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덴바덴에서의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3
레오니드 치프킨 지음, 이장욱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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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눈을 떴는데, 그녀는 그 눈빛에서 아침에 보았던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어떤 우수였다. 그녀는 그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스러운 울음이 그녀의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그녀는 서재를 나와 그녀의 방으로 가서 고개를 작업용 탁자에 떨어뜨린 채 눈물이 흘러나오도록 잠시 두었다. <중략> 

그러나 이제 슬픔 자체가 되어버린 여자는 무릎을 꿇고 이 내방객들의 숨소리를 제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중략> 

아, 어디에서부터 얘기를 풀어가야 하나.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초등학교 5학년 때쯤 교보문고에서 서서 '죄와 벌'을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친구들을 한참이나 기다리게 한 원죄가 섞인 기억만 있을 뿐, 별다르게 그 작품에 대한 감동도 기억도 없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 겠다. 고등학교 때 노총각 문학 선생님이 약간 변태스러운 눈빛(우리들은 대체로 그렇게 느꼈다)을 번득이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위대함을 강변했던 기억 정도가 덧붙여질 수 있겠다. 그는 줄치며 읽는 소설이란 이런 것이라고 몸을 떨며 외쳐댔었지. 그 후로 그 선생님과는 별개로 줄치며 읽어야 하는 그 소설에 대한 일종의 꼭 읽어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줄곧 따라다녔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의무감이 그 작품을 의도적으로 멀리하게 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결론은, 아직 그것을 읽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절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  

이 소설은 픽션과 사실이 혼재하는 메타픽션 장르라고 한다. 그 기법이 대단히 도발적이고 문체가 세련되서 전문적으로 소설작법을 치열하게 공부한 작가의 작품인 듯 보이나, 기실은 유대계 러시아인으로서 생전에 단 한 번도 자신의 소설을 출판해 보지 못한 치프킨이라는 불운한 작가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의사이다. 20세기의 작가(화자)는 레닌그라드로 가는 기차 안에 앉아 재혼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내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페테르부크를 떠나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가는 여정에 3인칭 시점으로 동참한다. 이 경계는 굉장히 모호해서 작가의 자전적 얘기와 페쟈(도스토예프스키의 애칭 이하)의 얘기가 혼재되어 흔히 말하는 '서술의 일탈'(해설 인용)을 노출함에도 그것은 어떤 오류로 보인다기보다는 몽환적인 시의 잔영을 떨치는 듯한 마력이 있다. 이것은 나의 얘기, 저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얘기라고 친절하게 구획을 지어주는 대신 그는 끊임없이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을 왕복하면서 어쩌면 그 둘의 삶을 의도적으로 섞어 버린다. 이런 서술은 자연스러운 결론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의도적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치프킨의 유대인을 경멸했던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경배의 노래는 이렇게 둘의 비애어린 삶을 결국은 한데 뭉뚱그림으로써 완결되었다고 보여진다면 무리일까.  

페쟈의 여정은 그의 다혈질적이고 나약한 성격에서 비롯된 도박에의 중독, 간질발작, 러시아의 주류문단에 대한 소외감에서 비롯된 분노, 거기에 더한 안나에의 집착어리고 열등감어린 애정들이 사물과 사건들에 투영되는 과정이다. 수전 손택은 무엇보다 이 여정이 부부애로 집약된다고 결론지었는데, 페쟈의 속기사로 들어왔다 그의 두번째 아내가 된 안나의 유약한 성격과 남편의 파멸에의 은근한 방관자로서의 모습은 무언가 아쉬우면서도 아름다운 비애가 서려있는 것이며,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판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녀의 옷가지까지 저당잡히는 페쟈를 그저 울면서 지켜보는 이 여인의 모습은 앞서 인용한 폐자의 임종 앞에서 슬픔 그 자체로 화한다.  

모스크바의 박물관의 '시스틴의 마돈나'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그 위에 올라가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며 주위의 경악어린 시선을  끌어모으는 페쟈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화랑의 방문객들이 앉아서 쉬거나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는 다른 의자들과는 달리, 왠지 거기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의자는 화랑의 직원을 위한 것이거나, 어쩌면 의자 자체에 뭔가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그래서 그랬기 때문에 페쟈는 뻔뻔스럽고 터무니없게 그 의자에 척하니 두 발을 올려 놓고 직원이 제지하든, 또 거기에서 파생되는  어떤 굴욕감이든 이겨내고 그 한계를 넘어야 했다. 그것은 폐자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였다. 다수의 관념, 그것에서 파생된 관습, 그 관습이 만들어낸 말, 말, 말. 상징적으로 소묘된 이 대목은 그 내포한 많은 의미들을 차치하더라도 페쟈의 귀여운 오기가 상상되어 웃음짓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있다. 상상해 보라. 머리가 까진 중년의 눈이 퀭한 남자가 갑자기 푹신한 안락의자를 끌어다 그 위에 번쩍 올라가 고작 그림을 열심히 보고 있을 모습이라니. 

