀리의 실제의 삶, 죽음과도 닮았다. 그렇다면 그녀의 메시지는 시공간을 가르고 우리라는 과녁에 적중했다. 그녀는 우리가 감히 꿈꾸는 것들, 감히 밖에 내어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싸안고 펼쳐 보여준다. 그녀 앞에서 '감히'는 무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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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이 소설가의 책은 서두를 이렇게 시작해야만 할 것 같다, 왠지.) 지하철 안.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흔들리며 이 책을 펼쳤다. 제목도 제대로 모르고 단지 그가 썼다는 것만으로.

 

하지만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아기 조카가 많이 아팠다. 세상은 왜 이리 살기 힘든가, 왜 이렇게 잔인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가, 그런 질문들이 가슴을 짓이기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려던 새해의 계획을 지키지 못한 작가의 한탄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삶은 그런 것이 전부가 아닌데, 아니, 그런 것들은 일부이고 더 절박하고 절망적인 것들이 출몰하는데, 하면서.

 

아주 오랜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서면 또 마음이 아렸다. 그러니 책은 다시 좀 괜찮아지면 재개해야 할 것 같았다. 밝은 이야기들, 너스레들을 고깝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제대로 받아들이고 나도 그렇게 웃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다 읽고 나서야 나는 알아 버렸다. 결국 김연수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을. 이 책은 자신의 일상사를 미주알 고주알 되뇌이며 소설 쓰기 막간에 쉬어가는 에세이집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정말 진지한 소설가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삶이라는 그 불가해한 전체 앞에서 어떻게 쓰는 일로 많은 진실한 것들을 건져낼 수 있는 지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고. 그래서 나는 이미 그의 몇몇 소설들에 매혹당했었지만 그의 <청춘의 문장들> 앞에서 포복절도했었지만 이 진지하고도 진솔한 고찰 앞에서 다시 한 번 김연수의 팬이 되기로 굳게 다짐했다.

 

여기에는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해 핵심적인 조언이 들어있다. '어떤 작법'의 나열이라기보다는 또 꼭 소설가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이야기하는 소설을 밀고나가게 하는 그 삶에 대한 존중, 그 삶으로 열려 있는 감각의 채집에 대한 집중을 듣노라면 누구나 이런 이야기는 마흔이 넘어가는 고개에 한번 들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와닿는다. '이를테면'(김연수가 많이 쓰는 어휘라 낯익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이상스레이 그의 문체를 조금씩 닮아 가게 된다, 물론 그 수준이야 언감생심 못 따라가겠지만 말이다.)

 

가지지 못한 것들이 우리를 밀고 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이 사실을 이해하면서부터 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더 많이 원하자고 생각했다. 나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고 마음먹었다. 왜 안 되겠는가? <중략> 이 인생은 나의 성공과 실패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에 얼마나 대단한 걸 원했는가, 그래서 얼마만큼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느꼈으며 또 무엇을 배웠는가,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가, 다만 그런 질문만이 중요할 것이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p.41

 

나는 최근들어 더 이상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간절히 원하지 않게 되었다. 그냥 나이가 들어갈 수록 어떤 것을 소망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일이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때로 기만적으로 느껴졌다. 아니 솔직히 그 도정에서 희망고문으로 지치고 고생해야 하는 것이 싫고 귀찮아졌다. 그러면서 삶은 좀 덜 치열해지고 덜 실망스러워졌지만 그에 비례해 어떤 환희나 희열과도 멀어지게 된 것 같다. 이십 대에 많은 것들을 꿈꾸고 소망한 것이 때로 좀 부끄럽게도 느껴졌었는데... 김연수가 하는 말은 마치 나를 지목해서 '너 왜 이리 현실적인 척, 욕심이 없는 척 하는 거야!'라며 호통을 치는 것 같았다. 더 많이 원해도 되는데. 그런 것들이 정작 중요한데. 이루어내고 가진 것들로만 나의 삶이 규정지어지는 것은 아닐 텐데...

