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 마카롱 에디션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어떤 이벤트 준비는 소비로 시작된다. 휴가를 가도 기념일을 맞아도 심지어 내 자신이 너무 우울하고 지칠 때에도 작고 소소한 것들을 사게 된다. 거창하고 값비싼 것이 아닌 한 자루의 연필일지라도 사물은 신기한 착각, 잠시 위로를 준다. 샬랄라한 원피스를 입고 갈 곳도 없고 꼭 구태여 가운뎃 손가락에 포인트 반지를 끼지 않아도 사람들은 나의 손가락에 시선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자는 인터넷 쇼핑몰을 기웃거리고 백화점 행사장에 목을 들이민다. 명품관은 '언젠가'는 이다. '사물'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도 '사물'을 지나치게 경멸하는 것도 다 '속물성' 지근거리에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살고 욕망하고 꿈꾸고 과절하는 과정에서 '사물'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지향이지, '지금', '여기'에서 단 하나의 흔들림 없이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지반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한때 나도 그럴 수 있다고 믿었고 거의 모든 것의 소비에서 멀어졌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또다른 결핍에서 비롯된 일이었기에 아무 사물도 남지 않은 거의 소비가 없었던 시간들은 돌이켜 볼 때 더 큰 슬픔을 남긴다. 그때는 '일'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어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던 시간. 그 시간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시절 회사에 가지고 다녔던 다 낡아빠진 가방을 보면 지금도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어쩐지 가슴 한켠이 시큰하다.

 

사물들에는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여자는 '이야기'를 꿈꾼다. 그것은 명백히 환각이자 착각이지만 그럼에도 일상이 조금은 덜 단조롭고 덜 무기력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소비를 지양하는 책을 사대는 또 다른 모순 속에서 잠시 사물에서 멀어져 보고자 하지만 그 사물들은 구심력으로 다시 여심을 당긴다.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은 아주 얇은 책이다. 하늘색 마카롱 빛깔 표지가 손안에 쏘옥 들어온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그 어떤 소설과도 다른 아주 독특한 경이로운 이야기.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소설에 빠져 있는 사람도 누구나 잠시 이 책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굉장히 건조한 척 담담한 척 이야기하는 실비와 제롬의 그 사물들에 허덕이는 탐닉, 좌절의 여정이 너무나 우리의 그것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자가 되고 싶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누구나 이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돈은 있어도 너무 없어도 그것에 끄달리게 된다. '돈' 이야기 앞에서 초연하려면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도의 자립이 가능한 경제적 여유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 자본주의 사회가 생존의 조건에서 더 나아가 행복의 조건까지 모두 돈의 가치로 교묘하게 환원하여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필요해서 사는 물건보다 정말 가능해서 꿈꾸는 미래상보다 항상 잉여의 것들이 욕망의 언저리를 부유하고 있다.

 

부자가 되고 싶고,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집착은 대개 사소한 물건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는 행위로 드러났다.

-p.27

 

실비와 제롬은 파리의 사회심리 조사원이다. 프티 브루주아 출신의 젊은 남녀는 파리의 상점가, 벼룩시장이 열린 곳들을 기웃거리며 각종 사소한 것들을 사모은다. 물론 그들의 지향과 꿈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지금', '여기'는 그들에게 임시 거처, 유예된 곳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물론 더 많이 욕망했다. 조르주 페렉이 쫓는 그들의 일상은 우리가 소진해 버린 청춘들과도 닮아 있다. 찰나적인 즐거움이 난무하는 이십 대, 그만큼의 불안과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이 흘러넘치는 시간들의 묘사. 시간은 흐르고 친구들은 '안정'을 찾아 떠나간다. 실비와 제롬은 용단을 내린다. 튀니지의 교사 자리로 탈출을 시도한다. 그곳은 파리 만큼 사물들이 지배력을 발휘하는 곳은 아니었다. 실비와 제롬은 마침내 욕망을 잊기 시작하고 그 지루하고 고요하게 흐르는 일상에 함몰되며 무기력으로 빠져든다. 안정, 안온함, 자족과는 다르다. 그것은 권태였다. '돈'에서 탈출하여 '돈'으로 뛰어들어갔지만 '그곳'은 그들이 바라보던 곳이 아니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에필로그는 엄정한 가정법을 동원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계속될 수도 있었다."

