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게 무섭고 늙는 게 언짢다. 한 해의 말미에 이르면 그 증세는 더욱 심해진다. 추운 바람, 훌쩍 커버린 아이, 무언가 조금씩 세월의 결이 아로새겨지는 낯선 나의 얼굴, 다음 해의 달력들. 이제 내가 살아 온 시간 만큼 더 살 수 있다면 나는 완연한 노인이 된다.
재미있는 책, 영화, 일상의 자잘한 불평 사항들, 가족에 대한 서운함, 놀라움, 소소한 기쁨 들을 주고 받다 갑자기 '죽음'이나 '노화'의 두려움을 가지고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는 어렵다. 아니, 설사 그게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남는 것은 공감의 기쁨조차도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더 제가 죽고 나서도 완강하게 버틸 물건을 사는 지도 모른다. 그 순간 만큼은 이 물건과 영원히 살 것 같고 불멸과 손을 잡을 듯하다.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도 그러지 않았던가. 사물이 우리를 이긴다고. 그러니 소비가 반드시 지탄 받을 말한 일은 아니기를. 그것마저 아니면 죽음과 떨어질 수가 없다. 그러니 사는 일은 끊임없이 소유하려는 무용한 시도들이다.
"바이제너가 나를 위해 네가 옛날에 치던 피아노로 <나비>를 연주해 주었다. 그 곡을 듣고 내가 받은 인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도대체 단 하나의 음조차 이해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런! 물론 이 작품 속에는 눈물이 솟구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긴 하다. 하지만 특히 마지막 부분 때문에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우울해지고 말았단다. 멀어지는, 소멸해가는그 소리들은 노년의 모습이야. 해마다 하나씩 소리가 수명을 다해 사라지고, 이윽고 더 이상 우리의 소리를 들려줄 수 없는 날이 오는 거야. 자기 뒤에 긴 울림을 남기는 사람, 자신의 힘을 우수한 이들에게 물려주는 사람은 행복하겠지. 내 마지막 시간이 이 먼 속삭임 같은 것이 되기를......
-미셀 슈나이더 <슈만, 내면의 풍경> 중
슈만의 어머니가 아들의 음악을 듣고 묘사한 노년과 죽음은 그녀가 아들의 음악을 듣고 그랬던 것처럼 눈물을 솟구치게 한다. 멀어지는, 소멸해 가는 소리들과 죽음으로 가는 우리의 삶을 교차시키는 그녀의 예리하고 섬세한 시선은 슈만이 왜 그토록 평범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처절하게 예민하게 자신의 내부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고통을 감지하는 촉수로 하나 하나 걸러내며 분투했는 지를 암시하는 것 같아 의미심장하다. 슈만이 언어로 도저히 채집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소리화했는지 어휘의 광대함으로 분해하고 두드리고 모으고 펼쳐 내는 저자 미셀 슈나이더의 곡진한 노력과 아찔한 재능은 이 손바닥만한 책자에서 슈만의 삶을, 인간의 유한한 삶과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예술의 그 무모하지만 한결같은 아름다운 소망을, 진정 제대로 적시에 형상화해내었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한 살을 더 먹으려는, 이제 곧 불어올 살을 에이는 바람 앞에 서 있는 모두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책. 슈만의 음악을 잘 모르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신병에 시달리며 세상에서 사랑했던 아내 클라라로부터도 점점 고립되고 자신의 내면에서까지도 추방당하는 이방인의 겉으로 드러난 삶은 주석으로 물러나고 대신 그가 노래했던 소리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그의 수수께끼를 해독하려는 그 무용해 보이고 무모해 보이는 시도들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슈만은 정신병원에 28개월이나 갇혀 있었지만 정작 그의 죽음은 자의적인 식사 거부에서였다. 그의 죽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슈만의 삶은 '죽음' 앞에 무력하게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묘사했던 죽음으로 가는 도강에서 그의 소리가 하나씩 사라지고 소거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어머니가 꿈꾸었던 죽음처럼 자신의 뒤에 긴 울림과 먼 속삭임을 떨군다. 그것은 슈만의 음악. 미셀 슈나이더가 "지상에 체류한다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부채와도 같다."고 이야기한 것을 기억한다면 슈만은 음악으로 그 부채를 상환하고 떠남으로써 죽음을 완성한다.
산다는 것은 자꾸 빚만 늘어가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떠날 때도 홀가분할 수 없다.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들은 또 삶 자체를 가혹한 것으로 만든다. 주어진 것들과 적당히 타협하고 적절히 수긍하는 일이란 편하지만 때로 무의미하다. 모두가 슈만처럼 살 수는 없다. 떠나고 남는 것들로 우리의 삶이 규정지어지는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며 해의 끝머리를 부여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