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영 헤어져 버려 도무지 볼 길 없는 사람들이 나의 꿈에서는 항상 말이 없다.
꿈에서도 나는 그립고 사무친다. 했어야 하는 말들은 꿈에서도 누락되어 있고 당신들은 생전의 가장
처연하고 아픈 모습을 재연한다. 

그 날 꿈은 또 그랬다. 나의 할머니는 여전히 슬펐고 초라했고 너무 많이 늙어 있었고 아팠다.
나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또 일어났다. 

내가 했어야 하는 말은 단 하나다. 사랑해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나의 네 사람은 다 그 말들을 듣지 못했다. 하지 못한 말들은 영영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내 마음의 가장 여린 속살 부근에 옹크려서 속살댄다.
내가 죽을 때까지 그 회한들은 함께 할 것이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다 우연히 그 그림책의 제사를 읽다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이제는 올리비아를 못 볼 나의 그리운 아버지께 

 

작가 이언포크너의 딸을 모델로 한 자신의 그림책 주인공인 '올리비아'를 더 이상 보지 못할 나의 그리운 아버지께, 라는 말은 내가 당신을 보지 못하는 그리움과 아쉬움보다 이제는 더이상 사랑했던 것들을 보지 못할 떠나는 이들의 그 마음을 챙기는 시선이라 생각되어 더 찡했다. 남겨지는 자들의 슬픔이 떠나는 이의 아픔과 슬픔을 압도하는 것이라고 누가 단정지을 수 있을까. 다만 남겨진 우리들의 그리움과 슬픔과 아쉬움, 사랑으로 그 상처를 메워주기를 허망하게나 바라본다. 영혼이라는 것이 제발 있었으면 좋겠다. 그건 나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한 변명거리이기도 하다. 

추운 날씨, 슬픈 소식들, 이사 문제 등으로 심란한 터에 우연히 어떤 분의 강력 추천 글을 보고 <세설>을 읽게 되었다. H님 서재에서 이 출판사의 실한 편집에 대한 얘기를 귀동냥하기는 했지만 받아보고는 그 촘촘한 자간과 개미허리만도 못한 여백에 압도당했다. 

 

 

 

 

 

 

 

처음에는 정말 눈이 피로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실로 꿰매는 사철 방식으로 책 배도 안 갈라지고 워낙 재미있어서 더 촘촘해도 좋았겠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1930년대 간사이 지방의 몰락한 귀족 가문의 네 자매들의 결혼생활, 중매 얘기들이 어찌나 사실감 있고 생생하게 잘 그려져 있는지 정말 오랜만에 넘어가는 책장이 아깝다,는 아쉬운 느낌을 가지게 됐다. 작가인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죽는 바람에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노벨 문학상이 돌아갔다,는 얘기를 구태여 동원 안해도 이 책은 충분이 정말 충분히 각종 사념들을 몰아내고 이야기의 즐거움에 몸을 맡길 수 있게 해주는 미덕으로 가치를 증명한다. 기가 막히게 재미있다. 

다만.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했던 시기라는 깨달음이 갑자기 끼어들기 시작하면 그녀들의 호화롭고 다이나믹한 삶과 정치 사회적 현안들에 대한 시선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그건 의식적이기도 하고 무의식적이기도 한 또 의도되기도 의도되지 않기도 한 반응이다. 이런 일본에 대한 양가감정은 한류문화에 관대하고 관광객들에게 지극하게 친절한 그들의 태도와 결코 과거의 잘못을 시원하게 시인하고 실리적인 배상 문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는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과도 닿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아내를 친구에게 양도한다는 공개 의사 표시를 해서 당시에도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에로티시즘적인 작품도 많이 썼던 작가가 전혀 에로틱하지 않고 여성적이고 아기자기한 풍속 묘사와 재미가 그득한 이런 책들 썼다는 것도 같은 맥락 같기도 하고. 

항상 회한이 들 현재의 실수 주위를 맴도는 나의 삶도 그렇고.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것이 결국 생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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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2-1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그 빽빽함 때문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을 좀 두려워해요. 이 책은 상당히 마음이 동하는군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읽었어요. 너무너무너무 재밌게요.

