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가 김영수인 걸 처음부터 알았다면 김연수의 책을 읽을 생각을 안 했을것 같다. 김연수를 관심 있어 하게 된 건 딱 두 가지 이유에서다. 이름이 이뻐서. 둘째 작가 시국 선언에 당당히 내민 얼굴이 비겁해 보이지 않아서. 

 

 

 

 

 

 

 

그리고 시작했다. 일단 그의 문장들은 시인 등단 경력 덕택인지 노래 같고 경구 같아 참 이쁘다. 나는 소설을 읽었는데 줄 친 문장들을 모으면 시가 된다.  연인과의 프렌치 키스를 이런 식으로 묘사한다.

그 순간, 그때까지의 내 인생은 물론이고 과연 있을지 없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내 전생과, 그 전생의 전생과, 그 전생의 전생의 전생과, 그 나머지 모든 전생들까지도 아주 근사한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공부하는 소설가, 인문학적 지식을 소설에 녹여내는 재능이 있는 작가로 칭찬 받지만 때로 그는 자신의 지식과 공부를 과도하게 소설적 서사에 끼워 놓고 싶어하는 듯 넘친다. 천문학적 지식, 한문학, 근현대 역사가 졸아든 상상력을 눙치는 데 쓰이는 것은 아닌지 가끔 갸우뚱하게 되기도 한다. 김연수를 편애하지만 이 지점에서는 멈칫하게 된다. 오늘보다 항상 내일이 나아지고 있다는 연수님은 그러나 이런 약간 모호하고 넘치는 부분도 곧 귀퉁이를 잘 접어 매끈하게 만들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이 에세이집은 정말 그야말로 완전 근사하고 완전 웃기고 눈물난다. 작가 초년병 시절의 그 절절한 배고픔과 열망이 김연수의 재기와 솔직함과 만나 어떤 향연을 펼치는 지 김연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꼭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시로 마침내 등단하고 학생 식당에서 눈 마주치는 모든 학생에게 미소를 지어 주는 연수는 짝사랑했던 사람과 손 처음 잡은 날 길거리 사람들마다 다 등을 치고 다니며 여보쇼! 내가 오늘 뭘 한지 얘기좀 들어 주소!라고 하고 싶어했던 나의 그 어처구니없던 시간과 닮았다. 솔직하고 투박하고 여린 나날들을 잘 쓰고 잘 읽히고 싶다는 이차적인 욕심에서 물러나 그려 냈다는 느낌은 독자를 속일 수 없는 작가의 진정성을 추억하게 한다. 이 책 이후로 자기 얘기는 쓰고 싶지 않다던 그가 자신이 읽었던 책에 대한 얘기에 짤막한 소회를 곁들인 이런 책. 

 

  

소설의 인상적인 대목을 인용하고 거기에 겹치는 김연수의 체험과 감상을 한 페이지 정도 덧붙인 한 권과 현대 한국시들을 싣고 역시 개인적 소회를 곁들인 한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 부분에서는 사실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는 문구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만큼 추천 도서 목록을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정작 책에 대한 내용은 한 줄 단 한 단어 정도 아, 맞지, 이 책 얘기해야지, 정도로 첨언한 경우도 있다. 청춘의 연수와 마흔 중년의 연수는 많이 달라져 있고 익어 있다. 너무 이쁘고 너무 이뻐서 그었던 줄들은, 이제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의 말을 경청하듯 사뭇 다른 자세로 그어지게 된다. 

 

 

   
 

그러지 말고, 가능하면 편애하도록 노력합시다. 모든 걸 미적지근하게 좋아하느니 차라리 편애하고, 차라리 편애하는 것들을 하나씩 늘려가도록 합시다. <중략>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학고,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합시다. 우리가 이 세상의 판관도 아닌데, 공연히 공정해지려고 반대로 행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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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의 기분이 자주 더러워지는 걸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가만히 놔두면 비뚤어진다. 노력하지 않으면 매사에 하고자 하는 의욕이 사라진다. 