 

파리로의 귀환, 다시 '사물'과 '욕망'이 조우하는 지점으로의 끊임없는 내달림. 그리고 또 다른 '그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여기 지금 우리와 얼마쯤 닮아 있어 섬뜩하다. 에필로그는 마치 우리 모두의 그것과 닮아 있다.

 

 수단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일부이다. 진리의 추구는 그 자체로 진실해야 한다. 진실한 추구란 각 단계가 결과로 수렴된 수단의 진실성을 의미한다.-카를 마르크스 p.139

 

에필로그 뒤의 첨언. 이야기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인지 솔직히 납득이 잘 안 가면서도 삶의 모든 추구의 과정 자체에 대한 무게에 대한 조언으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작금의 어지러운 상황들에 가하는 엄중한 경고 같아 더 와닿았다. 조르주 페렉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들켜버리고 만다. 예리한 문장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지대 앞에서 읽는 이들은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 다시 한번 멈추고 심호흡 하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나의 삶을 모두 좌지우지 해버리고 말것이라는 깨달음. 그가 기획한 이야기의 구성 자체가 우리 삶의 흐름을 축약해 놓은 듯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가정법들. 그러니 "~ㄹ수도 있었다"의 무게를 항상 의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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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4-15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언제나 부자일 수 있는데
막상 `부자`는 저 멀리,
아주 아득한 곳에만 있다고 여겨...
그만 오늘 이곳에서 내가 어떠한 부자인가를 미처 못 보고
그냥 달리고 또 달리는구나 싶기도 해요...

blanca 2015-04-16 13:12   좋아요 0 | URL
맞아요. 가끔씩 멈추어 서면 보이는데 또 달리다 보면 그런 헛된 끄달림에 시달리고 있고...
지금 여기에서 `나`인 것으로 충분히 행복해 하도록 노력해야겠어요.

cyrus 2015-04-15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맞는 말인 것 같아요. 돈이 없는데도 돈으로 원하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죠.

blanca 2015-04-16 13:14   좋아요 0 | URL
죽기 직전에도 다 해탈하고 깨닫는 것이 아니니까. 평생을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듯해요.
어떤 강렬한 감정의 기저를 들여다 보면 대부분이 어떤 욕망, 결핍이 있더라고요.
그럼 아직 멀었구나,하며 또 한숨쉬고. 그래도 cyrus님은 제가 그 나이 때 몰랐던 많은 것들을 읽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습이 참 부럽답니다.

Jeanne_Hebuterne 2015-04-15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굴데굴 굴러서 구렁텅이 안에 쏙 빠지는 것이 한순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 내가 지금 어디에 있지!`하고 눈을 치켜뜨던 순간.
그 두 순간이 한끝 차이라는 것을 조르주 페렉은 참 쉽고 간단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요. 문제는 자성과 자각, 생각은 늘 그것이 남의 것일 때에만 쉽다는 것. (제겐 그랬어요ㅠㅠ 저 그리고 오늘 후레쉬베리 사서 블랑카님의 이 좋은 리뷰를 읽으며 그만 한번에 여섯 개 `마셨`어요ㅠㅠㅠㅠ 누굴 탓하겠어요 그냥 다 내가 많이 먹어서......)

blanca 2015-04-16 13:16   좋아요 0 | URL
`한끝 차이` 이 말 좋네요.^^ 맞아요, 어느 책에서 인간들이 사실은 대부분 아주 비슷한 평균적 대응, 반응을 보이는데 자기만은 특별할 거라 생각한다는 지적이 떠올라요.

후레쉬 베리. 저도 그래요. 한 개로 절대 끝나지 않아요.--;; 여섯 개는 좀 과한대요 ㅋㅋ 저는 며칠 전에 아이가 베란다에 던져 놓은 후레쉬 베리 두 개를 발견하고 원샷했지요. ㅋㅋ

프레이야 2015-04-1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좋은 리뷰가 그리웠어요. ^^

blanca 2015-04-20 13:32   좋아요 0 | URL
저도 프레이야님이 그리웠답니다. 돌아오신 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