옆의 그림이 페쟈가 그렇게 쇼를 하며 감상한 그림이고 죽기 얼마전 지인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라 생각해 복사본을 선물하고 지금까지 그의 임종을 맞은 그 소파 위에 걸려있다. 

사실 이 그림이 의미하는 상징과 페쟈의 선호를 연결지어 분석할 만한 지적 소양이 없기에 그저 이 그림을 들여다 보고 그가 임종 직전에도 무신론적 삶과는 달리 복음서를 애타게 찾아 안나에게 읽어달라고 했던 사실과 견주어 그가 신을 조롱할 거리를 찾지는 않았다는 정도로 마무리 짓고 싶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대목은. 서두에 인용한 페쟈의 죽음 대목이다. 안나는 페쟈가 그녀에게 어렵게 구해줘 함께 먹었던 포도를 그 때 그처럼 어렵게 구해 그의 입 안에 한 송이 한 송이 넣어주며 그의 회복을 염원한다. 마치 그 한 송이 한 송이에 생명줄이 달린 듯이 눈물을 목 안으로 넘기며 그랬을 안나의 환영이 떠오르고 페쟈의 거친 숨과 계속되는 각혈로 물들은 목언저리의 피들과 그리고. 그리고. 또 눈물 흘리는 나. 그는 알았을까? 평생을 빚과 도박과 따돌림과 간질로 시달렸던 그가 사후에 그렇게나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을 줄을. 또 그는 알았을까? 이렇게 폐자의 궤적을 따라가는 쓸쓸한 여정을 그 어떤 지원도 없이 홀로 치루어 냈던 그의 책이 결국 사후에 발간되고 문단의 극찬을 받았을 줄을. 결국 이 둘의 삶은 하나인 것이다. 현실적 한계를 딛고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냄으로써 지고의 진리에 합치되는 그 지점에이 처절한 희구. 그것은 둘 다 공교롭게 사후에 완결된다.  

수전 손택이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며 창조적인 성취를 이룬 작품에 포함시키고 싶다고 극찬했던 이 유명하지 않은 소설에 나는 지극한 찬탄과 감동어린 눈물을 바친다. 그리고. 페쟈의 예술을 대가로 처절하게 휘저어진 정돈되지 못한, 정당화되지 못하는 그의 삶에도 후대의 독자들을 대신해 진심어린 공감과 이해의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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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사생활 아이의 사생활 시리즈 1
EBS 아이의 사생활 제작팀 지음 / 지식채널 / 2009년 7월
구판절판


우뇌는 감성적.직관적.비언어적.시공간적이고, 좌뇌는 논리적.이성적.언어적.수리적.분석적인 틍징을 갖는다.-29쪽

두 돌쯤 된 아이는 다른 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재미있어 보이면 서슴지 않고 그것을 빼앗는다. 상대방이 장난감을 뺏기지 않으려고 울어도 개의치 않는다. 자제력을 결정하는 것은 전두엽인데, 이 시기의 아이에게는 아직 전두엽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인내하고 참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34쪽

기분 좋은 것을 좋아하는 뇌는 또 한 가지 비슷한 특징이 있다. 뇌는 '긍정적인 생각'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은 신경회로를 활짝 열고, 새로운 회로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회로 간 흐름을 방해하거나 억제한다. 뇌는 부정적인 생각을 싫어한다. 서유헌 교수는 뇌에서 감정을 관장하는 곳 변연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변연계는 이성적으로 사고하거나 사건을 해석할 때 거치는 여과장치 같은 곳이다. 슬픔에 빠졌거나 우울증에 빠졌을 때는 부정적인 여과장치를 통과한다. 변연계가 부정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사건을 자꾸 부정적인 쪽으로만 생각한다. 부정적인 사람과 대화하면 자꾸 부정적인 방식으로 작동되는 게 이런 원리다. 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것은 변연계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51쪽

아이의 애착 형성을 돕기 위해 다음 몇 가지 원칙을 기억하자. 첫째, 아이의 요구에 민감하고 즉각적이고 일관성 있게 반응할 것. 둘째, 몸과 마음을 다해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할 것. 셋째,신체접촉 놀이를 많이 할 것. 넷째, 엄마 스스로 자신감과 소신을 가질 것. 특히 넷째 항목은 엄마가 잊기 쉬운 부분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하루에도 열두 번 자신의 행동에 회의와 의문이 든다. 하지만 아이를 부모만큼 오래 관찰한 사람은 없으며, 부모만큼 사랑스럽게 관찰한 사람도 없다. 아이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자료와 사랑을 가진 사람은 바로 부모임을 기억하라. -57쪽

