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은 사지 않는다...
소설은 사서 읽지 않는다...
가장 먼저 처분하는 장르이다... 

이런 개별적인 명제를 가장 충실하게 논박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의 책이 있다면, 끊임없이 줄긋고 메모하고 별표까지 덧붙이게 되는 소설이 있다면, 그 대열의 중심에 김훈의 작품들을 지명하고 싶다. 그는, 나도 언젠가는 소설을 쓸 수 있고 소설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철저히 풀어 헤친다. 그는 소설가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이며 수많은 현상들을 채집하여 나름대로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언어로 하나하나 닦아내어 대중들에게 어떻게 보여 주어야 하는 지를 본능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기자 생활의 30년 내공이 그의 소설 속 언어들과 묘사들을 얼마나 치열하게 연마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근거라면, 소설가로 가는 길은 분명 극도로 험준하고 선택받은 소수들만 걸어갈 수 있다는 아주 특별한 노정이다.  

일단 '공무도하' 아주 재미있다. 사실 그간 '칼의 노래', '남한산성', '화장', '언니의 폐경' 등을 읽었는데, 작가가 워낙 관조적이고 치열한 문장들을 뿜어내는 지라 읽기에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충분히 진화를 이루었다. 물론 아무렇게나 막 읽어낼 수 없는 본연의 분위기가 있긴 하지만, 문정수와 노목희의 일상적인 대화를 읽어 가다 보면 툭툭 터지는 웃음들이 김훈도 충분히 간질간질하고 살랑살랑한 남녀 간의 분위기를 살려 낼 수 있구나, 싶어 놀라게 된다. 대중적이면서도 작품의 중량감이 진득한 이러한 소설은 분명 그의 치열한 집필 과정에서 나올 수 있으리라. 

주인공? 글쎄, 사회부 기자인 문정수가 1인칭 화자도 아니거니와 그가 사건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를 과연 주인공이라고 지명할 수 있을까 싶다. 오히려 그는 그 어떤 관조의 중심에 있고 모든 죽음들을 흘려 보내는, 모든 현상과 인간의 찌꺼기 같은 감정들을 개별화할 수 없는 한계의 중심에 서 있는, 작가 자신 같다. '공무도하'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소설은 문득 피안을 응시하는 것 같으면서 피안을 거부하는 약육강식의 현존을 감내하는 조금은 허무하고도 차가운 것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이 나의 글은 강의 저편으로 건너가지 않고 강의 이쪽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라고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런 의미에서 '해망'은 작중 인물들이 교차하는 아주 특별한 지점이다. 해망은 작은 어촌마을로 미군의 공습훈련이 이루어져 수많은 고철이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 곳이고, 매립지 기반공사가 한창으로 급격한 산업화의 표본과도 같은 곳이다. 그 과정에서의 탈인간화는 차라리 하나의 부속품 같다. 이 지명은 단순한 지명을 넘어서는 고도의 상징성을 획득한다. 운동권의 주변부에 있다 선배형사의 권유로 장철수가 삶의 또다른 근거지로 떠난 곳이기도 하고, 인명구조특공조장 소방위였다 화재현장에서 금품을 훔치고 박옥출이 귀향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고, 개에 물려 죽은 아들의 죽음을 스산함으로 받아들였던 오금자가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는 곳이기도 하며, 문정수가 군복무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해망은 출발지가 아닌 도착지로서 '에서'가 아니라 '로'가 되었던 곳. 강을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간 백수광부는 어쩌면 또다른 이곳에 정착해 또다른 비루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지 모른다.  결국 피안도 강건너 이쪽에서 볼 때만 저쪽의 가능성일 뿐, 또다른 이곳이 되면 또다른 남루한 삶이 되버린다. 해망에서처럼.  

그리고 노을에 대한 이야기,
해망의 묘사에서 노을은 몽환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해망 그 자체의 발붙일 수 없는 떠있는 느낌을 가장 극적으로 집약하여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아주 자주 등장한다. 정말 아름답고 엄정한 묘사들로.  

염전에 소금이 내렸고 소금 위에 노을이 내렸다. 바닷물이 말라가는 동안의 시간의 무늬와 그 시간 속을 스쳐간 바람의 무늬가 소금 위에 깔려 있었다. 사내들이 밀고 나가는 삽날 앞에서 소금은 노을에 버무려졌다. 소금은 노을의 알맹이처럼 보였다.  

