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미동 사람들
양귀자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고3때 독서실에서 이른 저녁을 먹으러 집에 다니러 갔다 다시 돌아가는 길은 정말이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이었다. 나를 달래려고 나를 끌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곤 했다. 쓸데없이 코끼리 분식점도 기웃거려 보고 88.89 버스 종점도 찍어 보고 레코드점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사도 곱씹다 보면 꼭 누구 아는 얼굴 한 사람을 만나 구태여 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을 섞으며 시간을 죽이다 사람 좋은 독서실 아저씨에게 목례를 하고 2층으로 올라가 혼곤한 식곤증에 허덕이다 한 시간도 제대로 책을 못 보고 신 나게 책가방을 싸던 시절이었다. 그 때는 무지개 건너편의 허황한 꿈을 향해 나의 별을 쏘아 올렸지만 정작 그 과정의 고단함은 내가 두 발 붙인 우리 동네를 기웃거리며 허덕허덕 살아가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그 파닥거리는 일상을 구경하며 달래곤 했다. 그리고 무언가 아주 대단한 저 편에 살게 될 줄 알았던 삶은 이 편의 동네에서 이럭저럭 타박타박 걸어가는 일상으로 건너와 버렸다. 이제 원래 삶이란 그런 것이고 그 와중에 건져 올리는 아기자기한 즐거움만으로도 어떤 순간은 충만해질 수 있다는 것을 수긍한다. 견디는 것이 삶이라고 얘기하는 음성이 꼭 비애로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 삶이 몇 년 째인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오늘이 며칠이지"하고 묻는 생활. 또 다른 십구일과 지금까지의 수많은 십구일들을 지나 오면서 그는 매번 십구일 이외의 다른 날만을 꿈꾼다. 오늘이 십구일이고 또 내일이 이십일이라면 그러한 날들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이십일 혹은 팔일인 줄 알면서도 이십일 혹은 팔일이 아니길 기대하며 눈을 뜨는 아침을 숱하게 지내온 그였다.
-<멀고 아름다운 동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천시 원미구 23통의 원미지물포, 행복사진관, 써니전자, 강남부동산, 형제 슈퍼의 그들. 번갈아 가며 때로는 주인공으로 관찰자로 주변 인물로 변주되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연작소설집은 환상이나 희망, 기대를 과장하고 꾸역꾸역 들이미는 대신, 삶의 그 적나라한 모순, 추레한 우리들의 속물 근성을 아찔하게 보여준다. 들키니까 아찔하고 날카로운 추억을 끄집어 내니 아프고 별 수 없음을 불쑥 들이미니 아연하다.  

그는 지하 생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지상으로 올라갈 날이 있기도 하겠지만 지금은 지하의 방 한 칸도, 지하의 일자리 하나도 목숨처럼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의 소망은 그저 일하기 위해 먹은 밥이었으므로 응당 자유롭게 배설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지하 생활자> 

자동차 바닥 커버를 재단하는 일로 목구멍에 풀칠을 하고 공동주택 단 하나의 화장실은 주인집의 안온한 은신처에서 꽉 입을 다물어 버리고 있으니 그는 매일 싸는 일이 전쟁이었다. 이 지하 생활자는 변의를 느끼는 일에서 가장 삶의 비애를 절절히 체감했다. 이리저리 낑낑 거리며 쌀 곳을 찾아 헤매다 거리에 주차해 놓은 자가용, 봉고차의 뒤켠에서 죄인처럼 안도감을 느끼는 그의 모습이 아렸다. 먹고 싸는 일차적 문제는 인간의 존엄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도덕과 예의, 염치를 논하는 작태는 때로 몰이해에서 나온 오만이 될 수 있다.  

부딪치고, 아등바등 연명하며 기어나가는 삶의 주인들에게는 다른 이름의 진리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인생이란 탐구하고 사색하는 무엇이 아니라 몸으로 밀어가며 안간힘으로 두들겨야 하는 굳건한 쇠문이었다.
-<한계령> 

 

주말 저녁 <아프리카의 눈물> 다큐에서 기근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이주하여 일하는 인접국경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여긴 본토 노동자들이 그들을 산 채로 불태우고 죽이는 광경이 지나갔다. 그저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뼈가 부서지도록 일했던 아버지가 불태워진 아들은 그럼에도 또 그 아버지가 죽은 나라로 일하러 갈 것을 얘기한다. 삶이란 고작 이런 것인가 싶을 때 아이의 어머니는 다 쓰러져 가는 움막 속에서 구식 다리미로 아들의 하얀 교복을 다린다. 그건 실오라기 같은,하지만 우리가 죽을 때까지 포기할 수 없는 하나의 별이다. 희망이다. 기만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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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1-17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귀자에서 이토록 전혜린이 진하게 느껴지다뇨.
전 다리미로 주름 한점 없이 다리는 것도 좋지만,
탈탈 털어 햇볕에 내어 말리는 것도 좋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1-01-17 22:02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빨래 탈탈 털어 정말 햇볕에 말리고 싶어요. 나무꾼님 댓글 읽으니 봄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네요. 요즘 너무 추워서 아파트에서 빨래도 자제해 달라는 방송이 나온다면서요.