피부의 신경세포는 풍부한 신경회로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피부로 전달하는 정보는 아주 미세한 자극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감각을 이용하는 것보다 금방 뇌로 전달된다. -59쪽

그런데 이 시기(만1~2세)는 뇌의 어느 한 부분만 발달하는 것이 아닌 만큼 한쪽으로 편중된 학습을 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언어 교육만 무리하게 시키거나, 그림책만 많이 보여주는 것은 두뇌 발달에 좋지 않다. 이보다는 하나를 가르치더라도 오감을 모두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62~63쪽

뇌에서 신체기관을 관장하는 부분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것이 손을 관할하는 부위다. 따라서 세밀한 손작업을 많이 시키면 아이의 뇌도 함께 발달한다. (중략) 이런 식으로 왼손과 오른손을 모두 사용하면 좌뇌와 우뇌의 발달이 고루 이루어진다.-64쪽

만3~6세는 대뇌피질의 전두엽이 집중적으로 발달하는 시기다. 전두엽은 종합적인 사고 기능, 인간성, 도덕성, 종교성 등 최고의 인간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부위다. (중략) 세살배기의 뇌 활동량은 어른 뇌의 2배로, 이처럼 어른보다 바쁜 뇌활동은 아홉 살에서 열 살까지 유지된다.(중략) 아이의 뇌가 이토록 분주히 움직이는 까닭은 그만큼 연결해야 하는 시냅스가 많기 때문이다.-66쪽

서유헌 교수는 이 시기에는 전두엽의 기능인 사고와 정신 발달을 촉진하는 교육에 중점을 두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많은 지식 정보를 입력하는 것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는 붉다'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붉은 과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붉다고 모두 같은 색일까?' 등 아이의 사고가 커질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67쪽

아이들은 사회적 규약을 무의식적으로 배운다. 누구를 통해서일까? 아이는 부모의 행동을 굉장히 의미있게 받아들인다. 이것은 생각보다 놀라운 사실이다. 인간은 절대로 조작할 수가 없다. 가장 불행한 아이는 부모가 그 아이를 조작해서 만들어내려고 할 때 생긴다.-70~71쪽

사람의 뇌 중 전두엽에는 동기유발 기능을 담당하는 부위와 공부와 지적 활동을 담당하는 부위가 있다. 그런데 이 부위 바로 밑에는 감정.본능을 관장하는 부위가 있어, 이 부위들끼리 끊임없이 정보를 교환하면서 영향을 미친다. 동기유발의 뇌가 자극받으면 감정 기능도 영향을 받아 즐거운 기분을 발산하고, 이는 지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을 자극해 집중력이 향상되고 공부도 효율적으로 이뤄지게 한다. 반면, 공부를 억지로 시키면 감성의 뇌가 위축되어 집중력과 기억력이 떨어지고 기분이 나빠지면 스트레스가 쌓여 두뇌 발달에 악영향을 미친다. -74쪽

반면 남자아이의 뇌량은 여자아이에 비해 좁기 때문에 좌뇌와 우뇌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그런데 감정의 뇌는 우뇌에 있고, 언어의 뇌는 좌뇌에 있다 보니 남자아이는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102쪽

남자아이에게는 '어떻게 느끼는지'가 아닌 '무엇을 할지'를 물어보는 것이 좋다. 그러면 느낌이나 감정을 물었을 때보다 스트레스를 덜 느낀다.-103쪽

여자는 감정을 관할하는 부위가 뇌 전체에 넓게 퍼져 있어 슬픔에 복받치면 다른 일도 모두 그 감정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남자는 복받치는 슬픈 감정을 느끼더라도 그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고 다른 일을 처리해 낼 수 있다. 남자의 경우 뇌의 한 부위에서만 감정을 관할하기 때문에 다른 부위가 기능을 할 때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114쪽

맞은 아이의 기분을 상상해보게 하면, 다른 사람을 공감할 줄 아는 여자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을 안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다르다. 공감을 유도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짧게 "친구를 때려서는 안 된다"라고 따끔하게 말해주는 것이 낫다.(중략) 여자아이의 경우 오히려 역효과가 나므로 절대로 체벌을 해서는 안 된다. -133쪽

여자아이들은 언어나 소근육 운동과 연관된 뇌 부위가 남아보다 약6년 정도 빨리 발달하고, 남자아이들은 여아보다 목표적중이나 공간기억과 관련된 부위가 약4년 정도 빨리 발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36쪽