저도 내년 1월 말에 이사에요. 멀고 먼? 수원으로요. 경기도민이 되기 전에 전시회나 많이 가놓아야 할텐데 말입니다..

blanca 2010-12-17 21:14   좋아요 0 | URL
만치님, 저도 <아웃오브아프리카> 원작이 열린책으로만 번역되어 있어서 너무 읽고 싶은데 그 작은 글자에 겁이 나서 계속 못 읽고 있답니다. 정말 빽빽하더라구요. 그런데 또 똑같은 책값에 그렇게 활자를 빽빽히 박아 넣는 게 독자를 배려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재미있죠!! 재미와 감동을 겸비한 정말 보기 드문 수작인 것 같아요. 만치님도 이사가세요? 저는 근처로 가는 거긴 하지만 아이가 어리고 급작스러워 걱정이 많이 되요. 수원으로 가시는군요!

순오기 2010-12-17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언 포크너의 이야기에 마음이 출렁하네요~~~~~~ 울 아버지가 생각나서.

일본문학에 거리를 두는 나도 어쩜 일제강점기 영향이 아닐까 생각되는...

blanca 2010-12-17 21:16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아버님이 돌아가셨군요. 아, 그러실 수 있어요. 일본문화에 대하여 완전히 젖어들고 감동받는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과 거리낌이 저도 모르게 교육으로든 언론으로든 한 귀퉁이에 항상 있는 것 같아요. 온세상이 은세계가 되었어요. 순오기님 계신 곳도 그런가요? 제 남동생은 전라도에서 낼 열심히 상경하려고 한답니다. 오랜만에 세 형제가 다 모이기로 했답니다.^^

cyrus 2010-12-17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열린책들 세계문학 전집을 좋아하는데,, 평소에 일본문학을 많이 접하지 못한터라
아직 <세설>만큼은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은 작품입니다.^^;;

blanca 2010-12-17 21:17   좋아요 0 | URL
cyrus님, 그렇다면 이런 빽빽한 편집에 이미 익숙해져 계시겠군요^^ 저는 사실 열린책 세계문학전집은 처음이에요. 아주 재미있어요. 전혀 인내심이 필요치 않은 책이니 나중에 여유되시면 꼬옥 읽어 보세요.

후애(厚愛) 2010-12-17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전 가위에 눌려서... 자고 일어나면 가슴이 답답하고 아파요..

잘 지내시죠?
즐거운 연말 되세요^^

blanca 2010-12-17 21:18   좋아요 0 | URL
후애님, 가위에 눌리세요? 저 예전에 고3때 정말 너무 많이 눌려 그 고통 두려움을 알아요. 저는 정말 숨이 막혀 막 버둥대고 그랬는데...주무시기전에 행복한 생각들만 하세요. 새해에는 아무쪼록 건강하고 행복한 후애님의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랍니다.

비로그인 2010-12-17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이아몬드 링을 끼고 있어요. 너무 얇고 작아서, 이것보다 큐빅 시계가 더 존재감이 크더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아요. 전 완벽해지기 보다는 신선하고, 원본 그대로의 무엇인가가 되기를 원했으니까요. 물론, 내가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종종, 이 다이아몬드 링을 지금 마시는 커피 속에 빠뜨린다면 어떨까. 이 네임펜으로 슥 그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작은 다이아몬드는 너무 약해 보여요. 최선을 다해 손등의 광채를 더해줍니다만 네임펜이 옆에 있으면, 그 광채가 무모해 보여요. 이 컷팅이 불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걸 보면 때때로 난 좀 슬퍼집니다. 사람은 늘 같을 수가 없어요. 나는 그들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엔 명예 살인이 없구나. 있다면 어땠을까. 우리 나라엔 카스트 제도가 없구나. 있다면 어땠을까. 수드라의 삶과 브라만의 삶은 겹칠 수 있을까.

있을까와 없을까 사이, 제가 블랑카 님의 글을 읽었고 이런 생각이 물 밖으로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금요일 오전. 전 커피를 마셨고 이 서재에 오기 전엔 줌파의 unaccustomed earth를 주문했습니다. 날씨는 흐리멍텅하게 맑아요.

blanca 2010-12-17 21:23   좋아요 0 | URL
쥬드님....댓글을 읽으며 또 어렴풋이 쥬드님의 심중을 헤아려 봅니다. 무슨 얘기인지 어떤 아픔인지 어떤 충동인지 그 실체를 명확이 알 수는 없어도 느낌을 헤아려 봐요. 명예 살인과 카스트 제도. 인간 간의 정리에 개입하면 무서운 단죄가 되는 사회의 구속력이잖아요. 삶은 겹쳐져요. 순간이지만. 그리고 또 어긋나 버리고.