그. 러. 나. 작가가 냉소적으로 얘기했던 강저편에는 하나의 지향점이 떠오른다. 그 지향점에는 노목희가 작업하는 책 '시간 너머로'의 저자 타이웨이 교수가 있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표준으로 내세워서 이 세계를 안과 밖,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하지 않았고, 사물과 풍경에 함부로 구획을 설정하지 않았으며, 그의 언어는 개념을 내세워서 무리하게 사물을 장악하려 들지 않았다. <중략> 그의 글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려고 떼를 쓰지 않았으며 논리와 사실이 부딪힐 때 논리를 양보하는 자의 너그러움이 있었고,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 안에 이 세상을 강제로 편입시키지 않았고, 그 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세상의 무질서를 잘라서 내버리지 않았으며...<중략> 그의 글은 과학이라기 보다는 성찰에 가까웠고 증명이 아니라 수용이었으며,  

이 아름다운 이상화된 사유의 자유스러운 기운을 떨치는 이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맹목적인 것 같다. 결국 그는 덕적스러운 인간들에게서도 하나의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사실 가장 인간들이 가지기 힘든 극복의 과제를 타이웨이 교수에게 던져내어 풀어낸 것은 그 만큼 그런 이상화된 인간형과 그러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피안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큰 탓이 아닐까? 그가 혐오해 마지 않는다는 그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가 기실은 가장 끈끈하게 맺어지고 싶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런지. 고독을 자초하는 사람들은 사실 가장 애정을 갈망하는 이들의 다른 군상이다.   

소설이 단순하게 현실의 상념들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고 몽환적인 세계에서 작중 인물들에 스스로를 투영하며 욕구불만을 한시적으로 누르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허구의 중량감으로 모든 진지한 가치를 내리누르고 말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삶에 대한 성찰(그것이 아무리 처절하고 비루할지라도) 및 그것을 넘어선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시지프스적 희구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적 성취를 얻게 되는 것이다. 김훈의 '공무도하'는 그런 지점에서 분명 빛나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가 나를 미치게 할 때 - 화내거나 짜증내지 않고 아이 마음과 소통하는 법
에다 레샨 지음, 김인숙 옮김 / 푸른육아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사람을 미치게 할 때.  

웃긴 게 사람상대하는 일을 하면서도 저 진상이 참 싫구나, 정도의 감흥이었지, 그 사람이 나를 미치게 한다는 과대 망상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사실 사람이 그것도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게 현존에 발을 담근 제대로 된 인식일 리는 없다는 게 나의 생각. 즉 내가 너무 괴로워서 내가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없어서 미치고 싶다는 표현과 다름아닌 것이 아닐까. 

그 런 데 두 돌 언저리의 나의 딸이 드디어 사람을 미치게 하기 시작했다. 정말이다. 악을 쓰며 아무 이유없이 삼십 분을 방바닥을 마구 굴러당기는 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사람이 사람을 미치게 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구나. 참을성 많고 감정 컨트롤 잘한다고 말도 안되는 자랑을 마음 속에 품었던 내 자신을 이제 다시 검토해 볼 때가 왔구나. 나는 다 혈 질이었던 것인가? 

그 때 내 맘을 그대로 표현한 이 책 제목이 왔다. 의역이 아니었다. 직역이었다. 제목이 다분히 선정적이고 상업적으로 보이지만 이 책 내가 읽어 본 육아서 중 가장 통찰력 있고 섬세하며 현실적이고 실효성이 있다. 일단 작가가 한없이 너그러운 엄마상을 강요하지 않고 감기 걸린 아들 둘을 일주일 동안 집에 가둬놓은 상태에서 너그러운 엄마를 요구할 수는 없다고 외치는 부분은 정말 엄마가 된다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연관된 상황에서는 늘 통찰력을 갖고 섬세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부모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바로 '인내'다. 자신의 성장에 대해 나름의 시각이 있는 아이는 한 명도 없다. 아이가 나름대로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은 현재뿐이다. (89쪽)  

 
   
싸이에 육아가 행복해 죽겠다고 올려대는 얄미운 친구들은 나에게 육아의 핵심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행복은 고통어린 인내의 저 끝 지점에 있었다. 육아의 핵심은 인내다. 정말 극렬하게 동감한다.
     
 

기다리는 것은 수동적이거나 무관심한 것과는 다르다. 아이의 성장에 관여하지 말고 물러나 있으라는 뜻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기다림이란 성장에 꼭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을 철학적으로 인식하라는 의미다. 또 아이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단계에 머물러 있을까봐 전전긍긍하며 불안해 하지 않는 태도다.(90쪽) 

 
   
육아가 힘든 것은 이 상황이 지속될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언제까지고 밤에 여섯 번씩 깨서 울어댈 것이라고 상상해 보라. 이보다 더한 공포 영화가 있을까? 
   