남자아이와 여아아이들의 망막은 서로 다르다. 여자들에게 많은 P세포는 색깔과 질감 식별에 유리하다. 남자들에게 많은 M세포는 움직임을 잘 포착하고 사물의 방향이나 속도를 잘 감지한다.-137쪽

여자아이들은 '밝고 화려한 색'에 시선을 뺏긴다. 그리고 이런 색감의 자극은 아이의 뇌발달에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중략) 여자아이라면 입장 바꿔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중략)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엄하게 혼을 내야 한다. -165쪽

만3세 아이들은 현실과 환상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중략) 하지만 이것을 거짓말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이는 발달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271쪽

아이를 무조건 혼내는 것보다는 '왜'가 낫고, '왜'보다는 '어떻게'가 한수 높은 질문이다. "왜 안했니?"와 "어떻게 하고 싶니?", "왜 싸웠니?"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겠니?", "왜 말 안 하니?"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니?" 두 개씩 짝지어진 질문 중 어느 쪽에 아이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지 선택하기란 어렵지 않다. -315쪽

아이의 초기경험이 자존감을 세우는 데 긍정적이었다면, 그 아이는 자기 가치에 대한 느낌을 내면화해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된다. 그는 집단생활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조금 좋지 않게 말하더라도 크게 상처받지 않으며, 삶에서 어려움을 만나도 잘 극복해 나간다. 하지만 초기 경험이 긍정적이지 않아 자기 가치의 내면화에 실패한 아이는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항상 타인의 행동과 반응에 신경 쓰는 것이다. -355쪽

부모가 아이에게 공감해주면 아이는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존감이 공감능력을 키운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부메랑처럼 다시 부모에게 돌아온다. 공감능력이 높은 아이는 부모의 입장 역시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370쪽

구소련의 교육학자 안톤 마카렌코는 "한 인간을 최대한 존중해주면 최대한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377쪽

자존감은 자신에게 이미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과장해서 자랑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384쪽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한다. 예를 들어 엄마가 아이를 대할 때 항상 웃고 애정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 아이는 곧 그 모습을 자기 얼굴이 비친 거울로 받아들인다. 거울 속 모습을 보며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것이다. 자존감은 이렇게 형성된다. 순수한 애정만으로도 자존감이 형성될 수 있다. -400~401쪽

고대 중국인의 지혜가 담긴 <채근담>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일은 급히 서두르면 애매모호해진다. 느긋하게 늦추면 저절로 밝혀지니 조급하게 서둘러 분노를 사지 말라. 사람을 억지로 부리려면 순종하지 않지만 그냥 놓아두면 감화되는 수가 있으니, 심하게 부려 더 완고하게 만들지 말라."-411쪽

일부러 한 일이 아니라 우연히 실수를 저질렀다면,(중략) 이 때는 말을 줄임으로써 아이의 마음을 생각해보자. 속으로 열만 세면 벼락같이 화를 내며 아이의 자존감을 낮추는 말을 쏟아내는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가 우연히 잘못을 했을 때는 잘못된 행동을 말하기보다 그런 다음에 해야 하는 일을 말해 주는 것이 좋다. -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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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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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현상들에 때로는 내가 관찰자로서 때로는 내가 당사자로서 반응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 같은 단순한 사람들은 나에게 그 현상이 무관할 때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당사자가 되었거나 흥미를 일으키는 요소가 있을 때에는 그저 그 현상이 나의 개인에게 미치는 소소향 영향에 질식하여 질질 끌려다니다 생을 마감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더 현명한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조우할 수는 없다지만 그것을 책으로라도 해야 그나마 생의 마감 시점에 적어도 인생에 속았다는 열패자로서의 늦은 자각이 오는 것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를 만난 것은 늦었지만 행운이었다.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이 마치 액세서리를 하듯, 수전 손택을 자신의 글들에 때로는 어설프고 조악하게 덧붙이는 것은 그녀가 그녀 자체로서 브랜드화된 고급 문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에 그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해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격이 조금은 높아진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비약일까? 그녀가 그렇게나 거부했던 이미지화와 왜곡된 은유의 중심에 때로는 그녀가 놓인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그녀 자신이 실제 암을 두번이나 극복하면서 암에 비대하게 덧붙여진 사회의 잔인한 은유에 저항하고자 한 데에서 시작되었으며, 한국에 출판된 것은 후에 새로운 판본을 준비하면서 후기 형식으로 덧붙이려고 하다 거의 동등한 수준의 저작이 되어 버린 <에이즈와 그 은유>와의 합본이다. 사실 그녀는 이 둘이 겹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하나 상당부분 겹치는 내용과 관류하는 공통의 흐름이 있는 것 또한 한계라면 한계이겠다. 또한 그녀는 이 둘이 문학적 성과물로 평가 받기를 바랬다고 하나 이 저작이 과학적 분석물로 평가 받은 부분에 대하여 무척이나 기분나빠했다고 한다.

