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가 읽는 일에 대한 의미를 재정립한 계기에는 일화가 있었다. 여행 중에 만난 이탈리아 소년 덕이었다. 츠바이크는 이 매력적인 소년과 금세 친해져 남다른 교감을 나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소년이 문맹이었음을 깨닫고 경악한다. 아름답고 지적으로 보였던 소년이 자신에게 온 연애편지조차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츠바이크로 하여금 경천동지할 놀라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있어 읽는 일이란 하나의 다른 세계로의 확장이었고 "모든 지식과 학문의 시작을 이루는 알파와 오메가"였기 때문이다. 소년에 대한 강렬한 연민은 역설적으로 그가 독서를 통해 경험한 세계의 깊이와 넓이에 대한 방증이었다. 여기에서부터 그의 북리뷰는 시작한다.

















그가 얘기하는 동화로의 회귀는 끝내 죽음에서 탈출하고 만 [천일야화]의 드라마는 루소의 '변혁'은 발자크의 통속성은 남다른 통찰을 지닌다. 


독서의 동기는 늘 자기 세계의 경계를 넘으려는, 낯선 것 안에서 길을 잃으려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책 속의 비유에서 자신을 되찾으려는 충동일 뿐이다.

-p.33



삶의 불완전성과 불가해성과 파열음은 그러니 그가 얘기하는 독서의 지형도에서 아낌없이 흩어져 있어도 다시 현실로 돌아나오는 출구를 찾고야 만다. 책 안에서의 세계와 우리의 현실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만나고 어긋나고 충돌하며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읽는 일이 능사도 아니고 모든 해답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책이 아니라면 우리는 확장될 일도 돌아올 길도 없다.


나날의 전쟁터에서 모두 전사인 우리들은 그래서 끊임없이 읽고 회의하고 사유하고 아쉬워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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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려운 얘기다. 나한테는. 바른 말을 하고 올바른 조언을 하고 자선을 베풀면 그 상대는 응당 그것을 선의로 받아들이고 고마워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오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직언이나 조언은 인간이 인간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저변에 교묘한 지배욕이, 상대를 '선의'라는 그럴듯한 포장하에 좌지우지하고 싶은 욕구가 개입된 것이 아닐까. 특히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 이러한 관계의 역학은 도드라진다. 


이제 분홍공주는 벌써 열세 살이다. 내가 열세 살이던 시간이 어제처럼 생생하다는 얘기는 너무 진부해서 덧붙이기도 미안할 정도다.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내 안에 아직 덜 익은 열세 살이 있는데 내 앞에 열세 살이 있다니, 이건 때로 비현실적이다. 사춘기 초입의 딸 앞에서 나는 세상에서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도덕적이고 성실하고 부지런한 인간인 것처럼 행세한다. 방을 청소해라, 숙제는 미리미리 해라, 영상물은 적당히 봐라, 아이돌에 너무 빠지지 마라, 성실히 공부해라. 객관화하면 내가 듣는 입장이라도 안 듣겠다, 싶은 얘기를 질리지도 않고 하고 있다. 내가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 나는 모범생이 아니었는데 마치 선도부장처럼 딸을 훈육하려 든다. 
















"글을 쓸 때마다 내가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어. 엄마의 잔소리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더 초라해지고, 더 자신감이 없어지고, 나 자신이 한심해 보였어. 엄마, 이젠 그러지 말아줘.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실망스런 눈초리를 보이지 말아줘. 

- 서안정 [엄마 공부가 끝나면 아이 공부는 시작된다]


엄마의 잔소리나 엄마의 조언이 틀리거나 옳지 않다 해서 아이들이 반감을 가지는 게 아니다. 너무 맞아서 오류가 없어서 반기를 들 대목이 없어서 아이들은 무력하게 아프다. 특히 사춘기의 아이들은 더욱 그렇다. 성장은 정도가 아니다. 뒤틀어지고 튀어 나가고 어긋나며 우리는 컸다. 확장은 원래 그런 법이었다. 그런데 나는 벌써 잊어버렸다. 열네 살, 나는 하교 후에 방문을 잠그고 매일 낮잠을 잤다. 그리고 밤에 일어나 숙제를 하고 공부를 하고 음악을 들었다. 엄마는 닫힌 방문 너머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다그치지 않았다. 나라면 그런 딸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건 나인데 말이다.


















