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순환로를 지치는 차들의 헤드라이터의 불빛이 노면에 방울 방울 번져 서로 섞이는 날, 베란다를 내다보면 그 날이 비가 오는 날이다. 도로에 둘러싸여 산다는 건 무척 이색적이고 낭만적이고 동시에 성가신 일이다. 월요일 아침, 줄지어 서서 굼뱅이처럼 기어가는 차들에서는 절로 월요병 냄새가 풀풀 날린다. 금요일 오후 느릿느릿 밀리는 차들의 뒷꽁무니에는 주말의 휴식과 아껴둔 약속들의 기대가 겹친다.
오늘도 헤드라이터의 불빛은 바닥에서 물기로 번진다. 근처 대학교 서점에 가서 백만년 만에 핑크 표지의 잡지를 집어 들었다. 패션 잡지의 표제기사에는 폴오스터, 아멜리노통 등 14인의 위대한 이야기꾼들에 대한 기사가 예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패셔니스타와는 담을 쌓은 내가 생전 처음 보는 도발적인 눈매의 여배우가 노려보는 엘르를 들고 집에 왔다. 엘르와 나는 어울리지 않지만 가끔은 정말 기가 막히게 좋은 책과 작가들과 관련된 얘기들로 나를 매료시킨다. 몇 해 전에는 작가가 된다는 것에 그 어떤 문예지나 단행본보다 심도있게 리서치를 한 기사를 싣기도 했다. 만드는 사람들 중에 분명 탐서가가 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강력하게 든다. 캣워크를 하는 매력적인 모델 사이로 책에 대한 진지한 얘기들을 발견하는 건 색다른 즐거움이다.
"인생의 대부분을 방 안에 혼자 있었다"는 폴 오스터는 담배 연기 속에서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폴 오스터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못했다. 물론 시도해 보려는 생각은 있지만 매번 주문 전에 그는 정작 10년 동안 읽지 않았다는 서평을 참고로 다음에 읽을 것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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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건 참 이상해요. 병에 걸린 것 같죠. 어릴 때 글쓰기 바이러스에 감염됐는데 절대 고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 써야만 하죠. 쓰지 않고서는 사는 게 아니었어요.
-폴 오스터. ELLE와의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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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이러스에 시간과 강도의 차는 있지만 앞서거니 뒷서거니 감염된 파울로 코엘류, 아멜리 노통, 조너선 사프란 포어, 알랭 드 보통이 차례로 쓰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자신들의 그 숙명적 글쓰기에 대한 소회를 풀어 놓는다. 물론 아주 쉬크한 흑백의 초상화들과 함께. 맘씨좋고 너그러운 인상의 할아버지 파울로 코엘료는 페이스북, 트위터와 온라인 스토어를 부지런히 활용하여 독자들과 소통한다고 한다. 아멜리 노통은 글을 쓰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싶어 하루 실험해 보고 사춘기 계집애처럼 마음이 널을 뛰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토로한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글쓰는 일을 매일 그만둬야지 한단다.(세상에!)
다들 책에 대한 관심이 스러져 가고 있고 작가의 사생활을 궁금해할 파파라치가 별로 없는 세태를 절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책과 활자, 창작에 의해 선택 당하고 만 숙명에 굴복한다. 쓰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단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살기 위해 써낸 것들을 손에 쥐고 씌어 지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채굴하는 기쁨이 읽는 행위의동인이라고 해도 될까? 젊고 아름다운 여배우의 뇌쇄적인 눈빛의 표지가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면 작가들이 끊임없이 천착하는 생의 유한성과 허무는 영원에 대한 끌 수 없는 기대를 끄집어 내게 한다. 모든 모순, 대립, 한계가 한데 뒤섞여 있는 것 같은 잡지 한 권을 읽고 나니 왠지 아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