일단 이 책이 그녀 자신의 암극복기에 대한 얘기가 될 거라 기대했다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그 부분에 묘한 상실감을 느낄 수도 있다. 누구나 적당히 관음증이 있어 그녀가 암을 극복하면서 어떤 고통을 겪었는 지에 대한 내밀한 스토리가 조금은 노출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녀 자신 이런 자신의 스토리 개진을 지양한다고까지 고백하고 있고 지극히 객관적으로 수많은 사례들과 문학 작품들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개인의 감정의 배설로 귀결되지 않으려 노력한 점 등은 이 책을 더욱더 돋보이게 한다. 그러니까 꼭 사서 줄 그으며 읽고, 더불어 수많은 도서 목록까지 옆에 두고 메모해 두어야 할 만큼 진지하지만, 문체의 세련됨과 지적 편력의 고귀함이 책 전체에 흩뿌리는 고상함은 아름답고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재미도 있다는 얘기. 그녀가 아름다운 까만 눈을 깜빡이며 조목조목 이야기를 풀어내는 듯한 이미지가 환영처럼 주위를 에워싼다. 

요는 질병은 은유가 아니라는 점과 그런 사고방식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주장이다. 또한 이런 속박의 대상질병으로 19세기까지 결핵이, 그 이후로는 이, 더 이후로는 에이즈가 지목되었다. 결핵은 시간과 관련된 질병으로 삶이 빠른 속도로 진행하게 하여 그것을 돋보이게 하고 정화시키는 낭만성을 가지고 있다고 은유화되었다면, 암은 공간의 질병으로 지형학적으로 은유화되었으며, 육체의 질병이다. 암은 별다른 이해력이 없는 세포들이 증식됨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아닌 존재로 대체된다는 해석은 상당히 흥미롭다. 면역학자들까지도 신체의 암세포를 비자아로 표현한다고 한다. 과대망상이라도 걸린 듯한 이 세계를 단순화해서 인식하는 데에 암의 은유는 기여하고 있는 셈이라는 얘기. 결핵은 20세기에 이르러 그것을 따라다녔던 한다발의 은유가 산산이 쪼개진 채 광기와 암의 두 가지 은유로 들러붙었다고 한다.  

그녀는 치명적인 질병일수록 무수한 의미들에 시달리고 그것은 공포의 대상들과 동일시되가 마침내 이 공포들이 다른 것들에 부과되어 형용사적 어구가 된다고 설명한다. 특히나 암을 묘사하는 지배적인 은유는 전쟁의 언어로서 그녀가 가장 끔찍해 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실지로 그녀는 반전운동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상당 부분의 헤게모니가 사실은 군수 산업과 전쟁을 통한 민중의 압박 및 공포 정치에서 나왔다는 것은 소름끼치지만 묵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수만 인지하고 다수의 대중은 그것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유린당해도 스스로는 주체적으로들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착각한다. 

<에이즈와 그 은유>의 서두에서 그녀가 내리는 은유의 정의가 날카롭다. 그것이-아닌-다른 것으로, 또는 그것이-아닌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부르느 것은 철학이나 시만큼 오래된 정신작용이며<중략> 

   
 

내 책의 목적 또한 이런 상상력을 부추기기보다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문학이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 이루려 노력했던 일종의 의미 부여가 아니라 뭔가에서 의미를 빼앗는 것, 극히 논쟁적인 전략을 활용해 돈키호테 마냥 지금의 이 세계, 이 신체에 가해진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 내 책의 목적이었던 셈이다.  

 
   

이 대목은 그녀의 질병으서의 은유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생각을 보여준다. 그녀는 의미를 빼고 해석에 저항하기 위하여 그 은유를 과감하게 공격한다.  

에이즈는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었던 그 누군가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동성애자, 혹은 난잡한 성교자로서의 낙인이다.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만으로 때로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운나쁘게 감염되었을지라도 그는 아주 불쾌한 징조가 되고 만다.  