 

삶 앞에서 생 앞에서 심드렁해지는 것은 어떤 '~척'에 불과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김연수의 말처럼 모든 감각을 깨우고 모든 것들을 감각하고 그러한 것들을 성실하게 쓰고 하는 과정이 진짜 사는 것일진대 그것들에서 출몰하는 어떤 고통, 상처 앞에서 갑각류처럼 마음과 감각을 위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나이듦이 그러한 권태와 체념에 고개숙이는 어떤 것이라는 잘못된 오해로 '성숙'을 가장하고 있었나 보다.

 

시간은 '나'라는 일인칭의 협소한 시선을 불태우는 지옥불이다. 서사예술인 소설 속에는 이 지옥불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다.-p.245

 

 

어디에선가 가장 잔인한 심판관은 '시간'이라는 이야기를 읽었다. 살면 살수록 모든 것들을 초토화시키고 무력화시키는 '시간' 앞에서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세상이 '나'라는  무게추로 재단되고 저울질 당하던 그 생생한 시간들은 간곳 없다. 이제 '어른'이라고 '나'를 부를 수 있다면 나는 그러한 일인칭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기어나오는 중이다. 내가 어느 날 없어져도 세상은 잘만 돌아갈 것이다. 더 이상 인식하지도 지각하지도 사고하고 느낄 수도 없는데 세상은 진보하고 나의 뒤를 이어 수많은 사람들은 또 저마다의 삶의 역사를 쓰고 소망하고 절망하고 기대하고 실망할 것이다. 이 사실을 맨정신으로 정말 절절하게 받아들이고는 도저히 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나갈 수 있을 것같지 않다. 그런데, 어라, 이 작가는 가능할 것 같다.  우리의 생이 너무나 짧기에 우리의 소망을 저지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절망은 삶의 구석마다 너무 자주 튀어 나오기에 그가 이야기하는 우리의 삶은 처절한 서사가 되지만 무의미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전체로, 거대하고 장구한 그 전체에서 우리의 삶 한 귀퉁이를 볼 때 그것은 하나의 퍼즐 조각으로 분명 자리매김할 것이기에.

 

이 너무나 커다랗고 슬픈 고통으로도 그녀는 '성장'을 이야기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나는 겁쟁이다. 김연수가 '소설쓰기'로 슬쩍 '삶'을 이야기한 것은 대단히 효과적이고 유효한 일이었다. 소망과 욕망이 좌절당할 때에도 그것을 밀고 나가 삶의 이야기를 완성해 내며 죽을 때까지 쓰고 다시 쓰기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 앞에서 다시 겸손해지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그가 완독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여전히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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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은 책도 어떤 것은 다시 읽어도 처음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가까이 있는 기억들은 썰물처럼 밀려 나가고 오히려 멀리 있었던 것들은 밀물처럼 밀려온다.

 

 

 

 

 

 

 

 

 

 

 

 

 

 

 

 

 

언제였을까?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수도 있고 3학년 때였을 수도 있다. 계몽사에서 나온 파란 양장본의 <작은 아씨들>의 네 자매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는 첫 장면을 만난 날. 나는  두고두고 이 네 자매의 이야기에 매혹되어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이 첫장면으로 다시 돌아가곤 했던 것 같다. 아름답고 현실적인 메그, 사내 같이 활달했던 조, 끝내 죽음을 맞아야 했던 착한 베스, 인형 같이 예쁜 인물값을 했던 막내 에이미. 그리고 이웃집 대저택의 멋진 훈남 소년 로리의 그 찬란했던 젊은 날의 이야기들은 내가 감히 꿈꾸지만 접근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것들과 정겨운 것들의 총집합 같이만 느껴졌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우정 이상 사랑 이하의 감정을 나누었던 조와 로리가 끝내 부부가 되지 못했던 기억, 집을 떠나 전쟁터에 있었던 아버지의 귀환이 대미를 장식했던 후로 나는 두고두고 네 자매의 안부가 궁금했고 마침내 그때 다 듣지 못했던 그들의 후일담을 이제서야 듣게 됐다.

