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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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적 자아와 에세이에서의 자아의 낙차가 흥미롭다. 하루키의 '나'는 도덕적으로 지탄 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적으로는 비교적 자유롭고 내면의 심연을 응시하는 지점에 가 있곤 하는 하는 젊은 남자다. 수많은 관계가 있고 때로 일탈이 있다. 하지만 실제의 하루키는 벌써 육십 대 중반에 하루에 한 시간을 삼십 년이 넘에 달려 온, 자신이 쓴 원고를 가장 먼저 보여주고 의견을 청취하는 대학 시절 만난 아내가 곁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다. 소설에서는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이지만 자기 고백적인 하루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평범한 나도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그에게는 삶에 대한 어떤 예우가 느껴져 터덜터덜 걷다 갑자기 무릎을 굽혀 운동화 끈을 다시 매게 하는 견인을 얻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때로 마음이 휑해지기도 하지만 그의 고백을 듣고 나면 산다는 일을 다시 한번 어루만지게 된다.

 

이번 책에서는 그가 언제나 그러했듯 사생활에 대한 내밀한 고백 대신 그가 쓰기 시작한 일, 쓰게 된 일,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느낀 생각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어디에선가 반복된 이야기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것들을 묶어 내는 리듬은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청량한 것들이다. 번역자는 하루키의 그 문장의 리듬을 간파하고 살리려 노력한다. 시종일관 어떤 하루키적 경쾌함이 '하루키'라는 숲을 기분좋게 순례하게 하는 기분이다. 그냥 읽기만 해도 하루키적이 되는 느낌은 원래의 하루키의 그 단순 명쾌하면서도 '아님 말고' 식의 쿨한 목소리와 또 그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나름 찾아 낸 번역자의 협업이 비교적 성공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가 스물 아홉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 유명한 진구 야구장에서의 돌연한 순간에 대한 고백은 또 다른 형태로 재생된다. 그런데 또 들어도 시원하고 부럽다. 1978년 4월의 어느 쾌청한 날 오후에 하루키는 그렇게 작가가 된다. 쓸 것이 없었던 그 평범하고 단조로운 삶과 주변 환경에서 불필요한 수식을 제거한 리드미컬한 자기만의 문체를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 흥미롭다. "뭔가를 써 내는 것을 고통이라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라는 고백은 오만이 아니다. 그 자신만의 고유한 비전과 그것을 향한 프로세스에 대한 확신은 시간의 퇴적을 이겨 내고 그에게 남은 자부심이었다.

 

만일 당신의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p.110

그가 소설 창작의 비법을 으시대며 전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주변의 사람과 사물과 일들을 면밀히 관찰하여 머릿속의 서랍에 넣어놓은 다음 그것을 다시 열어 쓰고 묵혀두었다 끊임없이 고치고 또 고치는 과정으로 공력을 들이고 또 그러한 노력은 시간을 통해 진가를 발휘한다는 자신감에 대한 고백은 기억해 둘 만하다.

 

무엇보다 그가 그러한 창조력과 순발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삶에 들이는 그 사려 깊은 자세는 닮고 싶다. 하루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그 성실함이 결국은 그가 삶을 대하는 하루 하루의 무게에 대한 경의이기도 하고 쓰는 일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다. 나이듦은 몸의 무게를 실감하는 일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몸의 무게는 엄청나다. 삶을 이야기할 때 몸에 대한 화제는 어쩐지 지나치게 비속한 것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는데 결국 우리가 삶을 사는 일은 몸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움직이게 하는 일에 편승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때로 깨닫는다. 그렇다면 그러한 몸을 제대로 대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삶에 대한 기본 자세 같은 것이 아닐런지. 그에게 있어 '강함'은 이러한 것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부의 심연으로 들어가 그 온갖 깊은 좌절과 악과 욕망의 잔재를 들쑤시며 언어로 형상화하는 일에는 엄청난 강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사실 강하고 건강한 몸에 기반하고 있다는 그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고작 마흔 언저리에서 어떤 결론과 체념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던 나에게 아버지 연배의 하루키의 이야기들은 가장 뻔한 것 같으면서도 필요한 이야기들을 리드미컬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언제나 그렇듯 어떤 사안에 대한 유예적이고 자기 변명적인 대목들이 불거져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 그 나름대로 하루키다운 모습이다.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간 작가의 그 지극히 개인적인 삶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가 응시하고 마침내 이야기하는 것들에 위로와 힘을 받는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도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러한 조응이 결국 하루키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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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5-0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살까말까 망설이고 있어요. 그동안 하루키 연구서도 많이 나왔고, 여기저기 겹칠 것 같아서 뭐 새로울 게 있을까 싶어요. 누구는 예전에 나온 책 제목만 바꿔서 나왔다고도 하던데...

blanca 2016-05-02 19:40   좋아요 0 | URL
저도 하루키는 에세이 위주로 읽어왔는데 복간된 것도 있고 겹치는 부분도 있고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이 책은 최근의 하루키가 집필한 내용이라 저는 처음 보는 글들이었어요. 마지막 고인이 된 심리학자 부분만 제외하고요. 여하튼 저는 흥미롭게 읽었어요. 물론 하루키적인 한계나 변명은 여전히 반복되지만 그게 또 하루키니까요. ^^;;

alummii 2016-05-02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까 말까 읽을까 말까...^^

blanca 2016-05-02 19:41   좋아요 0 | URL
읽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단발머리 2016-05-02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어요.
역시 하루키,하고 있지요^^

blanca 2016-05-02 20:45   좋아요 0 | URL
아흑, 빗소리와 너무 잘 어울리죠.

기억의집 2016-05-02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있는데 단발머리님처럼 역시 하루키! 이러면서 읽고 있어요. 하루키 글은 사물을 보는, 세상을 보는 자신의 세계관이 본인이 의도한대로 쓰는 것 같아요. 어제 하루키 읽으면서 문득 나보코프도 문장이 어려웠는데..그도 하루키처럼 곱씹은 사유의 결과물일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루키,,참 설명하기 힘든 멋진 작가에요.

blanca 2016-05-03 11:51   좋아요 0 | URL
하루키,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은 정말 특별하구나, 정말 글을 쓰는 사람이구나, 싶어요. 사물을 보는 눈, 그리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작업에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어요. 육십 대 중반 넘어서도 건강한 몸도 부러워요.--;; 몸에 대한 이야기도 참 배울 게 많더라고요.

마녀고양이 2016-05-15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간되었을 때는 조급함으로 구입해놓고는,
손도 못 대고 있는 책이네요. ㅠㅠ. 하루키의 강박적일 정도로 느껴지는 성실한 실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느껴지는 소설의 틀이 모호한 자유로움, 방황이 늘 매력적입니다. 삶의 치열함에 대한 극단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데 블랑카님의 글에서 ˝청량함˝이라는 단어, 꼭 맞게 느껴지네요.

blanca 2016-05-16 14:45   좋아요 0 | URL
하루키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나이듦과는 정말 다른 모습이 있더라고요. 나이들면서 사람이 유연함과 개방성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은데 육십 중반이 되어서도 청년 같은 면면이 죽지 않는 걸 보면 이래서 하루키구나, 싶어요. 저도 하루키 책은 나오면 막 초조해요. 빨리 사서 읽어줘야 될 것 같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