그녀는 또한 국가와 언론이 종말론적 사고와 그것의 전파에 탐닉하는 현상을 두고 최악의 각본을 애호한다는 사실은 통제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공포를 지배하려는 욕구를 반영해 준다고 지적했다. 이는 작금의 신종플루 유행에 대처하는 한국 언론들의 자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그 공포에 대한 허구의 통제력에 대한 희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질병들로 인한 세계의 종말론까지 확장된다. 백지 상태의 출발, 이것은 강대국 (그녀는 자신의 조국을 지칭하는 과감성을 보이지만)의 대중을 압도하는 장악력에 대한 탐욕의 음모와 다름 아니다. 즉 사실 질병으로서의 은유 그 자체가 과학적 설명의 부재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하지만, 대중을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고도의 정치적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장치로 이용되었다는 얘기이다.

번역자 이재원의 번역도 유려하고 그가 말미에 덧붙인 도서 목록도 아주 유용하다. 그녀를 시작하기에 가장 그녀다운 문체와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 아닌가 한다. 적어도 입구에서 질식하여 그녀를 탐험하는 것을 저어하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다음은 대중의 치졸한 관음증을 조망한 책 <타인의 고통>을 보고자 한다. 유한한 인생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에 수동적으로 치여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그녀는 아픈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좋은 질료가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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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일송세계명작선집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김순진 옮김 / 일송북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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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체호프의 단편선은 사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해설에서 인용된 <대학생>의 한 대목이 너무 훌륭했고, 현대의 잘 나가는 단편작가들이 사실은 다 그의 아류들이 되고자 한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들에 혹해서 읽게 되었다. 

기대이상이었다. 재미없을 줄 알았다. 일단 번역의 문제가 생기게 되면 그 지점은 흥미유무의 판단의 경계가 되버리는 문제가 생기므로. 즉 허술한 번역은 반드시 흥미를 감하게 되어 있다. 어느 리뷰어가 번역자 김순진이 역시 체호프가 다닌 모스끄바 의대 출신의 소아과 의사로서 그 번역이 정말 탁월하다는 평을 해주셨는데 그 리뷰어의 의견은 전적으로 옳았다. <티푸스>에서 티푸스에 걸린 젊은 중위를 치료하러 온 의사의 말투에 대한 그녀의 표현은 비극적인 소설의 희화화가 어떻게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지 보여주는 예증이다.  

"거럼! 거럼! 거럼!", "거렇지,거렇지......좋아요,총각. 기운을 놓으면 안돼!" <<중략>> "화내면 안 되죠...... 거럼! 거럼! 거럼!" 

1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농부들>과 <골짜기>와 <약혼녀>는 분량과 스케일이 중편이다. 특히나 <농부들>과 <골짜기>는 근 현대의 러시아의 농촌의 모습을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리얼리티와 서사의 다이나믹함이 대단한다. 

전반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나 배경 묘사에 치중하는 정적인 어휘 놀음이라기 보다는, 문장 하나 하나가 주인공을 여러 공간으로 이동시키고 삶을 앞으로 흐르게 하는 서사 중심이어서 지루할 새가 없다. 단 <굽은 거울>이나 <자고싶다> 같은 작품은 이런 서사에의 치중이 개연성없는 결론과 합쳐져 작위성이 조금 도드라진 무리수는 있다. 그는 감정의 표현을 섬세하고 자세한 설명으로 하는 대신에 주인공을 한 번 더 움직이게 하거나 배경을 변화시켜 부지런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그만의 방법을 쓴다.  

기억하고 싶은 작품은 삼류 작가 이반이 가족들에게 위세 떠는 글쓰기에 대한 유머러스한 묘사가 돋보였던 <쉿>과 열세 살 어린 유모가 주인집 아기를 돌보면서 졸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 비극적인 일을 저지르게 되는 <자고싶다>, 대학생들의 집을 떠돌며 그들을 수발하며 존재감 없이 슬프게 살아가는 가련한 여인의 얘기인 <아뉴타>, 한 사내가 모스크바에서 병을 얻어 귀향해 가난한 대가족 농가의 삶에 합류하여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비극적인 일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농부들>이다.  

뇌수 속에 콕콕 박아 넣고 싶은 대목들은. 

슬픔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이오나의 가슴을 찢고 그 슬픔을 밖으로 쏟아 낸다면 아마 온 세상이 잠길 테지만, 그의 시린 슬픔은 보이지 않는다. 밝은 대낮에도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껍질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슬픔> 

그는 네 시까지 더 쓴다. 쓸 이야기가 더 있었다면 여섯시까지라도 썼을 것이다. 혹독하고 비판적인 눈으루보터 벗어나 혼자서,생명이 없는 사물들 앞에서 부리는 아양과 거드름이, 자신의 힘에 운명이 달린 작은 개밋둑 앞에서 부리는 전횡과 교만이 그의 존재에 소금과 꿀이 된다.<쉿> 

그는 생각했다. 과거는 현재와, 잇따라 발생하는 사건들의 끊임없는 사슬들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이 사슬의 양끝을 본 것처럼 느껴졌다. 한쪽 끝을 건드렸더니 다른 한쪽 끝이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대학생>  

이 표현이 바로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해설에 인용된 표현이다.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파르르 떨리는 사슬의 끝이 보이는 듯한 이 표현. 추상적인 개념이 이렇게나 아름답게 시각화될 수 있다니. 

