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를 거진 다 보내고 나며 달라진 것은 책에 대한 마음가짐도 해당된다. 이제 다 소유하고 다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한번 읽었다, 해서 '읽었다'고 단정짓지 말고 정말 단촐하게 소유하고 제대로 읽어서 내가 늙어 남은 사람들이 나의 책 처분으로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해서(물론 아닐 때도 있다) 읽는 것도 가지는 것도 처분하는 것도 조금 더 신중해지기로 했다.

 

얼마 전 고전에 대한 재미를 처음 일깨워 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처음 세 권을 다 읽고 덮었을 때에는 톨스토이의 필력에 압도당해 할 말을 잃을 정도의 감동이 있었는데 그 정도의 감동이 또 다시 오지는 않았고 대신 처음 읽을 때에는 놓쳤던 좀더 디테일한 면들이 눈에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안나보다는 안나를 떠나보낸 그녀의 남편이,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의 정점보다는 그들의 사랑이 일상으로 가라앉으며 각자 겪게 되는 그 지루한 일상과 지리멸렬한 다툼들이, 레빈의 신중함과 검소함보다는 융통성 없는 면과 모순된 면면들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톨스토이 그 자신이 평생 가진 것들과 가져야만 한다는 것 사이의 괴리에서 괴로워했던 것 만큼 수많은 상충하는 인간들의 수많은 그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언행들이 대단히 핍진성 있게 다가왔다. 이것은 정말 죽은 이야기가 아니라 톨스토이 주변에서 살아갔던 인간들의 모습을 그대로 적어낸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생생해서 이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마다 그들 모두가 다시 일어나 그 비극적인 삶을 다시 살아내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

 

 

 

 

 

 

 

 

 

 

 

 

 

 

 

톨스토이의 인간들은 우리 현실에서 쉽사리 만나는, 하지만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가당착, 위선, 위악, 자기기만, 고결함을 한데 모아 보여준다. 어제는 불우이웃 돕기를 이야기했던 사람이 오늘은 슬척 새치기를 하는 모습, 분명 물질적인 것을 포기하고 고결한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기로 결심했는데 눈 앞에 아른거리는 예쁜 옷이나 가방 앞에서 괴로운 마음이 나의 것이거나 그의 것이라고는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법이다. 언제나 옳은 사람은 언제나 고결하고 야비한 인간은 내도록 그러기를 저도 모르게 예상하고 바라기도 하는 게 조금 더 쉬운 길이니까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미묘한 지점을 톨스토이는 얄미울 만큼 잘 포착하고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대부분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거나 미워하기에도 적절한 인간형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나'이기도 하고 '그'와 '그녀'의 이야기다.

 

불륜에 빠져 아이와 남편을 떠나고 마침내 자신의 삶에서마저 떠나 버린 안나는 그래서 미워하거나 비난하거나 전적으로 이해하거나 사랑하기 힘든 인간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그녀가 떠난 자리를 애써 담담하게 가장하는 다소 냉혈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남편 알렉세이의 마음 속에서는 한없이 많은 번민과 고통이 오고 간다. 사랑의 열정에 호응했던 젊은 귀족 브론스키는 그것이 서서히 스러져 가는 자리에서 점차 자신의 것들을 기억해 내고 찾아 나가며 결과론적으로 안나를 고문하게 되지만 그러한 모습 또한 사실적이다. 사랑을 택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추구하고 받들여지는 가치를 전적으로 등지고 살아갈 수 없는 그들의 모습에서 톨스토이는 단선적이거나 단편적인 삶의 경로는 실제적이지 않다는 점을 간파하여 보여준다.

 

이러한 것들이 두번째에서야 겨우 보였으니 나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이 책들 어느 하난들 제대로 읽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듯하다. 다시 읽으면 또다른 것들이 보이고 놓쳤던 그 수많은 것들이 하나씩 돌아올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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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0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세번은 읽으라 하나봐요 .^^
읽을 적마다 뭔가 캐내어지는 기쁨 ㅡ

blanca 2015-12-10 14:07   좋아요 1 | URL
아, 한번 더 읽어야겠군요.^^ 사실 저는 기억력 자체가 별로 안 좋아서 두번째 읽어도 영 처음 읽는 느낌 받는 책도 종종 있더라고요...

[그장소] 2015-12-10 19:48   좋아요 0 | URL
그런 책이 좋은것 같아요..전혀 새롭다고나 할까요.
분명 읽었는데 ..억울하긴해도..또 새로운!

물고기자리 2015-12-09 19: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시 읽는 걸 참 좋아해요. 새로운 이야기도 물론 좋지만, 같은 이야기 속의 재발견에서 독서의 진정한 기쁨이 느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해엔 오직 재독만 해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아직 읽지 않은 책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완전한 실천을 할 순 없었어요ㅎ 소장하고 있는 책의 양도 되도록 일정량을 넘기지 말자며 해마다 한 번씩 정리하고는 있는데 좀 더 나이가 지긋해지면 세 번이상 읽었던 책들만 간직하겠단 생각도 해보고 있어요. 그때 제게 남은 책들을 보면 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스스로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ㅎ

blanca 2015-12-10 14:12   좋아요 2 | URL
아, 물고기자리님은 이미 이런 생각 하셨군요! 그런데 또 책 욕심은 덜어지지 않는 게 나이들어 자그마한 서재라도 확보해 다 잘 꽂아두고 톺아보고 싶은 소망이 있어서요...

