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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결정 -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ㅣ 일상인문학 5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9월
평점 :
빨간 표지, 채 백 페이지가 되지 않는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작가는 여기에서 자신의 철학 전공을 십분 살린다. 과장도 현학도 없다. 정갈하고 명료하고 쉬워서 지루하지도 않고 집중력이 흩어지지 않는다. 분주한 나날들 속에서 무언가가 정말 바로 중요한 그 '무엇'이 상실되었다고 여겨진다면 조금 시간을 내어 페터 비에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같다.
무엇보다 지금 나에게 참 필요한 이야기들이었다. 작년부터 가족을 포함해서 건강과 관련하여 좋지 않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몸이 화두가 되어버리면 여타의 것들은 모두 부수적이고 사소한 것들로 밀려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고 무기력과 두려움이 밀려온다. 내가 어쩔 수 없으니 어쩔 수 있는 것들 앞에서조차 압도당한다. 산다는 것은 늙는 것이고 늙음은 병마와 가까워지는 일이니 더욱 간이 오그라든다. 이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을 보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저 나이에도 건강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삶의 의지를,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고 생을 엮어 나가는 일은 대단한 일이다.
하나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과 소망을 주관하여 말 그대로 삶의 작가요, 그의 주체가 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사건을 단순히 맞닥뜨리거나 당하여 그 일로 인한 경험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압도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주체가 되는 대신에 단순히 경험이 펼쳐지는 무대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자기 결정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런 차이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요 며칠 느꼈던 우울감이 명징해졌다. 나는 내가 나의 삶의 주체가 아니라 내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배경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력감을 느꼈고 따라서 자기 결정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나이들며 살아가는 일들은 이러한 일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고 그게 삶이라고까지 비관하기도 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어 버리면 사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힘들다. 저자는 물론 인간에게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무조건적 낙관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자신의 경험에 통합하게 되는지 그 이력에 초점을 맞추고 적어도 이러한 것들을 체계과하고 범주화하고 통합하며 나의 이야기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흔히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자기 결정의 힘에 주목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에 있어 읽고 쓰는 일이 가지는 신묘한 역할에 대해서도 덧붙인다. "소설 한 편을 쓰고 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그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라는 이야기는 꼭 읽힐 것을 감안하고 쓰는 일이 가지는 가치가 아니라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는 그 과정에서 자기 내면의 흐릿한 것들을 구체화하고 인식해 나가는 과정이 가지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이렇게 읽고 쓰며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되짚어 보는 것은 밖에서 휘몰아치는 그 개연성 없는 서사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어쩌지 못한다,고 그 한계를 체감하고 절망하는 일보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이야기 안에 들여 놓으며 내 삶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 일은 내가 내 삶에서 가지는 주도권의 회복의 관문이다.
수업 시간에 졸다 나를 깨우는 이 한 마디. 단상에는 소설가로만 알고 있던 철학을 공부한 페터 비에리가 있다. 그래서 읽는 일은 언제나 힘든 나날들을 견디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