졸다가 깜빡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누군가 갑자기 어깨를 건드리거나 볼에 대고 숨을 내쉬기라도 하면 금세 잠이 달아났다. 몸이 마비라도 된 듯이 늘어지자 온통 죽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슬그머니 기어들어온다. 반대쪽으로 돌아누워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면, 이번에는 가난과 사료와 값이 오른 곡물에 대한 떨쳐버릴 수 없는 우울하고 지겨운 생각이 맴돌았다. 그러다 잠시 후에는 인생은 이미 지나갔고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농부들>  

아, 잠들려고 전전반측하면서 이리 돌아눕고 저리 돌아 누울 때 사람들은 거대한 인생의 숙명을 생각했다 손에 집히는 자잘한 문제들로 고민했다 하며 세상 제일가는 철학자에서 좀스러운 생활인으로 진자처럼 왕복한다. 이런 통찰력이라니! 

다시 집 안은 조용해졌다.그러나 가족들 모두 언제나 잠을 잘 못 잤다. 성가신 일이 집요하게 모두의 잠을 방해했던 것이다. 노인은 등이 아파서, 할미는 근심과 악의 때문에, 마리아는 무서워서, 아이들은 가렵고 배가 고파서 제대로 잠을  못 잤다. <농부들>  

나도 잠을 잘 못잔다. 그래서 이 상황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노파는 하느님을 믿었지만, 그 믿음은 어쩐지 어렴풋했다. 머릿속 모든 생각들이 뒤죽박죽이어서, 죄악과 죽음과 영혼의 구원에 대해 생각하다가도 일상의 근심거리들과 가난에 마음을 빼앗겨 방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금방 잊어버리고는 했다. 

죽음은 부농들만 걱정했다. 그들은 부유해질수록 하느님과 영혼의 구원을 믿지 않았고, 지상에서의 마지막이라는 공포심이 들 때에만 초에 불을 켜고 기도를 드렸다. 가난한 농부일수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농부들>

이 여인과 2층 방에서 함께 살게 되자 온 집안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새 유리를 끼워 넣은 듯이 환하게 밝아졌다. <골짜기>  

아, 이런 표현은 체호프만 할 수 있겠지. 

태양은 어느덧 빨간 금란으로 침구에 싸인 채 깊고 평화스러운 잠에 빠져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빨강과 보랏빛으로 물든 가늘고 긴 구름이 그 고요하고 편안한 안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골짜기>  

한 편의 시 같은 대목.  지금까지 노을을 묘사한 표현중 가장 탁월한 것이 아닐런지.  

고전은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한 번에 깨버린 이 책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진부한 근거를 머리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의 그 질긴 생명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그저 넘기는 책장의 속도로 대답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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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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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기대 이상이었다고 과장하고 싶지는 않고 총평은, 나에게 그럴 자격이 주어진다는 전제 아래, 기대의 지평선 아래 약간 가라앉아 있는 느낌으로 출발했다 역시 그가 밀어올리는  바람에 지평선 위로 와버렸다는 얘기.

그 느낌은 흡입력이 다소 떨어지고 작가 혼자 외쳐대는 것 같은 작품이 한 두개 있었고, 저자를 숨겨두고 보더라도 반드시 김연수의 것이야!,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우주 공간 얘기를 조금 남발한 느낌이 들고(내가 요즘 코스모스를 어렵게 읽고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것일수도) 사회적 맥락 속으로 개인의 삶을 가져다 대려고 한 무리수가 조금 노출되었다는 점 등을 주제넘게 지적하고 싶다. 요새 문학 작품들을 놓고 사회와 유리되어 개인의 삶 속에 침잠하여 문제의식이라고는 없다고 비판들 하지만 이 명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문학 작품 본연의 낭만성이 부옇게 흐려지거나, 지나치게 작위적이 되거나 하는 부작용이 있는 것 같다. 