"난 어머니가 늘 옳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싫었어요. 늘 옳기만 한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그건 상대방을 더욱더 무력하게 만든다고요. 

-애거서 크리스티 [누명]


[누명]에서 죽은 어머니는 입양한 자식들을 최선을 다해 양육하고 교육했다. 최상의 성장 환경을 제공하려 애썼지만 그녀의 아이들은 저마다 마음 속으로 어머니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다. 학대하지도 방임하지도 않은 어머니보다 때로 자신들을 버린 생모를 더욱 그리워하고 사랑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아이에게 바른 길을 조언하고 지시하는 게 아니다. 아이를 자신이 바라는 길로 앞에서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것도 아니다. 조금 뒤떨어져 태어난 그대로 아이를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때로 아이가 질문할 때 혼란스러워할 때 이정표 정도를 제시해 주는 정도로 도와주는 게 오히려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커나가는 데에 긍정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쉽지 않은 노릇이다. 가장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게 덫에 갇히기 마련인 게 양육인 것도 같다. 인간이 인간을 낳아 독립된 개체로 키운다는 건 어찌보면 얼마나 대담하고 무모한 일인가도 싶다. 시작하기 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이 오늘도 나를 키운다. 나는 아직 한참 더 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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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9-06-16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흑흑 무척이나 공감합니다. 조카들과 주말을 함께 보내고 데려다 주고 오는 길 여러 생각을 했어요. 이 아이를 사랑하니까 이런 저런 조언-_-을 해 주려 하지만 결국 잔소리 ㅠㅠ 아이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알아서 잘 하는데ㅠㅠ 좀 더 믿고 지켜보자 생각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blanca님.

blanca 2019-06-17 11:20   좋아요 0 | URL
저는 잔소리가 싫은데 상대에게는 잔소리를 하게 되는 이 모순이라니요. 이런 모습이기는 싫었는데...흑, 잘 늙는 일은 참으로 품이 드는 일인 것 같아요.

푸른괭이 2019-06-17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공감하고 갑니다..ㅠ.ㅠ ˝내가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 저도요 -_-;;

blanca 2019-06-17 11:35   좋아요 0 | URL
매일 취침 전 반성 모드입니다. 그러나 다음 날 또 반복되고요. 정말이지, 너무 어려워요.
 

노인들을 보고 있으면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서로 다른 젊은 시절을 보냈을 텐데, 세계를 겪은 방식과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를 텐데, 마치 똑같은 생을 겪은 것 같았다. 웃지 않았고 눈빛이 멍했고 박탈감에 사로잡히고 회한만 남았다.

-편혜영 <다음 손님>

















편혜영의 문장은 장황하지 않은데 예리하고 구태의연하지 않으면서도 보편적이다. 이런 대목은 밑줄을 긋게 된다. 작가는 음험한 인간의 내면, 하루키의 그 검은 우물을 응시하고 퍼올린다. 이 얘기만 해도 그렇다. 화자의 아버지는 겉으로 보기에 참으로 따뜻하고 사려 깊고 예의 바른 사람이다. 일하는 엄마 대신 그는 치매가 온 장인 어른을 돌본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헌신에 감동한다. 이야기는 이 출발점에서 심연으로 틀어 나간다. 그것은 따뜻한 보살핌이 아니라 학대였음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선뜩하다. 인간은 복잡하다. 보이는 곳과 드러나는 부분과 숨긴 구석이 한데 어우러져야 비로소 하나의 삶이 완성된다. 외형적으로는 할아버지를 따뜻하게 보살피는 아버지를 둔 소년은 자라 노인에게 더 진심에서 우러나온 간병을 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그 기대를 철저히 배반하며 결국 그 어긋난 충돌 지점에 작가는 우뚝 선다. 편혜영의 이야기들은 선뜩한 핍진성을 띤다. 이런 마음이 든다고 해서 저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시시각각 서스펜스적 서사로 형상화된다. 