 

어리고 약한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해하고, 나와 아이 모두에게 얼마나 많은 격려가 필요한지 알았더라면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이 훨씬 편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 내 딸은 물론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어린 시절의 나까지도 고통에서 벗어나 안도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197쪽) 

 
   
이 문구 만으로 나는 충분히 위로를 받았다. 감사.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어야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확신이 설 때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329쪽) 

 
   
 맞아.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을 테니까.
   
 

어린아이의 성에 대해 가르칠 때는 사실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말고 올바른 가치관과 태도까지 가르쳐야 한다. 우리 어머니는 자위행위를 아주 명확하게 정의해 주었다. 정상적이고 즐거운 일이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말이다.(353쪽) 

 
   
   
 

어떤 관계에서든 중요한 것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강요나 선입견 없이 자연스럽게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374쪽) 

 
   
 이 책은 단순한 육아서가 아니다. 이런 대목 너무 근사하지 않은가?
   
 

부모란 어머니날을 맞아 꽃과 근사한 카드를 받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사랑만을 외치는 달콤한 배경 음악 같은 것도 아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부모 노릇이다. 부모 자식의 관계야말로 신의,책임,헌신 같은 말들이 완벽하게 통하는 관계이며 그런 관계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기쁨이 곧 진정한 기쁨이다.(413쪽)

 
   
육아는 정말 힘들지만 한 번 걸어가 볼 만한 가치 있는 길이라는 격려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 준 사람은 바로 이 책의 저자 에다 르샨이다. 엄마는 무조건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대한 경이로운 감정으로 아이가 이뻐 죽겠다고 비명을 질러대며 살아야 자애롭고 모성애 어린 정말 엄마라는 작금의 분위기는 그렇지 못한 나 같은 엄마에게 괜한 죄책감을 조장하고 있다. 애가 항상 너무 이뻐서 감격어린 것일 수는 없다. 무엇보다 전두엽이 완전히 성숙하지 못해 자제와 절제를 모르는 그 어린 생명체를 하루 종일 끼고 의식주를 해결해 주고 놀이까지 동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모랄까 참으로 지치고 단조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견디는 것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는 경이로움이다. 내가 생명 하나를 탄생시켜 하나의 어른으로 키워내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각성 같은 순간이 찾아오면 갑자기 사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내 앞의 작은 생명은 하나의 기적의 표본으로 보인다. 이 책이 여느 육아서와 다른 것은 아이 입장도 중요하지만 양육자로서의 엄마의 어린 시절의 결핍을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 아이를 돌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복원해 가는 과정. 아픔을 치료해 가는 과정. 그럼으로써 나는 과거를 다시 되살려내 불가능할 것만 보이는 바로잡는 과정을 시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육아의 기적은 바로 거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관촌수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솔직히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 수많은 방언들, 토속어들, 주어를 찾으려 두 번정도는 다시 읽어야 겨우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만연체의 문장들. 지극히 남성적인 거칠고 투박한 묘사들.  

한국 문학의 금자탑으로 추앙받는 이 연작 소설이 나에게는 사실 뒤이어 쏟아져 나온 수많은 성장 소설들에 물려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리 상큼하지도 대단하게 여겨지지도 않아 조금은 심드렁하게 읽혔다면 무식의 자랑이 될까, 오만이 될까. 

이 소설은 흔히 그렇듯 작가의 실제 성장기에 가깝다고 한다. 70년대에 씌어진 작가의 유년시절을 보낸 관촌에서 측근들(특히 이 측근들은 대체로 식모, 머슴 등 그의 기준에서는 하층민이다)과 어우러져 겪은 수많은 추억들에 대한 회상이다. 그는 특히나 상주목사의 증손자로서 한산이씨의 명문 거족의 후예라는 것을 할아버지의 얘기를 풀어가며 고백하게 된다. 평론에서 언급됐듯 그에게 은연중 유교질서에 대한 선망이 아로새겨져 있는 듯한 것이, 어린 나이임에도 하대하며 지내는 주변 인들에 대한 관찰기에 우리는 은연중 계급의식이 고착화되어 있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70년대라는 산업화의 질주 환경 속에서 가지는 이 작품의 의미를 복원할 수 없는 나의 한계가 이 작품의 무게를 제대로 달 수 없게 하는 것 같다.