[그장소] 2015-12-10 19:52   좋아요 1 | URL
아 ㅡ세번이상 읽은 책만 ...그런데 책은 있으면 늘 꺼내보게되요.어떤 확인이든 ㅡ뭐 그런 걸 필요로해서든 ..작은 계기로든 ..늘 손닿는 곳에 두는게 관건인것 같아요..

후에 ㅡ자신의 모습을 책으로 돌아본다는 생각은
참 근사해요~^^

물고기자리 2015-12-10 21: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소설은 부분만 재독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완독하진 않더라도 부분부분 늘 확인하는 책들이 있어요. 그마저도 아닌 책들은 미련 없이 정리하는 편이고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 눈도 침침해지고(상상해보니 슬프네요ㅜㅜ) 더 이상 독서랄만한 행위를 못 하게 될 때가오면 읽고 또 읽어서 마치 나의 이야기 같아진 책들만을 제 곁에 두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이런 생각을 왜 하게 됐냐면요, 책을 좋아하시던 제 아버지께서 어느 날부턴가 가져다 드리는 책들을 더 이상 읽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이젠 읽는 게 힘들어지신 거였어요. 그리고 책장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책들을 보니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를 대신 말해주는 것 같더라고요. (아버지의 일기 같은 그 책들은 언젠가 제가 가져오려고 해요..)

그래서 전 어떤 시기가 오면 읽지 않은 책엔 미련을 거두고 재독을 하며 마지막까지 곁에 두고 싶은 책들만을 간직하겠단 생각을 해봤어요. 언젠가 더 이상 읽는 것이 힘들어지면 만져보고 넘겨보기만 해도 좋을, 정말 내 것 같은 책들로만 제 책장을 채우고 싶어서요. 그래서 지금도 채우고, 비우고를 계속해서 하는 것 같아요. 잘 비워야 잘 남길 것도 같거든요.. 제 머릿속도 그래야 할 텐데 말입니다ㅎㅎ / 근데 블랑카님의 글에서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blanca 2015-12-11 13:09   좋아요 1 | URL
ㅋㅋ 좋죠. 왠지 집에 초대한 기분이 드네요.

cyrus 2015-12-10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나 까레니나》를 두 번 완독하시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예전에도 블랑카님의 서재에서 이 소설에 관한 글을 본 것 같아요. ^^

blanca 2015-12-11 13:08   좋아요 1 | URL
톨스토이가 이야기하고 싶은것들을 인물로 표현하려 할 때 좀 지루하거나 거친 대목들이 있긴 한데 또 그게 톨스토이의 매력인 듯도 해요. 러시아 작가들 특유의 색깔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십 대 때에는 그냥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기에 바빠서 읽거나 곱씹을 여유를 못 낸 게 너무 아쉬워요. 그런 점에서 cyrus님이 참 부럽습니다...

[그장소] 2015-12-10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ㅡ아버지의 일기와도 같은 책들 ㅡ이라니..
참 좋네요..제가 살던 곳은 어릴때 수해가 잘 나는 곳여서 그랬는지 아버지는 책을 모아두지 않으셨는데..어디서오는지 몰라도 많은 책들이 보이다 자취를 감추곤 했어요.
그걸 안계실때 ㅡ몰래 훔쳐보는게 제 낙이었고요.
아마 나중엔 신변 정리를 늘 해오신 거란 생각을 하게되었지만 그게 참 서운했어요.아무것도 남긴게 없어서요.

제가 일찍부터 모아온 책들은 이제 아껴도 책등이 바랬어요.
이십년 넘는시간..가까이 같이 다녀서..^^
해가 더할수록 단상들이 빼곡해..함부로 버릴수도 없죠.
누굴 빌려주지도못하고요.
나중엔 제 딸이 보면 싶어요.저는..


희선 2015-12-11 0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옛날에는 책이 별로 없어서 읽은 책 여러 번 보고 외우기도 했겠습니다 톨스토이 책도 그러지 않았을지... 지금도 자신이 좋아하는 책 여러 번 보는 사람 있겠네요 저는 아직 이 책 못 봤습니다 언제 볼 수 있을지... 세권이나 되니 마음먹고 봐야 하겠네요 첫번째, 두번째 볼 때 다르겠죠 그런 것을 느끼고 살아야 할지도 모를 텐데, 지금 세상은 책이 많네요 곁에 두고 보고 싶은 책을 찾은 사람은 기쁘겠습니다(블랑카 님은 그런 책 있을 것 같네요)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희선

blanca 2015-12-11 13:11   좋아요 1 | URL
이러다 또 갑자기 막 다 새로 읽고 사모으고 싶어질 지도 모르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