<식물 애호>는 아마 <홀>이라는 장편으로 발전된 것 같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위와 장모의 괴괴한 관계도 그렇다. 딸은 죽고 사위만 살아남은 상황에 장모는 분개하지 않고 오히려 사고 휴유증에 시달리는 사위의 간병을 자처한다. 제대로 된 의사표현과 거동이 불가능한 사위는 장모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의 코드를 해석하며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느라 분주하다. 그리고 그 행동은 가면을 쓴 폭력이다. 바깥에서 볼 때 장모는 성녀 수준의 헌신을 보인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상은 딸 대신 살아 돌아온 사위에 대한 교묘한 앙갚음이 행해지고 있었다. 


대단한 복수나 보이는 폭력 대신 이런 음험한 진탕을 통해 작가는 인간을 제대로 읽어내려 한다. 친절을 가장한 폭력, 배려를 가장한 참견. 이상주의적인 관계, 소통, 사랑의 대척점에서 피어나는 이야기의 흡인력이 대단하다. 그것 또한 읽는 이들은 스스로와 가족과 타인을 이해하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담만으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들을 소화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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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오 바쇼는 평생을 길위에서 보내다 객사했다. 무사의 길을 포기했고 그가 길에서 지은 수많은 하이쿠들과 산문들은 절창이 되어 남았다. 17세기의 시인은 수세기가 지나 자신의 시가 때로 잔인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줄 예감하지 못했다. 일본의 정신은 바쇼의 언어로 응축되었고 일본은 천황이라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가진 접합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정복할 날을 꿈꾸었다. 그 부속품에는 타민족들이 있었고 그 수단은 검이었다.


이차대전 당시 1943년 초  점차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이 타이-미얀마 간 대규모 철로를 건설하려 수십만의 연합군 포로를 동원했던 일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캠프에는 심지어 호주인, 대만인, 타이인, 자바인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 대신 일본은 그들이 죽어가며 만들어낸 증기기관차를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하여 자신들의 사악한 행동을 면죄받고 일본의 정신을 밀봉하려 했다. 이야기는 이 이야기 속에서 익명으로 잊혀간 총 이십오만 명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다.
















"왜 태초에는 항상 빛이 있는 걸까?"로 시작하는 도리고 에번스의 회고는 기억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선형적이지 않다. 그는 때로 고모 에이미와 불륜의 사랑에 빠진 청년이었다 시암의 정글속 지옥 같은 포로수용소의 대령을 오가는 일흔일곱 살의 전쟁 영웅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적국 일본의 무모한 일본의 철로를 건설하는 명령에 호주의 포로는 자신이 이끄는 죽어가는 부하들 중 가장 죽음에 덜 근접한 이들을 선별해 내어 그 진창에 집어넣는 일에 협조해야 했다.


언제나 그들을 위한 일. 그는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그리고 매일 그는 자신의 사랑이 실패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의 세계. 인간에 대한 존중도 존엄도 애저녁에 포기한 곳. 몸을 제대로 가릴 옷도 먹을 것도, 썩어가는 피부를 치료할 약조차 없고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백 명 앞에서 짓이겨지는 진창에서 그들은 서로 짐승처럼 사랑했다. 미워하고 투닥거리던 동료에게 자신의 형편없는 배급음식을 나누어 주고 똥통에 빠진 죽은 시체를 들어올려 장사지냈다. 아무리 그들이 짓밟으려 해도 전멸시킬 수 없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눈물겹다.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은 그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실제 그 현장의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폭력의 역사의 현장에서 광기의 신들이 날뛰는 정글에서 길어올리는 참혹한 실상과 '나'가 아닌 '우리'에 기대어 마침내 생존의 출구를 찾아내는 이야기는 참으로 경이롭다. 그의 시선은 피해자에게만 닿아있지 않고 반성없이 그 그 가해자의 패턴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비판없이 오히려 미화하며 수행하는 일본군 가해자들의 시점에도 연결되어 있다. 또한 그들이 전후에 일상의 삶에 어떻게 편입되는지, 제대로 된 악행의 청산없이 스스로를 어떻게 포장하고 정당화하는지에 대한 과정에 대한 탐사도 이어진다. 