 
   

고로 사람 싫어하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고 중립적인 척 하고 걸핏하면 기분이 더러워지는 나로서는 김연수에 대한 사랑이 쭈욱 지속될 도리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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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7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8 2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9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9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9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0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1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11-01-07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우리가 보낸 순간>은 일단 샀는데 구성이 너무 실망스러워서 다시 안펼쳐봤었어요... 자기글이 1/3인 책이라뇨라뇨라뇨라뇨 ㅜㅜ 블랑카님 덕에 이제 다시 마음을 열고 볼 생각이 들었어요 고맙습니다 저도 연수가 영수지만 연수로 좋아요~ 좋아한 연수가 언 몇년째인가 ㅋㅋㅋ

... 2011-01-07 18:15   좋아요 0 | URL
저는 <우리가 보낸 순간> 2권짜리를 오프서점에서 들춰보고 아, 이건 구매를 하지 않겠어, 하고 결심했다죠. 예전에 김연수의 문장배달에서 이메일로 부쳐주던거 모아서 낸 책 같던데요? 그대신 <7번국도 Revisited>를 샀지요 ^^ 근데 김연수 소설은 에세이보다 잘 안 읽게되요, 제게 있어선 마치 하루키같아요.

그건 그렇고, 저는 웬디양님은 새벽에만 서재를 돌아다니는 여자사람인 (아니 뱀파이어?) 줄 알았어요, 오후에도 돌아다닐 수 있으신 거군요. 해가 빨리져서 오후에도 어두어둑하니까 그런가? 하하핫.

blanca 2011-01-08 20:27   좋아요 0 | URL
그런데 웬디양님, 저는 소설편은 좋았는데 시편은 영 난해하더라구요. 김연수의 글은 정말 조금이죠. 아무래도 작업하고 있다는 그 일본에 가서 신부가 된 형제 얘기때문에 바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도 연수님 특유의 그 재기와 말하다 만 것 같은 귀여운 문체가 참 반갑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1-01-0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님 책 한번 읽고 너무 안 맞아서 다 팔아버렸는데,
블랑카님의 인용구 너무 괜찮잖아요! 헉........ 이걸 어쩐다~~~

blanca 2011-01-08 20:28   좋아요 0 | URL
하하하, 마고님 말씀처럼 호불호가 확 갈리는 작가더라구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영 모르겠다고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런데 샀다 팔아 버리셨어요? 저도 그런 작가가 있나 기억을 더듬어 보는 중이에요.^^;; 김연수는 소설보다는 산문이 더 좋더라구요.

순오기 2011-01-07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수가 영수인지도 몰랐고, 그의 소설은 하나도 못(안) 읽었지만...메일로 받아 본 문장배달은 좋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보낸 순간>세트도 구매했어요. 내가 보낸 순간을 생각하며 천천히 보려고요~ ^^
새해에도 분홍공주님과 알콩달콩 재미지게 사시고, 좋은 리뷰와 페이퍼 기대할게요!!

blanca 2011-01-08 20:29   좋아요 0 | URL
메일로 문장배달 받아 보셨군요. 천천히 조금씩 읽어야 하는데 저는 약간 책을 숙제하듯이 읽어 치운다,는 강박이 있어서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 같아요. 순오기님도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서재의 큰 언니 자리도 지금처럼 쭈욱 계속 지켜주시기를....

poptrash 2011-01-07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이 페이퍼 제목 너무 귀여워요.

blanca 2011-01-08 20:30   좋아요 0 | URL
poptrash님이 7번 국도가 왜 절판(맞나요?) 됐는지 심히 안타까워하셨던 페이퍼를 기억해요. 더 멋지게 나왔더라구요. 귀엽다니, 고맙네요^^;;

세실 2011-01-0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글 읽으니 청춘의 문장들 다시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걸요. 전 평범하게 읽은거 같은데.....

blanca 2011-01-08 20:32   좋아요 0 | URL
세실님~ 아마 읽었던 저의 시점과 감정 상태로 더 인상 깊게 남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김연수에게 빠져 있던 상태라 전작주의를 해보자고 호기를 부리던 때였거든요. 하지만 전작은 커녕 몇 권 읽다 그만 두었지요--;;

후애(厚愛) 2011-01-08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겁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blanca 2011-01-08 20:32   좋아요 0 | URL
후애님도 그러고 계시죠? 저는 오늘 밤 버킷 리스트를 보게 될 것 같습니다.