후애(厚愛) 2011-01-17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귀자님 작품은 한 번도 못 읽은 것 같아요.^^;;
<원미동 사람들> 읽고 싶네요.^^

활기차고 즐거운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blanca 2011-01-17 22:03   좋아요 0 | URL
후애님도 읽으시면 좋아하실 것 같아요. 아스라한 옛 동네풍경이 정감있게 펼쳐진답니다. 옛날 생각도 많이 나고 그렇더라구요. 여기는 정말 너무 너무 추워요. 후애님도 즐겁고 활기찬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cyrus 2011-01-1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창 시절 때 <원미동 시인>을 감명깊게 읽으면서 배웠던게 생각나네요.
저는 <아프리카의 눈물>에 대한 내용을 인터넷 뉴스로서 접했는데,,
안타깝더라구요,,

blanca 2011-01-17 22:04   좋아요 0 | URL
원미동 시인! 저는 이걸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나서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두 번째인 것 같은데 도무지 언제 처음 읽었는지 기억할 수가 없더라구요. 아프리카의 눈물은 챙겨서 보고 무언가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 보려고 한다고 결심만 한 지 이 주가 되어가네요. 이삿짐을 풀면 꼭 행동으로 옮겨야 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마녀고양이 2011-01-17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는 것과 배설하는 것... 가장 기본적인 기쁨.
춥다고 우울함에 빠져있는 나에게, 반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블랑카님... 너무 추워요. 그져?

blanca 2011-01-17 22:05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 이번 주 토요일 이사. 후덜덜입니다. 짐 옮기는 아저씨들한테 미안하고 가족들도 심란하고 이래저래 참 그래요. 버릴 것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고 다독이고 있는데. 그래도 엄동설한의 이사는 무서버요--;;

잘잘라 2011-01-17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8,89버스 종점. 쌍다리 건너 그 종점이요?

blanca님, 당신은 누구신가요.
원미동 사람들을 읽고, 코끼리 분식과 88,89번 종점을 얘기하는, blanca님.

blanca 2011-01-17 22:07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쌍다리를 잘 모르겠지만 88,89종점과 코끼리 분식을 아신다면 혹시 같은 동네에서 자란 건 아닐까요?^^;; 긴장되는걸요^^;;;;;

비로그인 2011-01-17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쓰신글 알싸하네요.

알싸하다.. 사이다 한 병이랑 삶은 계란 손에 들고 기차 창문 너머 보던 기억이 납니다. 기차 안은 다들 왁자지껄, 지금의 삶과 저 너머 소리없이 흘러가는 풍경이 묘하게 같이 공존하던 그 기억말이죠..

비좁게만 느껴졌던, 길고 지리하게만 느껴졌던, 너무 많은 사람들로 매케한 냄새가 나던 그 기차안과 기차가 데려다 주는 길. 열차의 무거운 바퀴는 돌고 또 돌지만, 튼튼한 땅 위의 레일이 있어 길을 가는 것이겠지요..? 오늘도 나는 그 땅 위에 다시 섰구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덜컹거리는 발 밑 진동을 느끼며 말이지요..

blanca 2011-01-17 22:09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은 댓글도 시 같은걸요. 저는 기차 타는 걸 참 좋아했어요. 할머니집에 항상 타고 갔던 기차. 음악을 들으며 어둑어둑해지는 차창 뒤로 밀려나는 풍경 보며 눈물날 만큼 좋아했었는데. 그 기차를 이제 다시는 탈 수 없는 걸까요? 아니 바람결님 말씀처럼 또다른 기차를 타고 계속 꾸역꾸역 가고 있으니 지나간 풍경은 더듬더듬 추억 속에 묻어 버리고 말아야 하나 봐요.

프레이야 2011-01-17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희망이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제겐 슬프게 들려요.
그게 정말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때, 아니 희망이라는 단어 자체를 떠올릴 필요가 없을 때가
희망적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요.
고3 때의 회고담이 왠지 사랑스럽게 느껴져요.
아, 제게도 고3의 잊지 못할 시간이었지요.
기만일지라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믿는 것밖에 달리 뭐가 있겠어요.^^

blanca 2011-01-17 22:1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며칠 전에 김훈이 인터뷰한 거 티비에서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제 희망과 사랑을 얘기하고 싶다던 그의 모습은 삶의 의미 그 자체보다도 견뎌야 한다고, 별 수 있냐고 반문하는 그의 모습 뒤로 밀려나더라구요. 그 만큼 살고 또 보통 사람들보다 몇 갑절은 더 느끼고 고민했을 사람이 삶은 견디는 거라고 얘기해 버리니 저도 낙망해 버리고 말았어요. 프레이야님 행 간의 의미가 미진하게나마 와닿습니다. 고3.....나중에 대학생이 되어 우연히 다시 찾게 된 모교 근처 육교에 서서 그 지나간 시간들을 눈물 흘리며 추억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필 밤이었고 너무 일찍 찾아 버려 그런 것인지 사무치게 그립더라구요. 이제는 그리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어요.

2011-01-17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7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1-18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점 희망이 기만이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어요, 우리가~~~~~
혹한에 이사라뇨? 우째 이런 일이... 조심조심 이사도 잘 하시고 건강관리도 잘 하세요.

blanca 2011-01-19 21:47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그래도 다행히 토요일에는 날이 좀 풀린다네요. 감사합니다. 몸살기도 있고 이래저래 지치지만 힘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