여하튼 이 책을 다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수많은 토속어와 순우리말들을 건져올린 것에 의기양양하련다. '이슬바심'이라는 예쁜 말을 훔치면서. 

이슬바심 : 이슬을 맞거나 이슬이 내리는 풀섶을 헤치며 걷거나 일을 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머니의 죽음 - 수전 손택의 마지막 순간들
데이비드 리프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데이비드, 여기 있니?" <중략>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어머니가 한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이것이 어머니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중략> 죽음을 그 어떤 것보다 두려워했던 어머니는 그것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고 몹시 괴로워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어머니는 간호조무사에게 몸을 기댄 채 말했다. "내가 이제 죽나 봐요." 그러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중략>죽음은 쉬웠다. 여느 죽음 같았다는 뜻이다. <중략> 이 멈춤은 영원이 되었고, 어머니는 존재하기를 멈추었다.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나는 새벽 한 시에 절대 한번에 다 읽으려 하지 않았던 얇은 책을 다 읽어 버리고 그 앞에서 입을 틀어막고 울고 있었다. 그리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어떤 책도 그 어떤 사람의 말도 나를  타자의 경험 앞에서 나를 이토록 흔들지는 못했다. 감히 이 책을. 나는 모두가 읽었으면 좋겠다고. 정말 그랬으면 한다고 욕심을 부려 본다.  

수전 손택의 외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어머니의 골수이형성증후군 발병 소식을 듣고, 또 그것을 이성이 신앙이었다는 자신만은 항상 특별하다고 믿어 왔던 그녀의 투병과 마지막까지 죽음과 화해하지 못하고 슬프게 간 어머니에 대한 회한을 놀랍도록 담담하게 하지만 순간순간 여지없이 흔들리며 적어내려 간 <<어머니의 죽음>>. 

데이비드 리프는 수전이 열아홉에 낳아 스물다섯에 남편과 이혼하고 양육비도 거부한 채 홀로 키운 특별한 아들이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리 따사롭지 않았고 그녀의 눈물을 많이 흘리게 한 과거에 대한 죄책감을 고백한다. 누구나 가까운 사람이 죽게 되면 남게 되는 가장 지배적인 감정은 죄책감이다. 그의 말마따나 주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고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순종 그 자체인 삶만이 죄책감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덧붙여 그가 인용하는 키에르케고르의 말. 그 말. 꼭 꼭 챙겨두고 싶다. 인생은 회고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지만, 사는 것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고. 주변 사람들의 죄책감을 다 한데 그러모아 흩어놓고 가신 할머니의 죽음. 나는 지금도 할머니가 치매로 정신이 온전히 못하셨을 때 내가 해드리지 못한 최선을 생각하며 가슴을 친다. 그렇게 가실 것을 알았다면 나는 그 분에게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시간들을 살아서 정말 고통스럽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고 싶은 그 마음은 데이비드 리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어머니였을까......데이비드 리프의 이 말은 언어가 얼마나 많은 역사를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이 한 문장 만으로 그 모자 관계의 대부분이 그려진다면 오만일까. 평생 가치에 집착해 자신마저 객관화시키느라 자신의 글도 "나의 글"이 아닌 '그 글'이라 불렀다던 그녀. 책에 하도 밑줄을 그어 대 종국에는 그 책을 읽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까기 이르게 했다는 그녀. 죽음 앞에서 "내 생전 처음으로, 내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구나."라며 절망했다는 그녀. 유방암 4기와 자궁육종까지 완벽하게 극복해 내어 급성 백혈병으로 전환된다는 골수이형성증후군도 그런 식으로 치료를 저돌적으로 받으면 이성의 힘으로 극복가능하다고 끝까지 믿고 자신의 몸을 각종 시술에 만신창이로 만들었다는 그녀. 그녀의 아들 데이비드 리프.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끝까지 지키고 거짓 희망의 응원군으로 자신이 역할을 자리매김 한 것에 끊임없는 회한을 드러내었지만, 그는 수전 손택의 아들이었다. 둘은 정말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없었고, 수많은 감정들을 꼭꼭 숨겨두고 겉도는 언어들로 위장한 서글픈 모자 간의 대화를 이어 나가야 했던 그런 관계였다. 그의 극도로 절제된 감정 표현과 논리가 마구 디밀어 대는 듯한 글의 분위기가 사뭇 어머니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뉴욕에 새로 세워지는 건물들을 보면서 "저 건물 어머니가 얼마나 싫어하셨을까......", "저런, 어머니가 저걸 보지 못하시다니......."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그가 얼마나 쏟아지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절제하고 있는 지를 느낄 수 있어서 역설적으로 더 슬펐다.  또한 그가 제도판에 어머니가 죽는 날까지 성취하고자 했던 목록을 작성해 보기도 했으며, 그러다 그의 머릿속이 온통 죽을 때까지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대목은 그가 결국은 수전의 못다한 성취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열망이 깊은 곳에 침잠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인생은 스스로 인용문투성이라고 자조했던 수전은 끝까지 죽음과 화해하지 못하고 힘겹게 죽었다. 오히려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열망하나로 인생 전체를 불태웠던 그녀의 삶의 방식이 존재 자체를 무로 태워버리는 죽음과 병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 누가 자신이 이 세상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아 세상 모든 것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라는 가장 명확한 종결에 고상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나도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을. 수많은 할 일의 목록을 작성하고 쓸 글들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던 그녀가 갑자기 인생의 3막은 없이 바로 퇴장이라는 선언 앞에서 담담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녀의 삶의 집착이 추했다고 판단해 버릴 수 있을까? 데이비드 리프의 회고가 빛을 발하는 것은 그것은 누구나 목도할 수밖에 없는 사랑하는 이와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 또 자신이 맞아야 하는 죽음에 대하여 뼈깊은 성찰을 할 수밖에 없는 그의 목소리 때문이다. 그는 울부짖거나 성토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술하려 노력하며 군데군데 죽음이라는 그 잔인한 명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툭툭 뱉어내는 것이 오히려 독자들의 약한 감정의 둑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도록 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유한한 인간이라는. 누구나 비참한 최후와 종국에는 맞닥뜨릴 수 밖에 없다는.

