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을 보고 있으면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서로 다른 젊은 시절을 보냈을 텐데, 세계를 겪은 방식과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를 텐데, 마치 똑같은 생을 겪은 것 같았다. 웃지 않았고 눈빛이 멍했고 박탈감에 사로잡히고 회한만 남았다.

-편혜영 <다음 손님>

















편혜영의 문장은 장황하지 않은데 예리하고 구태의연하지 않으면서도 보편적이다. 이런 대목은 밑줄을 긋게 된다. 작가는 음험한 인간의 내면, 하루키의 그 검은 우물을 응시하고 퍼올린다. 이 얘기만 해도 그렇다. 화자의 아버지는 겉으로 보기에 참으로 따뜻하고 사려 깊고 예의 바른 사람이다. 일하는 엄마 대신 그는 치매가 온 장인 어른을 돌본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헌신에 감동한다. 이야기는 이 출발점에서 심연으로 틀어 나간다. 그것은 따뜻한 보살핌이 아니라 학대였음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선뜩하다. 인간은 복잡하다. 보이는 곳과 드러나는 부분과 숨긴 구석이 한데 어우러져야 비로소 하나의 삶이 완성된다. 외형적으로는 할아버지를 따뜻하게 보살피는 아버지를 둔 소년은 자라 노인에게 더 진심에서 우러나온 간병을 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그 기대를 철저히 배반하며 결국 그 어긋난 충돌 지점에 작가는 우뚝 선다. 편혜영의 이야기들은 선뜩한 핍진성을 띤다. 이런 마음이 든다고 해서 저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시시각각 서스펜스적 서사로 형상화된다. 



<식물 애호>는 아마 <홀>이라는 장편으로 발전된 것 같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위와 장모의 괴괴한 관계도 그렇다. 딸은 죽고 사위만 살아남은 상황에 장모는 분개하지 않고 오히려 사고 휴유증에 시달리는 사위의 간병을 자처한다. 제대로 된 의사표현과 거동이 불가능한 사위는 장모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의 코드를 해석하며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느라 분주하다. 그리고 그 행동은 가면을 쓴 폭력이다. 바깥에서 볼 때 장모는 성녀 수준의 헌신을 보인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상은 딸 대신 살아 돌아온 사위에 대한 교묘한 앙갚음이 행해지고 있었다. 


대단한 복수나 보이는 폭력 대신 이런 음험한 진탕을 통해 작가는 인간을 제대로 읽어내려 한다. 친절을 가장한 폭력, 배려를 가장한 참견. 이상주의적인 관계, 소통, 사랑의 대척점에서 피어나는 이야기의 흡인력이 대단하다. 그것 또한 읽는 이들은 스스로와 가족과 타인을 이해하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담만으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들을 소화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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