 

힘든 일들은 나의 것이기도 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것이기도 했고 나와는 너무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것이기도 했지만, 요즘은 세상에 대해 좀처럼 긍정적인 신뢰나 애정을 보낼 수 없는 참혹함을 느낀다. 편안한 일상은 너무나 허술하고 '존재'의 뿌리는 너무나 얕다. 생명은 단단하고 건전한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무력하고 때로는 무자비한 것이다. 그러니 삶이 때로 참 무섭고 처참하게 느껴졌다. 이럴진대 <작은 아씨들>의 이 동화 같은 이야기들은 하나의 안식처로도 느껴졌고 그녀들의 삶의 자잘한 고충들과 굴곡들이 더없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저 철없고 예쁘기만 한 소녀들의 좌충우돌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들이 아픔과 상처를 통해 어떻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성장하는 지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설명은 마냥 세상을 크고 단단하고 정의로운 곳으로 상상했던 시절 받아들였던 것과는 또다르게 다가왔다. 이제는 그네들의 모습도 모습이지만 네 자매를 현명하게 양육하는 엄마 마치 여사의 교육관이나 태도가 더 전범으로 다가와 줄을 긋게 되는 엄마가 되었다. 

 

"다들 어른이 되지 못하게 머리 위에다 큰 다리미를 이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조의 이야기는 '성장'이 담보하는 그 필연적인 고통과 상실에 대한 또다른 아쉬움과 슬픔을 보여주는 것 같아 절실하게 와닿았다. 베스가 죽음 앞에서 보이는 그 담대하고 의지어린 모습 또한 어렸던 내가 미처 받아들이지 못했던 대목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면서 마치 가족이 보여준 모습은 슬프기도 하지만 그 상실마저 가족의 사랑과 신뢰 속에서 담담하게 소화해내려는 노력이 엿보여 뭉클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했다.

 

많은 순진한 믿음들과 확고부동했던 신념들은 시간의 풍화 속에서 닳고 이지러진다. 그럼에도 조가 남기는 이야기는 나의 마음 속에 반향이 크다. 그것은 걸핏하면 유년, 청년기의 그 순전했던 시선들로 도피하는 나에게 향한 것처럼 느껴져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테디, 우리는 이제 소년과 소녀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 그 행복했던 옛 시절은 돌아올 수도 없고, 기대해서도 안 돼. 우리는 다 큰 성인들이잖아. 놀이 시간은 끝이 났고 이제 장난도 포기해야 해. 그 대신 각자에겐 진지하게 임해야 할 일이 있는 거지.  

 

이제는 받아들여야만 한다. 가슴 한켠에 동화 같은 이야기를 묻어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삶은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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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11-09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이 책을 읽었던 것 같아요.
`소년 소녀 문학 전집`
읽었다는 기억만 있을 뿐,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네요.

시간이 흘렀다는 게, 나이가 들어간다는 게 참 이상하고 신기하게 느껴져요.

이 댓글 쓰면서 생각난 건데,
저 어릴 때는 읽을 거리가 없어서
저 전집을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읽곤 했는데,(물론 재밌는 것만)
지금 우리 딸은 당시 나와 같은 나이인데,
읽은 책은 엄청 많지만, 주로 학습 만화만 보더라구요.

이것도 참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blanca 2014-11-10 10:58   좋아요 0 | URL
맞아요, 감은빛님! 기억하시는군요. 저도 몇 번이나 읽었는지, 읽고 또 읽고...제 딸도 지금 학습만화에 몰입중입니다. --;; 글밥이 많거나 조금 지루한 내용의 책은 잘 안 읽으려 들어 걱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작은 아씨들> 영화를 보여줬더니 관심을 많이 보이더라고요. 의외로 이 내용이 조금 초등 저학년이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는 대목들이 있어 초등학교 3학년이 지나면 한번 어린이용으로 읽어보라고 권할까 생각중이에요.

cyrus 2014-11-10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끔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를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한 달 전에 서재 책 정리를 하면서 제가 꼬꼬마였을 때 읽었던 계몽사 동화전집과 위인전집을 보니 감회가 새롭고 기분이 묘했어요.

blanca 2014-11-10 10:59   좋아요 0 | URL
cyrus님, 보관중이시군요. 부러워요. 저는 이미 다 처분해서 너무 아쉽네요. 여건만 된다면 님은 잘 보관해 두셨다 나중에 아이들과 함께 보시면 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으며 내도록 참 즐거웠다. 참, 오랜만에 로맨스 소설 읽는 재미로 생활이 아기자기해지는 느낌이 좋아 내처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 도전했다.

