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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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는다.

열네 살, 스무 살, 때로는 나이조차 기억나지 않는 태초의 것만 같은 기억들.

다시 나는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았던 마흔의 철책 앞에 선다.

스무 살은 꿈꾸었지만 서른은 실감나지 않았고 마흔은 차마 상상해 내지도 못한 나이.

이제 나는 쉰도 되고 환갑도 되고 고희연도 치를 수 있기를 서글프지만 현실적으로 소망한다.

나도 늙고 늙어가고 있고 더 늙어가다가 마침내 죽을 것이다.

이 당연한 명제를 이제는 실감한다.

삶은 스무 살이 세계 전체를 포박하고 내가 딛는 발자욱이 그려내는 지도로만 완성되지 않음을 배워가는 과정과

다름아니다.

 

<늙어감에 대하여>라는 이 추연한 제목 아래 처절하게 인간의 늙어감과 그것의 종말을 기술한 저자의 도저한 탐구, 모색이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영화의 클라이맥스 못지 않은 울림을 자아냈다. 순간 아연해졌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그 어떤 위로도 위장도 에두름도 없는 그 직설적인 산재한 진실들에 인간으로 태어나 산다는 게 얼마나 커다란 모순과 덧없음과 역설에 지는 것인지를 동의해야 하는 과정임에도 저자 장 아메리의 그 담백하고 처연한 문장들에 절로 목울대가 울렸다.

 

그 앞에서 '늙어감'은 그저 세계와 환상을 잃어가고 죽음이라는 도저히 풀길없는 하지만 자명한 역설의 진리로 한 걸음씩 내딛는 초라하고 처절한 행보다. 성숙, 세계를 보는 시선의 확장, 관용, 성숙의 휘장은 그의 예리한 언어의 칼날로 난자 당한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씩 더 늙어가며 죽음으로 행진하는 우리 모두를 지칭하는 A의 시선이 관통하는 그를 둘러싼 세계들, 그리고 그것에서 밀려나며 자신이 쌓아온 시간들로 향햐는 시선들의 흐름은 마치 한편의 소설 같다. 실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시선들이 군데군데 녹아들어가 있다. 장 아메리는 자신이 실제로 만지고 느낀 것들을 충실히 자신만의 언어로 쓰다듬고 훓어내어 흩뿌린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천착했던 속물성이 횡행하는 사회의 실체는 장 아메리 앞에서도 가감없이 드러난다. 우리의 고향은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소유의 세계이며 소유가 있어야 사회적 연령을 부여받는다는 그의 지적은 우리의 늙음의 결이 사회가 부여하는 소유의 위계를 따라 스며듦을 간파한 것이다. 늙는 것도 서러운데 그마저도 우리는 사회적 연령의 심판 하에 쌓아놓은 재물들을 보여주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이렇게도 희망을 깨부수는 이야기들. 한마디로 '늙음'과 '나이듦'은 인간이 직면한 '죽음'이라는 그 불합리하고 역설적인 모순의 마침표로 규정된 '존재'와 얽혀 하나의 '무의미'로 회귀해 버린다. 실제 장 아메리는 오십 대 중반에 이 저술을 하고 십년 뒤가 지나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텍스트를 위해 산화해 버린다.

 

A는 균형을 깨뜨리며, 타협을 폭로하고, 통속화를 짓밟으며, 싸구려 위로를 깨끗이 쓸어버리는  그 어떤 일을 해냈을까? 그는 그랬기를 희망한다. 남은 날들은 쪼그라들며 메말라 비틀어진다. 그럼에도 그는 진리만큼은 간절히 말하고 싶었다.

-p.211

 

A는 다름아닌 장 아메리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해냈다. 하지만 그의 인간의 삶에 대한 그 가차없는 메마르고 명징한 통찰은 또 다른 역설과 만난다. 찰나의 경건함. 그것이 꼭 대단한 의미와 만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남은 날들이 쪼그라들며 비틀어지고 지나간 나날들이 바람에 날아가 버렸으므로 '지금', '여기'가 가지는 무게는 한층 더 한량없다. 그래서 어제보다 오늘 보는 거울에서 나의 얼굴은 빛을 잃었지만 벚꽃비를 맞으며 향그러운 그 덧없음을 향유하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싶다. 그래야 살 수 있다. 그가 오십 대에 마침내 육십 대에 얻은 깨달음과 사유가 삶에 대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의 한계까지 밀고 나간 것이라 할지라도 남는 것들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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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4-10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는다`고 생각하면 늙으니,
`새롭게 새 하루를 산다`고 생각하면
나이가 드는 아름다움으로 가리라 느껴요

blanca 2015-04-10 13:56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 말씀처럼 그렇게 나이들어 가야겠어요.

yureka01 2015-04-10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고맙게 읽었습니다.....

blanca 2015-04-10 13:56   좋아요 0 | URL
시간 내서 읽어주신 게 감사하죠^^

라로 2015-04-10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노 홀릭 리뷰 얼렁 써주세요~~~~ 안그럼 데모 할래요~~~~~ㅎㅎㅎㅎ

blanca 2015-04-10 13:58   좋아요 0 | URL
아, 나비님, 솔직히 제가 그 책은 리뷰를 못 쓸 것 같아요.
피아노에 대한 소양이 부족해서 저자 설명 따라가기도 바빴어요.
저도 어렸을 때 레슨 받고는 최근에 다시 학원을 다니다 그만 둔 상태인데
아무래도 성실하게 배우지 못해서 그런지 다 새롭더라고요.

프레이야 2015-04-1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살한 작가군요. 죽음으로 귀결하는 우리삶의 끝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 존엄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blanca 2015-04-20 13:33   좋아요 0 | URL
아... 언제나 `죽음`은 참 어려운 문제예요. 장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