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이라면 치를 떨며 싫어했던 내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삼십 대 중반이었다. 집앞 복지관 헬스센터의 트레이너 덕택이었다. 재미삼아 인바디를 측정했던 나의 체중 대비 지나치게 낮은 근육량에 승부욕이 발동한 (나의 추정이지만) 그녀는 거의 삼 일 동안 1:1 강습을 시작했다. 스쿼트, 런지, 부위별 근육을 키울 수 있는 각종 운동 기구의 사용법을 열정적으로 가르쳐줬다. 그 이후로 운동하는 여자가 되었다. 물론 각종 변명으로 중간중간 게으름을 피운 적도 있지만 그럼에도 운동 하고 난 후의 그 성취감과 몸의 상쾌함을 기억하기에 완전히 몸을 쉬는 일은 없게 되었다. 문제는 딱 너무 힘들 정도까지만 하고 그 이후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 이를테면 걷기도 육천 보를 걷게 되면 하루 운동량을 다 채웠다 가정하고 널브러져 있다. 근육 운동도 삼십오 분이 마지노선이다. 그러니 근육이 붙을 일은 없다. 근육이 붙기 직전에 나가떨어지니까. 그럴 때면 평생 몸을 주어진 연장이라 생각하고 갈고 닦은 하루키의 말도 생각나고 운동 하기 전의 그 저질 체력의 과거도 떠오른다. 매일매일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들의 극기와 절제는 상상이상이다. 나에게 만 보는 언감생심이다. 나는 운동에 관한 타협과 자기 정당화에 능하다.



















그러나 내 몸과 삶에 나쁜 것은, 내 작품에도 좋지 않다. 부정적인 충동은 절대 예술가의 연료가 될 수 없다. 예술가의 삶은 단 한순간 불타올랐다가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작업하고 이를 통해 인간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한 걸음씩 진보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하루에 단 하나의 점만 캔버스에 찍어나가도 10년이 지나면 나의 시간이 집적된 작품이 완성되어 있지 않을까? 단순한 비유지만, 나는 예술에서 시간을 견디는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p.120


하루에 만 보도 이만 보도 아닌, 삼만 보를 걷는다는 하정우의 이 책은 비단 걷기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물론 고작 육천 보 걷고 나가떨어지는 나에게 지금 당장 나가 걷고 싶게 만드는 뿜뿌질은 확실히 해주지만 그가 배우로서 가지는 불안감,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일환으로서의 삶의 전반적인 자세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이미 충분히 내실과 인기를 동시에 확보한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이 배우는 아직도 훨씬 더 훌륭해질 일이 남았구나, 싶을 정도로 신뢰가 간다. 무엇보다 삶에 대한 환상이나 현실 부정이 없는 기반 아래 일상의 귀중함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것은 어쩌다 한번씩 체감하긴 쉬워도 자기 삶의 주축이 되도록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정우는 이미 이 경지를 넘어선 것 같다. 고통스러운 삶의 파도가 몰아치면 가장 힘든 것이 일상의 유지다. 밥술을 뜨는 것이 힘들어지고 자기 몸과 정서에 좋은 루틴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루틴에 기반한 삶 속에서 나아가야 하는 것이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선을 넘어가는 것은 완전한 극복은 아닐지라도 그 고통을 적어도 회피하지 않고 밀고 나아가는 일이다. 


나에겐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 위기상황에서 도 매일 꾸준히 지켜온 루틴을 반복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실제로 내가 아는 한 정신과 의사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환자들에게 그게 무엇이든 루틴을 정해놓고 어떤 기분이 들든 무조건 지킬 것을 권한다. <중략>

루틴이란 내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얼마나 골치 아픈 사건이 일어났든 간에 무조건 따르고 보는 것이다. 고민과 번뇌가 눈덩이처럼 커지기 전에 묶어두는 동아줄 같은 것이다. 

-p.165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는 말이 참 좋다. 너무 힘들다 여기면 운동도 읽기도 먹는 일도 때로 힘겨워진다. 그래도 꾸역꾸역 먹고 걷고 읽어야 한다. 쓴다면 더 좋다. 일이 주어지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몸을 일과처럼 만들며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며 기다린 배우의 마음이 응원이 된다. 이제 칠천 보는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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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1-09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루틴의 중요성을 요즘 새삼 실감하는데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19-11-09 10:03   좋아요 0 | URL
강추합니다. 다락방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저는 솔직히 별 기대 없이 읽었는데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기억해 두고 싶은 문구가 많았어요. 빌려 읽었는데 살 걸 그랬어요...

moonnight 2019-11-09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 책 살까 하다 잊고 있었는데 사야겠네요@_@

blanca 2019-11-10 08:23   좋아요 0 | URL
달밤님, 사세요. 사서 읽으면 좋은 책을 빌려 읽으면 흑 난감해진답니다. 사자니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고 그냥 보내자니 다 옮겨 적을 수도 없고...

방랑 2019-11-09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열심히 걷고 있어요. 단풍도 보고 운동할 겸 집 주변에 사찰도 가고요. 책 읽을까 고민했는데 사야겠네요

blanca 2019-11-10 08:25   좋아요 1 | URL
방랑님, 저는 작년까지 걷기를 정말 열심히 하다 요새는 이래저래 변명거리가 많아져 게으름 피우고 있었거든요. 하정우가 공항까지 걸어갔다,는 소문 ㅋㅋ을 듣고 사실일까 했는데 그 대목 읽고는 그냥 말문이 막히더라고요. 걷기는 몸뿐만 아니라 내면의 근육도 함께 키우는 일인 것 같아요. 다시 가열차게 해봐야겠다, 뭐 이런 새로운 결심이 서게 되는 책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