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작품이 영화화된 것도 보고, 몇 부작으로 드라마화된 것도 보고, 심지어 그녀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만든 북클럽에 관련된 영화까지 봤지만, 정작 그녀와 거의 동일시되다시피 하는 그 유명한 '그것'은 아직이었다.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독신의 남자는 아내가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로 시작하는 <오만과 편견>이 그것.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문학동네)와는 다른 차원의 출발이다. 클리프턴 패디먼은 <평생독서계획>에서 이것을 "개인 생활의 행복이 걸려 있는 아주 사소한 일들"로 묘사한다. 이미 귀족이었던 안나로서는 사실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독신의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어쩌면 여기에서부터 그녀의 사랑은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재산이 남자 후계자가 없어 먼 친척에게 상속이 되는 불합리한 제도의 피해자에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에서 다섯 자매의 차녀였던 엘리자베스가 만 파운드의 상속자 다아시와 밀당을 하다 결국 행복한 결혼을 하게 된다는 결말은 사실 속물적이고 진부하다고 폄하될 것만은 아니다. 제인 오스틴이 그려 낸 백마 탄 왕자님과의 해피엔딩은 그 단순한 플롯이 본질이 아니라 그곳으로 가기까지의 그 머나먼 여정 속에서의 그 섬세한 언어들의 향연 속에서 반짝이는 재치와 위트와 유머가 이백 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데에 그 매력이 있다. 오백 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에 이렇다할 반전이나 급박함도 없건만 아무리 우울하고 책이 싫어지는 날에도 이 당당하고 적당히 속물적이고 재기발랄한 아가씨 엘리자베스가 무뚝뚝한 훈남 다아시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며 걸어가는 애정전선에 대한 호기심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임을 장담한다. <오만과 편견>을 시작한 순간, 우리는 적어도 심심하거나 무료하거나 고독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번역체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습니다."체다. 이러한 설명조의 문체가 작위적일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베넷 가의 다섯 딸을 둘러싼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은 친절한 설명체의 어조와 한데 뭉근하게 어우러진다. 중반이 넘어가면 딱딱한 반말은 이 아리따운 아가씨들의 해프닝을 말하고 듣는 데에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마저 들게 되니 번역자의 시도는 성공한 셈이다. 제인 오스틴 특유의 해학과 유머가 시간과 공간의 차이나 한계를 넘어 우리 어휘만의 독특한 배려, 참견의 색깔이 섞인 높임말들과 멋진 콜라보레이션을 이룬다고나 할까. 여튼 아쉽게도 원작의 묘미는 맛보지 못했지만 그 아쉬움도 어느 정도 희석될 정도다.

 

영화에서도 어느 정도 그려지기는 했지만 엘리자베스의 가족은 사실 그녀의 앞길을 막는 역할을 할 정도로 무례하고 속물적으로 그려진다. 엘리자베스는 친정가족들에게서 어떤 지지나 응원,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운 감정을 가진다. 실제 다아시가 그녀에게 다가오는 데에 친정 동생들의 어처구니 없는 방종한 행동들, 친정 엄마의 속물적이고 적나라한 언사들은 신분차 만큼이나 큰 장애로 작용한다. 제인 오스틴은 이러한 가족들의 부족함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런데 어쩌면 이러한 가족들의 행각들은 어떤 인간의 속물적인 욕망과 보편적인 실수, 기만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대목이 있어 배경으로만 작용하지 않는 감이 있다. 분별,절제, 겸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한 것들을 멀찍이 치워버리고 마음과 입에서 떠오르는 모든 감상, 욕망을 발설하고 때로는 행동에 옮기는 엘리자베스의 자매, 어머니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도 보이지만 일말의 공감을 얻을 구석이 있는 것이다. 제인 오스틴은 이 지점을 정확히 포착하고 공략했다. 클리프턴 패디먼이 이야기한 것처럼 제한된 주제에서 고득점을 올릴 수 있었던 그녀의 강점은 모든 인간의 적나라한 해부가 설득력을 얻을만치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독자들이 즐겁게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은근히 남의 사생활에 관련된 뒷얘기, 불행 등을 안주 삼으며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는 이웃들로 만들어진 자매의 마을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제인 오스틴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근거리에 있다. 그녀는 동화를 쓴 것이 아니다. 가벼운 소재를, 가벼운 구도로, 그러나 이렇게도 가볍지 않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제인 오스틴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오만과 편견>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이 책에서 누릴 즐거움이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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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10-11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만과 편견`을 20대에 처음 읽었을 땐 몰랐는데,
나중에 아줌마가 되어 다시 읽어 보고(제대로 읽어 보고) 위대한 작품이라는 걸 알았죠. 대단한 작가구나, 생각했죠.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이야기의 흐름에 빠져들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손에 잡히죠.
가장 소설다운 소설 같았죠. 멋진 소설이에요.
님의 리뷰도 멋진 리뷰군요. ^^

blanca 2014-10-13 12:59   좋아요 0 | URL
페크님, 이십 대에 읽어보셨다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더 달달하고 공감할 수 있는 대목도 많았을 것 같아요. 저도 페크님과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인 오스틴은 정말 작가구나, 작가란 만들어지는 부분도 있겠지만 이렇게 태어나는구나, 싶은. 왜 사람들이 그렇게 제인 오스틴에게 열광하는 지 십분 공감이 갔어요. 무엇보다 정말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읽는 내내 참 행복했어요. 이미 읽어버려 더 이상 이런 책이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요. <엠마>도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세실 2014-10-11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다시 제대로 읽어야겠군요^^
님의 글 읽으니 막 읽고 싶어집니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오만과편견, 안나 카레니나 둘다 잘 어울렸어요^^

blanca 2014-10-13 13:00   좋아요 0 | URL
키이라 나이틀리는 예전에 저랑 친했던 여직원이랑 너무 닮아서 볼 때마다 그녀가 생각나요. 좋아하는 배우예요. 그런데 저는 솔직히 다아시역 배우 콜린 퍼스가 맞나요? 덜 멋있었어요--;;

2014-11-10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12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