죽음을 항시 의식하면서 살 수만 있다면. 삶은 역설적으로 순간 순간이 빛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장 어제 이 책을 읽고도 나는 순간 순간을 권태와 싸우고 있다. 수전이 그렇게나 처절하게 고파했던 시간들이 한데 뭉뚱그려져 나에게 와 있는데도. 그래서 나는 그녀처럼 특별할 수 없지만. 수전을 존경하고 감히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고 고백하고 싶지만. 그녀의 삶이 스스로에게도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안 이 순간 나는 그 특별해지고자 하는 해괴한 욕망과 이별을 고하고 싶다. 그리고 다만 데이비드 리프도 부러워 했던 죽음과 화해했단 그 사람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죽음을 앞두고 썼다던 수많은 연작시 중 데이비드가 인용한 그 대목을 나도 재인용하면서 마침표를 찍고 싶다. 나도 그가 너무 부러우니까. 나도 그 불가능하지만 황홀한 명제. 죽음과 화해하고 평화롭게 이 세상의 마지막 문을 닫고 싶으니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 아무것도 잘못될 게 없지. 이제 나는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지저귈 지빠귀의 노래도 즐길 수 있다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인의 고통>>은 사진 이미지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전쟁을 다룬 책입니다. 제게 있어서 이 책은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중략; 한국의 독자들에게>

시뮬라크라(유사현실)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세상에서의 사실은 이미지의 파고 속에서 미디어가 전하는 왜곡된 현실이거나 이미 가공자의 해석과 관점이 주입된 가상 현실로 그것을 현실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대중의 숙명이라면. 지금 이 책을 당장 읽고 그 부패된 껍질을 부리고 쪼아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여기서는 물론 미디어의 영상물보다는 피사체를 조준하여 순간을 가두는 사진에 관하여 집중 논의한다. 특히나 유명한 사진기자들의 전쟁참사나 제 3세계의 기아, 혹은 끔찍한 살인,사망 장면을 찍은 고통을 충격적으로 재현하는 자극적인 것들을 생산해 내고 소비해 내는 대중들의 심리를 관음증, 혹은 책임 방기, 무관심, 덤덤함 등의 딱딱한 반응들에 대하여 자세히 관조한다.  