2011-01-08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8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1-0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따님이 잘 자라서 친구하심.. 참 재밌으실듯 합니다. ^^
막 상상을 하니, 킄 웃겨요!!
김연수. 전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좀 깊이 읽을지도 모르겠지만요 ㅎ

오늘 아주 잠깐 눈 많이 왔는데요. 신경쓸 일 많으시겠지만 잠깐이라도 즐거운 토요일 되셨음 합니다.

blanca 2011-01-09 13:50   좋아요 0 | URL
커도 저랑 놀아줄까요 ㅋㅋ 김연수는 바람결님과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요. 두 분 다 시적인 면이 있어요.

아시마 2011-01-08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는 안그럴것 같은데 뜻밖에 호오가 굉장히 분명한 작가같아요.
흠. 사실 달리 말하면 매니아도 있지만 그다지 넓은 독자층을 가지지는 못한 작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럼에도 매번 많은 사람들이 나도 이제,라고 말을 하는 걸 보면, 뭔가가 있는(또는 있어보이는) 작가 인 것도 같고. ^^

글이 평이하다기보다는 맛이 뭐랄까, 아주 강한 맛을 내는 작가는 아니라서, 그냥 평이하게 두루두루 읽힐 것 같은 작간데도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이렇다는게 전 사실 신기해요.

그러나 저러나 나도 김연수가 영수가 아닌 연수라서 좋아합니다. 하. 하. 하.

blanca 2011-01-09 13:53   좋아요 0 | URL
그래요. 글은 말랑말랑한데 의외로 호오가 갈려요. 전 딸 연두를 자전거에 태우고 달리는 산문을 읽고 이끌리더라구요. 그 맘이 상상이 되어서요. 벌써 열 살이라지요. 아시마님. 저는 왜이리 작가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 걸까요--;;

아시마 2011-01-09 16:42   좋아요 0 | URL
김연수 딸 이름이 연두 였나요? 전 왜 열무로 기억하고 있을까요 -_-;;;
하기야, 열무라는 이름은 써 놓고보니 좀 심했다. 그때는 와 신선한 이름이다!! 했는데.
아니야, 아무래도 열무 아니었나? 잠시만요. 확인좀 해 보고. (아 이놈의 집착)

ㅎㅎㅎ <청춘의 문장들>을 확인한 결과 딸아이의 이름은 열무가 되겠습니다. ㅎㅎp.24

하긴 뭐, 진짜 이름은 연두이고 김연수가 그냥 열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제가 울 딸들을 이름으로 잘 지칭하지 않듯... ^^

저도 작가 사생활에 아주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중 하납니다. 우리 나중에, 작가 스토킹 협회 이런거라도... ㅎㅎㅎ

cyrus 2011-01-09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김연수 작가의 글을 좋아하시면 그가 번역한 그레이엄 그린의 <권력과 영광>(열린책들)을 추천합니다.
사실, 이 책 이벤트로 받은거라서 아직 안 읽어봤지만,, ^^;;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분들은
이 분의 번역한 작품도 읽게 되더라구요. 블랑카님도 아시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블랑카님이 세계문학에도 관심이 많으신거 같아서 댓글로 남겨봅니다.
즐거운 일요일 되세요. ^^

blanca 2011-01-09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안 그래도 그래서 카버의 대성당을 읽게 됐어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즐거운 일요일 보내고 계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