 

 

 

 

 

 

 

 

 

 

 

 

 

 

 

샬럿 브론테의 로맨스는 제인 오스틴의 그것과는 또다른 격정과 어둠에 대한 배려가 있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용모가 객관적인 미남, 미녀가 아님을 강조하고 나름의 태생적  결함이나 숨기고픈 과거가 있는 것 등으로 설정하여 어떤 핍진성을 얻는 부분이 분명 있다. 남녀가 사랑에 빠져 나누는 대화나 심리적 역동에 대한 묘사가 거칠고 힘이 있어 여성 작가의 한계를 뛰어넘는 비범한 에너지가 돋보인다. 한동안 소설이 가지는 비현실적인 부분에 대한 어떤 염증 같은 것이 생겨 읽기를 그만뒀던 적도 있는데 학창 시절 축약본으로 읽어 제대로 그 감동을 맛보지 못해 다시 읽고 돌아가 느끼는 즐거움, 깨달음이 알차다. 다음 번에는 샬럿의 자매 에밀리가 쓴 <폭풍의 언덕>도 제대로 읽어 볼 참이다. 그리고 소년 같았던 캐릭터가 상큼했던 둘째 딸 조를 만날 수 있는 <작은 아씨들>도. 그냥 '읽는다'는 그 행위에 충실했던 그래서 제대로 그 맛을 볼 수 없었던 거친 독서들을 이제 제자리로 돌려 놓으며 그 시간들을 다시 곱씹다 보니 한없이 그 시간들이 그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내가 읽는 것들 속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사랑도 이루어지고 모든 과하고 그릇된 것들은 제자리를 찾아가는데 현실은 대비라도 되듯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서글프다.

 

나는 언제라도 열네 살로 돌아가고 싶다. 삶 전체를 흔드는 어떤 중대한 갈림길의 선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를 둘러 싼 여러 상황이 완벽했던 것도 아닌데 '나'라는 주어는 그 시점에 가장 어울리고 가장 울림이 있는 듯한 느낌. 그러니 그 나이 전체를 지배했던 '신해철'이라는 존재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큰 상실과 다름아니다.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그의 사진을 오려붙여 스크랩북을 만들었고 엄마와 함께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는 신세계 백화점에서 그의 음반을 사들고 고속버스 터미널 건너편에서 터질듯한 가슴으로 행복하게 버스를 기다렸다. 그 마음은 정말 불꽃놀이가 막 시작되기 전의 그 설렘과 닮아 있었다. 옆에는 엄마가, 내 품 안에는 나의 우상 '그'가 있었다. 대학에 가면 나는 그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이 드는 것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즐거웠다. 나는 점점 더 꿈에 그리고 '그'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으니까.

 

날렵했던 턱선에도 살이 붙고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의 애수 어린 눈빛도 아빠 미소의 그것으로 변한 그의 나이듦에 때로 실망하고 자기 관리 운운하며 이야기하기도 했던 그 시간들이 후회스럽기도 하고 그립다. 모든 변화와 모든 이지러짐을 인간의 힘으로 거역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오만이 아직도 나에게는 남아 있었나 보다. 배움의 시간은 끝없이 연장된다. 어제 우연히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여름 그의 휴가 자리를 채워주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던 신해철의 목소리가 나왔다. 언제나 그렇듯 주저리 주저리 심지어 선곡 음악의 자리까지 파고드는 그의 길고도 정리되지 않았지만 언제나 물 흐르는 듯이 꼭 상대 1인을 향해 이야기하는 듯한 이야기들...은 마침내 끝내고 "이제 정말로 작별해야 할 시간"이라는 그의 마지막 멘트에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눈물 없이는 열네 살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나의 열네 살을 채워주었던 이가 작별을 고했으므로 다시 돌아올 자리가 없으므로. 안녕. 이젠 정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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