그녀는 사진은 무언가를 배제하며 구도를 잡는다는 작업으로서 골라낸 이미지로 이미 출발부터가 전혀 객관절일 수도 중립적일 수도 없다고 판단한다. 즉 타인의 고통을 자극적으로 이미지화해 충격을 소비하는 데에 익숙한 소비자에게 척 내미는 행위 자체 그것이 피사체에 대한 조준, 사진 촬영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참조점을 규정해 놓으며, 특히나 집단적 기억의 기록물로서의 사진은 이것은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라고 우리의 정신 속에 꼭꼭 챙겨두는 약정이라는 그녀의 해석은 충격적이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기억이란 모두 개인적이며 재현될 수 없다는 그녀의 명제에 철저히 반하는 것이니 만큼 집단적 기억이라는 것 자체에 대하여 그녀는 이데올로기의 구체화에 대한 구역질 나는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다. <<은유로서의 질병>>과 상통하는 부분으로서 국가,사회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조잡하게 가공하여 수동적인 반응기제를 학습한 대중들에게 그들의 통치 논리를 구체화하는 도구를 교묘하게 활용하는 것을 그녀는 극렬히 성토한다.  

한편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이미지에 대한 개인적 반응에 대한 그녀의 예들과 해석이 충격적이면서도 와닿는다. 잔인한 처형 장면이나 고통에 허덕이는 이들의 사진이 몇 편 실려있긴 했지만, 가장 충격적이어서 그 잔영이 밤잠까지 어수룩하게 만들었던 것은 <백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1905>이었다. 몽고왕자를 암살한 혐의로 능지처참당한 중국청년이 사지가 다 절단되고 피를 흘리며 고개를 위로 젖혀 눈을 치뜬 채 살아 있는 모습은 바타유가 그 사진을 서랍 속에 평생 간직하고 '황홀하기 그지없으면서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 이미지, 고통의 광경을 담은 이 이미지는 평생 나를 사로잡았다.'는 표현에 이르러서는 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보이는 이 반응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나, 예술이라는 미명아래 이런 고통을 은근히 통렬히 즐기는 모습들이 다 용인되고 용서될 수 있는 건가? 라는 연쇄적인 답없는 질문들에 숨이 막혀 버린다. 더 나아가 '능지처참'이라는 처벌.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처벌할 권한이 어디까지 용인되고 이해되어야 하나?라는 질문까지 확장된다.  

한편 그녀는 이런 고통의 이미지에 무감각한 인간들에 대하여도 고까운 시선을 보낸다. 냉담한 것으로, 혹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무각각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분노의 감정, 좌절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라는 그녀의 해석은 도발적이기도 하고 타당하기도 하다. 그럼 연민은 어떠한가? '동행', '긴급탈출 SOS'를 보는 사람들에게서 올라오는 연민이라는 감정은? 그것은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으로서,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과 무고함을 보여주는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녀의 해석이다. 사실 요즘들어 나는 금전적으로, 혹은 건강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나의 반응이 혹시 이런 것이 아닌지 자꾸 되돌아 보게 되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우려고 드문드문 시도중이다. 그 현실에 어느 정도 적극 뛰어들어야 나의 죄책감이 좀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의도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고통을 담보로 나의 안위를 자족하고 연민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으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 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미지로 뒤덮인 세상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특권적인 이미지가 실종하게 된다고 한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이런 세상 속에서 스스로 이미지가 되기를 갈망한다. 현실은 위신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재현만이 남게 된다는 것. 

이 책의 말미에는 그녀가 2003년 12월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받고  그녀가 행한 수상 연설 등을 포함한 몇 편의 에세이가 더 실려 있는데 그것에서 가져오고 싶은 수많은 문장들이 있다. 특히나 그녀의 수상 연설은 자국인 미국을 통렬히 비판한 아주 용기있는 지성인의 역할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어 심금을 울린다. 남을 욕하는 것은 쉽지만, 자기를 밖에 내놓고 비판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부분이다.  특히 낡은 것과 새 것에 대한 그녀의 얘기는 그 하나로 아름다운 시구 같아 인용해 둔다. 

   
  <중략> 낡은 것 안에는 우리의 과거, 우리의 지혜, 우리의 기억, 우리의 슬픔, 우리의 현실 감각이 모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중략> 새 것 안에는 우리의 활기, 우리의 낙관 능력, 앞뒤 가리지 않는 우리의 생물학적 열망, 화해를 가능케 하는 치유 능력으로서의 망각 능력이 모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학의 임무는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것이며 또한 문학은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라는 주장은 문학의 지평이 얼마나 치열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말들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울대를 더듬으며 흩어져 나온, 결국은 그녀의 호흡같은 그녀의 말들. 그것으로 맺고자 한다. 

현대의 희망, 현대의 윤리적 감수성에 중심이 되는 것은 비록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탈선이며, 비록 얻기 어렵긴 하지만 평화는 규범이라는 확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