쥬드님의 줌파의 책을 읽고 참 많이 스산해졌었는데....어떤 감상을 느끼게 되실지 궁금해요...

마녀고양이 2010-12-17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님께 그 말이 안 나와요, 미안해요, 고마와요, 사랑해요....
아직도 쑥쓰러워서 못 하겠어요. 아마
부모님이 제 생일을 챙겨주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 같아요.
우리 코알라는 잘 앵겨서 참 다행이예요.

blanca 2010-12-17 21:24   좋아요 0 | URL
마고님 저도 그래요. 정말 친정부모님에게 사랑한다는 얘기는 도저히 못하겠어요--;; 벌써 남편도 그렇게 되어 버렸는걸요. 저도 딸아이만 부둥켜 안고 사랑한다,를 미친듯이 남발하고 있는데 이 얘기는 다른 사람들한테 하지 못한 것들을 그러 모은 것만 같아요.

oren 2010-12-17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한......
글 앞부분을 읽다가 저도 요즘 비슷한 감정들을 가슴깊이 느끼곤 합니다.
늘 건강하시던 아버님께서 요즘들어 조금씩 병환이 악화되는 것 같아서요.
지난 주말에도 입원하셔서, 병상에 계신 아버님을 뵈러 다소 먼 길(일산↔분당)을 오갈 때마다 '아버님과 함께 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노라면 자꾸만 가슴 속이 울렁거리더군요.

모순......
저는 종교는 따로 없지만, 한국을 떠나 뮌헨에 정착한 현각스님의 최근 인터뷰 기사는 무척 공감이 느껴지더군요.
* * *
-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기억하는 불자들이 많더라. 제일 좋아하시는 경은 무엇인가.
- "순간경! 이 커피향을 맡는 순간, 재즈를 듣는 순간, 걷고 이야기하고 시장에 가는 모든 순간, 뺨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친구와 악수를 하면서 감촉을 나누는 순간,순간,순간 ······"

blanca 2010-12-17 21:26   좋아요 0 | URL
oren님..가족 중에 아프신 분이 있을 때의 그 무거운 마음과 힘듦을 기억하고 있어요. 정말 마음껏 한껏 다 표현하고 안아드리셨으면 좋겠어요. 벌써 하고 계시겠지만요. 쾌차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현각스님, 제가 기억하는 그 하버드 출신의 스님이 맞나요? 아니면 혼동하고 있는 건지...순간경! 명언입니다. 순간 순간 마구 행복하고 마음껏 누리고 그렇게 지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요^^ 금요일밤의 여유와 펑펑 내린 눈의 행복 만끽하고 계시죠?

노이에자이트 2010-12-19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설>. 제가 갖고 있는 세로줄 2단 구식 번역본으로도 500쪽 가까운데 그걸 독파했군요.대단합니다.

blanca 2010-12-20 15:49   좋아요 0 | URL
노자님 세로줄이라구요? 세로줄이라면 예전에 <빙점>을 세로줄로 정말 힘들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정말 속도가 안 나더라구요. 이 책은 워낙 서사 중심이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그렇게 더디지는 않았어요. 세로줄이었다면 아직도 읽고 있을 거예요^^

노이에자이트 2010-12-20 17:51   좋아요 0 | URL
저는 세로줄에 익숙해요.돈을 아끼기 위해 헌책방에서 산 세로줄로 된 책들을 읽는 걸로 독서를 시작했으니까요.인문사회과학은 삼성문고로 시작했는데 국한문혼용에 세로줄이라 한자공부 겸 해서 읽었죠.소설은 을유문화사와 정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공부했는데 물론 본문이야 세로줄에 한글이지만 역주는 국한문혼용이더군요.누워 읽다가 그 자세로 문장 옆에 줄 그을 땐 세로줄이 더 편해요. 으하하하! 부럽죠?

2010-12-19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0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