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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이야기가 길어진다고 해서 다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한정된 시간, 분량 안에 집적해야 한다는 채근이 더 농밀하고 말해져야 할 것을 다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앤드루 포터는 그것을 영리하게 포착한 작가다. 구태여 덧붙이지 않아도 중언부언하지 않아도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시점을 예리하게 포착한다면 반드시 할 수 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화자가 그러했는지 아닌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로버트가 마침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으로 시작하는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어쩌면 아주 뻔한 불륜 스토리가 될 수도 있었다. 젊은 여학생과 노교수의 로맨스는 숱하게 반복되어 온 서사다. 성차, 연령차, 심지어 위계의 헤게모니까지 개입하는 이 설정은 전형적이지만 우리의 복잡하고 굴곡어린 삶의 층위의 속살을 여지없이 드러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미 많이 살아버린 사람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망을 앞둔 이의 만남은 시간이 가로지르는 삶의 어떤 단면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보여주기 좋은 장치다. 앤드루 포터는 적절하게 힘을 주고 빼야 하는 지점을 의식하며 되도록 뒤로 물러나 로버트와 '내'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많은 것들을 공유하지 않아도 나눌 수 있는 그 은밀한 교감을 독자가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만든다. 일주일에 한번 결혼할 전도유망한 남자가 있는 여자가 나이 든 교수와 절대 넘어가지 않는 그 팽팽한 선과 통념의 경계 안에서 그 누구도 이 둘을 결코 비난할 수 없게 되는 공감을 자아낸 것은 작가의 저력일 것이다.
소년의 시선으로 붕괴되는 아버지의 삶과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회상하는 <코요테>에는 설명하기 힘든 서글픈 아름다움이 있다. '회상'은 앤드루 포터 이야기의 근간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억은 독자의 허를 찌른다. 사실 그건 이랬던 거야. 라고 마치 약올리는 듯한 반전이 곳곳에 있다. 기억은 왜곡되고 현재 시점에서의 과거의 복기는 언제나 허술하고 맹탕이고 왜곡되어 있어 진실의 맹점은 언제나 우리를 가격한다. 아버지는 떠나고 어머니는 남고 소년은 성장한다.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다시 그 시간을 되돌아보면 소년은 남은 어머니보다 떠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렇게 소년은 상실을 치유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우리가 열여섯 살이던 그해 봄"을 회상하는 <외출>에서 스치듯 지나간 아미시 공동체 소녀와의 사랑은 "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우리의 대책 없음에, 우리의 눈먼 행동에 아직도 몸이 떨려온다."고 마침표를 찍게 한다. 작가는 또래 집단에서 소외되는 소년, 사회 전체적으로 고립된 아미시 공동체 출신의 소녀가 만나게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소외된 외톨이들의 교감과 성장통이 남기는 상흔을 섬세하게 형상화한다. 이 둘이 만난다고 해서 완벽하게 소통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차가운 깨달음과 함께. 뼈아픈 성장이 남기는 아련한 추억은 남아 예술이 된다.
<코네티컷>에서 어머니가 이웃 부인과 가진 관계의 색깔 또한 그렇다. 둘은 동시에 각자의 상황으로 불행했고 이 시점에서 나눈 관계는 사회적 통념에 어긋난다. 여지없이 소년은 이것을 기민하게 알아챈다. 어떤 상식, 통념, 기대를 허물어뜨리고 생의 속살을 알른알른 내비치는 앤드루 포터의 시선은 가닿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의 이야기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꼭 해야 하는 이야기,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는 언제나 새롭고 뭉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