조선인 부사관 최상민에 대한 이야기. 식민지국의 백성으로 가해자의 꼭두각시에 동원되는 그의 비극에 대한 설명은 먹먹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원하지 않음에도 그는 오스트레일리안 포로를 잔인하게 때려야 했다. 정작 1급 전범들은 용서받았음에도 시스템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조선인 최상민은 영문도 모른 채 처형당해야 했다. 이 모순과 이 억울한 방랑의 이야기에 호주인 작가가 부여한 서사는 놀라울 정도의 이해와 공감이 있다. "어머니가 담근 매콤한 김치"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대목. 어떻게 이러한 감성, 이러한 그리움을 알아냈을까. 아마도 그의 아버지의 기억에서 길어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의에 상관없이 식민지 백성이라는 이유로 일본의 가해자적 입장에 폭력의 수단으로 동원되었다는 비극적 역사에 대한 복원이 정작 우리의 손이 아닌 머나먼 나라의 작가에 의해 이루어졌다니 아이러니하다.


마지막 페이지가 없었다. 그의 인생이라는 책이 그대로 끊어져버렸다. 그의 발아래에는 진흙이, 머리 위에는 더러운 하늘이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그는 평화도 희망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도리고 에번스는 사랑 이야가 영원히,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끝이 없는 세계였다. 

그는 지옥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사랑 또한 지옥이므로.

사랑이라는 '지옥'에 대한 절창. 그 기적에 대한 믿음이 삶을 지탱하는 연가. 인생이라는 시. 이 모든 것이 한곳에 어우러진 아름다운 비극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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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5-07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두고 여태 안읽고 있었는데, 이제 읽어야할 때가 온 것 같네요. 블랑카님 글은 역시 좋네요.

blanca 2019-05-07 12:0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도 이 책 그 문학동네 북클럽 가입하며 신청해서 받아놓고 막상 읽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두었다 시작했어요. 초반부는 뭐랄까 좀 진부한 것 같아서 이제 그만 읽어야겠다, 싶어서 안 읽으려고도 했다니까요. 아, 다 읽고 나서는 정말 심장이 두근거려서... 맨부커는 딱 그 어떤 색깔이 있는 것 같아요. 좀 서정적이면서도 진지하고 작품성도 있고 묘사력도 좋은 작품을 선별하는 재주가. 마이클 온다치 생각도 나더라고요. 여하튼 한국 경비병 얘기 쓴 대목에서는 대체 이 사람 뭐지? 이랬어요. 호주의 백인 작가가 어떻게 한국 사람의 역사와 마음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지? 혹시 부인이 한국인인가? 이런 심증까지 들었어요. 댓글이 너무 중구난방 길어졌네요. 핵심은 꼭 읽으시기를 바란다는 이야기예요. ^^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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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웬만하면 참지 않는다. 흥미롭지 않거나 취향이 아니면 초반에서 책을 멈추기로 하고 있다. 나는 더이상 하루 종일 시간이 너무 많아 주체가 안 되던 이십 대가 아니므로 남은 시간을 아껴 써야 한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은 팟캐스트에서 알게 됐다. 무언가 진중하고 사려 깊은 느낌의 목소리. 확신에 찬 어조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후로는 오히려 이런 머뭇거림이 때로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 요는 초반부의 감정의 과잉이 식상하다는 생각에 멈추려 했던 읽기가 종반부에 와서는 이야기가 끝날까 아쉬워 더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특히 한국인 포로 경비병의 시선에 대한 묘사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져서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다. 다 읽기 두려운 이야기. 알기 전과 그 이후의 진실의 무게는 하늘과 땅차이다. 실제 일본인의 포로였던 아버지의 체험이 투영된 호주 작가의 이야기. 아버지의 임종과 이 이야기의 완성은 맞물렸었다 한다. 시작이 이야기의 전부를 이야기해주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 읽고 다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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