단점부터 들이밀고 시작하는 후기이지만 김연수라는 작가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하는 작가이고, 도식과 틀 속에 침잠하는 고루한 소설가가 아니라 내일로 열려 있는 문을 가장 먼저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넘치는 이 시대의 이야기꾼임은 결코 부정할 수가 없다. 그는 아주 훌륭한 작가이다. 암.^^ 

다 거론하면서 내 취향을 주장하기는 지겹고, 좋았던 단편 두 개와 어느 리뷰어의 말씀처럼 빛났던 평론에 대하여 얘기하고 싶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가 개인적인 경험과 맞물려 참 좋았다. 무엇보다 아내의 친구로 피아노를 조율하러 불쑥 찾아온 인도인 친구의 형상화의 리얼리티가 빛났고,그와의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소통 속에 아내의 소망을 세련되게 깔아낸 작가의 섬세함이 돋보였다. 이는 해설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김연수가 직접 번역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의 오마주라고 하는데 간단하게 언급된 그것의 줄거리가 더 매혹적이었다. 맥락의 독서가 시작되는 지점. 나는 아마도 카버의 '대성당'을 읽게 되리라. 대학시절 자원봉사를 하다 간단한 영어로 되지도 않는 소통 속에 실패한 감정의 교류만을 남긴 인도인 친구가 떠올라 더 재미있게 읽었다. 언어가 넘을 수 없는 저 영역의 소통의 영역이 또 있겠지만, 나의 생각들과 감정을 집약할 언어가 마구 엉켜 눈 앞에 둔 상대와 엉뚱한 얘기 끝에 돌연 아름다운 지점에 안착할 때의 기분은 또 색다른 것이었다. 작가도 '고독'이라는 단어에서 이 지점을 발견하고 보여준다.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는 김연수만이 김연수밖에 할 수 없는 얘기들이 마치 여러 색깔의 물감이 물에 풀어져 아름답게 섞이는 듯한 환영을 그려낸다. 자칫 돌연 이별을 선고받은 소설가의 평범한 연애담으로 전락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여자의 아버지의 직업과 그 아버지의 시력을 잃어가는 여정을 통하여 또 그것과 얽힌 권투선수의 링 위에서의 죽음과 얽혀 하나의 장대한 모자이크를 이룬다. 특히나 맹인 도서관장과 함께 여자친구가 녹음한 그 아버지의 흔적을 들으며 그 소리가 끊긴 지점. 거대한 만월을 보고 마는 마무리는 소설이 어떻게 사람의 삶 속에 녹아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지자 같아 가슴이 마구 떨려왔다.  그리고 글이 그림으로 변해 갑자기 시야를 덮는 그 기막힌 경험 해보지 않은 분은 꼭 이 소설을 읽도록.

또한 해설에서는 수많은 추천도서목록을 발견하는 멋진 우연에 가닿게 된다. 작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평론가의 평론은 차갑지 않아 좋다. 소위 무조건 까대는 평론은 이미 그 작가에 호감이 있어 책을 펴든 독자들을 진심으로 거북살스럽게 하는 것이다. 평론가가 철저히 중립적 위치에서 작품을 차갑게 쪼아대는 것도 물론 평론의 미덕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작가를 너무 사랑해서 그가 낳은 작품마저 예뻐해 주는 모습은 괜히 인간적으로 보여 또 한 명의 독자 친구와 소통하는 듯한 유쾌한 착각을 주기에 또 그 의미가 깊다. 특히나 '삶은 이야기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평론가의 얘기는 김연수를 그대로 집약해 놓은 듯해 가지고 싶은 문장이다. 그가 택한 김연수의 문장은 "그는 어둠 속 첫 문장들 속으로 걸어갔다."는 문장. 사실 내가 제일 지루하게 읽어야 했던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에서 나온 이 문장은 작품은 밀어내고 표현만 쏘옥 빼오고 싶은 욕심이다. 이 문장만 놓고 본다면 이런 문장을 낳을 수 있는 김연수의 그 저력은 대체 좋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대중보다 백만배는 더 깊숙한 가슴께에서 나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남들보다 백만배는 더 무거워 의자에 지긋이 내려누르며 공부할 수 있었던 데에서 나오는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그리고 이 해설에서 나는 정말 빛나는 문장들을 가져오고 말았다. 이를테면, 

오래된 문구가 있죠. 이런 것입니다. "시간은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공간은 모든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소설은 공간과 시간 둘다의 이상적인 매개체입니다. 소설은 시간을 보여줍니다. 곧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죠. 또 우리에게 공간을 보여줍니다. 곧 어떤 일이 한 사람한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수전 손택,'문학은 자유다') 

이렇게나 소설을 잘 정의하는 또다른 표현이 있을까? 삶이 이야기가 되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고자 하는 보편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인간의 슬픈 시도와 다름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슬픈 시도를 끊임없이 떨어지는 바위를 힘겹게 밀어올리듯 해내고 있는 김연수에게 결국은 박수를 보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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