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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평점 :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 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교수형> 중-
조지 오웰이 서 있는 지점이다. 꼬챙이처럼 마른 힌두인 죄수가 교수대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웅덩이를 피하려고 몸을 피하는 장면에서 그는 문득 깨닫는다.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식민제국주의 통치의 일원으로 복무하던 관료가 불현듯 피통치자의 생명의 무게를, 그 나름의 존귀함을, 하필 그 숨통을 끊어버리려는 찰나에 저릿하게 깨닫게 되는 이 지점에서 조웰은 자신의 삶이 다할 때까지 고통스럽게 서성거리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그의 사서 했던 방황과 가책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들은 그의 글을 끊임없이 읽게 된다.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을 소원했던 그의 에세이들은 그의 소망 만큼 대부분 정치적 비판 의식을 저변에 깔고 있고 재치있고 직설적인 문체들로 독자들을 흡입하고 있다. 식민지 버마에서의 경찰 생활 동안 겪은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회고와 참회, 이후 이어진 자발적 노숙자 체험의 절절한 르포식 보고, 파시스트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참전한 스페인 내전에서의 교묘한 혁명세력의 탄압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 맹목적 민족주의에 대한 예리한 해부 같은 정치적이 글들을 따라가다 보면 아내가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을 필요없이 아이들을 들처업고 따라가 마당에서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는 "물속의 달''이라는 상상 속의 펍에 대한 얘기도 들을 수 있다. 오웰은 그러한 펍이 실재한다고 한껏 착각하게 만든 다음 독자에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여 김빠지게 만드는 익살도 부린다. 오웰의 이 기발한 상상의 펍은 후에 동명의 비슷한 분위기의 대규모의 펍체인 사업을 낳게 했다고 한다.
이 책의 표제작이가도 한 <나는 왜 쓰는가>와 위선과 가식으로 현실의 정치의 은유처럼 오염된 글쓰기를 비판한 <정치와 영어>가 사실상 이 에세이 선집의 하이라이트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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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한 언어의 대적은 위선이다. 진짜 목적과 겉으로 내세우는 목적이 다를 경우, 사람은 거의 본능적으로 긴 단어와 진부한 숙어에 의존하게 된다. 마치 오징어가 먹물을 뿜어대듯 말이다.
의미가 단어를 택하도록 해야지 그 반대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산문의 경우, 단어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단어에 굴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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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과 문학적 평론에 대한 그의 시니컬한 의견도 인상깊다. 그는 생업으로서의 서평쓰기에 꽤나 곤역을 치른 모양이다. 모든 문학적 판단은 본능적인 선호를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그의 지적은 결국 내가 어떤 책에 대하여 좋다, 나쁘다,를 읽는 이에게 교묘하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끄러운 자책을 끌어 내었다. 어떤 책에 대한 진정한 반응은 주로 '나는 이 책이 좋다'거나 '나는 이 책이 싫다'는 것이란다. 그 뒤에 따라붙는 것은 합리화라고 못박는다. 어느 정도 근저에 있는 그 불편한 진실을 저며내어 보여 준 것은 맞는 것 같은데 조금 서운한 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간디에 대한 소견>에서 마하트마 간디를 인본주의, 즉 인간을 택하지 않은 내세적 이상주의자로 조심스럽게 비판한 대목은 갑자기 정수리에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오웰은 내세적 이상과 인본주의의 이상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하느님 아니면 인간이라고 얘기한다. 또한 혁명은 인간을 택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대목이나 결국 이 생에서의 인간들의 삶이 개개로서 존귀함을 인정하자는 그 단순한 정의가 종교의 내세관에서 어떻게 비틀어지고 묵과되는 지에 대한 예리한 지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종교 그 자체를 싸잡아 비판한다기 보다는 그것을 교묘하게 정치적으로 악용하여 현실에서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숙명적인 것으로 감내하도록 조장하는 비열한 책동과 인간중심 혁명을 대치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그의 시선은 언어의 외피를 뚫고 진동하는 인간의 그 허약한 위선, 어리석음을 걸러내고 만다. 마치 내가 들킨 기분이다. 결국 언어와 그 사람의 내면이 조우하는 지점에서 글이 나와야 한다. 자신의 사상과 괴리되어 저만치 현학적이고 위선적인 어휘들로 대충 감침질한 어휘들의 향연을 자신의 글로 내세우는 것은 비열하고 패악적인 정치인의 자기 과시와 동떨어진 일이 아니다. 오웰은 더 나아가 이러한 언어의 타락이 정치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연쇄 반응을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언어의 체에 그것들을 통과시키게 된다. 전체주의 세력들이 끝까지 언론 장악을 포기하지 못하는 대목만 봐도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이러한 언어의 부정적인 영향력에 대한 직시는 그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하나의 경고지점이 된다. 오웰은 언제나 자신의 글이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그 자신이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라고 고백한다. 사회적 비판의식이 결여되고 현실과 괴리된 글쓰기가 가지는 생래적 한계는 결국 그것이 우리의 삶과 유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적인 존재이며 정치와 떨어져 일상을 영위하는 영광을 누릴 수 없다. 시장에 가서 오천 원이 넘는 대파 한 단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아줌마는 '정치'를 떠올린다. 오웰이 비단 정치적인 시대에 태어난 작가들의 부책감을 토로했다고 하더라도 오늘 이 시대가 정치적이지 않다고 항변할 도리가 없는 것을 보면 결국 우리는 모두 정치적인 시대를 통과할 수밖에 없는 숙명인가 보다. 그러니 모든 글쓰기 또한 정치적인 인식이나 비판,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유독 불편한 사람이 있다. 잊어 버리고 묻어 버리고 싶은 것들을 자꾸 끄집어 내어 시선을 돌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럼에도 자꾸 찾게 되는 이상한 마력을 갖춘 사람은 도저히 떠날 수가 없다. 그 사람의 매력은 깐깐하고 남에게 교묘하게 세력을 행사하려 조언을 남발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주저없이 먼저 끄집어 불쑥 보여주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충고는 값지다. 자신을 먼저 무장해제하고 악수를 권하는 상대에게 우리는 속수무책일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이다. 조지 오웰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