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오렌지족, X세대 마케팅이 활황이던 94년 우리는 끔찍한 존속살해 사건을 접하게 된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유학생 박한생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잔인하게 난도질하고 불태워 버렸던 사건이다. 거액의 유산을 노리고 완전범죄를 꿈꾼 오렌지족의 패륜은 연일 선정적으로 보도되었다.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존엄과 가족에 대한 애정, 신뢰가 깡그리 실종된 극단의 예에 모두들 광분하고 비난의 일성들을 토해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자신을 낳아준 자의 피를 흘리게 하는 그 극악무도한 범죄는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언론의 기삿거리가 되어준다. 우리는 자문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인가. 대체 인간의 추락을 막아주는 방파제인 마지노선이 있기나 한걸까. 그럼에도 삶과 생명에 경외를 바칠 수 있을까. 아니 더 나아가 이런 인간을 창조했다는 신의 방관과 침묵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결국 신은 없는 것인가. 모든 고결한 가치는 하나의 허상과 이상과 기대에 불과한 것인가. 

여기 한 아버지가 있다. 그는 모든 악덕의 총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탐욕스럽고 인색하며 냉정하고 야비하다. 아들의 여자를 탐할 만큼 호색한이기까지 하다. 그는 두 번 결혼했고 처들의 막대한 지참금을 챙기는 대신 그녀들에서 얻은 세 아들은 방기한다. 그 아들들은 방탕하지만 신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미챠, 신과 불멸에 강한 회의를 제기하는 관념론자 이반, 논리 이전에 삶 그자체와 신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알료샤로 자라난다. 마침내 이 재앙같은 아버지는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미처 받지 못한 유산 문제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그루셴카라는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연적 관계를 형성했던 장남 미챠가 유력한 용의자선에 서게 되고 결국 유죄 선고를 받게 된다. 

 

인간 그 모순적 존재에 대한 심오한 고찰 

인간이란 너무 넓어, 라는 둘째 아들 이반의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그 존재를 깊이 뚫고 마침내 그 심원에 닿은 깨달음이다. 악마와 신이 싸우는 전쟁터이며 양극단이 서로 만나는 곳, 그곳은 별다르고 대단한 곳이 아니다. 바로 한 치 인간의 마음이다. 극히 선할 수도 동시에 극단적으로 졸렬하고 야비할 수도 있는 게 인간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 모순의 공간을 품고 삶의 전장에 나서는 일은 그래서 태생적 비애를 업고 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가능할 수 있는 모든 대립쌍들을 뒤섞을 수 있고 또 한꺼번에 두 개의 심연을, 우리들 위의 심연, 즉 드높은 이상들의 심연과 우리 아래의 심연, 즉 가장 저열하고 악취 나는 타락의 심연을 관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3권 P.401 

이 악이 육화된 악마와 이반의 대면 장면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나는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 내는 힘의 일부분이다.'라는 얘기와 맞물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삶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각종 종교도 결국 근원적인 악의 지지를 받게 되는 것이다. 모조리 선, 모조리 사랑, 이해, 배려가 점령한 세상은 그 어떤 규율도 성장도 뉘우침도 도약도 없을 것이라는 슬픈 진실의 응시는 적나라하면서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악의 자리를 감내해야 함을 보여준다. <달과 6펜스>의 서머싯 몸은 심지어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독창적으로 가장 위대한 작가의 자리를 점하게 된 것도 결국 그의 악덕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일정부분 수긍이 간다. 우리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때로는 온몸에 돋는 소름을 경험해야 하는 대목은 언제나 그가 지독하게 천착하고 드는 인간  내면의 그 사악한 부분이다.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벌레, 움츠리고 있는 괴물을 불러 내기 때문이다. 그를 이은 수많은 후세의 작가들도 결국은 이 지점에 사로잡혀 헤매고 있다. 평범한 사람의 내면에서 갑자기 그로테스크하고 야비한 것이 출몰하는 대목에서 예술들은 끊임없이 배회한다.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는 것은 결국 악덕의 찌꺼기를 긁어 모아 전시하는 것과 결별할 수 없다.  이반은 아름다움이 소돔에 도사리고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를 죽인 아들의 이 선정적인 사건에 모두가 은근하게 기뻐하고 있다는 작중 리자의 말은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한다. 관념적 사랑은 언제나 오케이지만 실천적 사랑에서는 머뭇거리는 평범한 우리들이 어쩌면 가장 악덕을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직시하는 자리에서 <카라마조프가의형제들>은 더 높은 지점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대체 신은, 불멸은 있는가! 

결국 작가가 가장 던지고 싶었던, 천착하고 싶었던 문제는 이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날도 내일도 우리들이 스러지는 그 지점에서도 결국 맞딱뜨릴 수 밖에 없는 그 근원적이고 답이 없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매일 이런 질문들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지난한 고통들과 마주칠 때마다 이 문제를 거머쥘 수밖에 없다. 둘째 아들 이반과 막내 견습 수도사 알료샤의 대화들은 이 문제들을 심도있게 파고든다. 이반은 신도 없고 불멸도 없는 자리에서는 윤리도 사랑도 다 붕괴되고 인간들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한다. 필멸의 존재는 숭고한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는다. 지척의 만지기 싫은 빈민들에게 자선을 베풀지 않아도 된다. 그저 모든 것을 미친듯이 오만하게 하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으면 그만이다,라는 것이 무신론의 귀결로 그려진다.  작가는 고도의 책략을 가미한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기실 독실한 러시아정교인이었다. 즉 그는 유신론자였다. 방탕하고 도박에 취해 있던 그의 삶과는 얼핏 어울리지 않는 대목이다. 신의 문제를 탐구하고 회의하다 결국은 그 신에게 귀의하는 결론은 상류계급 출신이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비슷한 귀결이다. 신과 불멸의 문제에 천착하나 결국 그 신에게 다시 돌아가는 도식이 러시아적 색채를 가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그러나 신과 불멸을 어떤 인간세계의 각종 규범들과 윤리와 연결하여 고찰하는 대목은 상당히 인상깊다. 우리는 은연중 신이 있기를 바라며 신을 필요로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그것을 간파하는 예리한 작가의 시선이 놀랍다. 사실 너희들은 다 있기를 원하잖아! 라고 비웃는 것만 같다.  

 

낳아줌으로써 부모의 역할은 완수되는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의외의 지침이 숨어 있다. 바로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는 부모들의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한 면밀한 고민 끝에 나온 조언이다. 아버지는 재앙일 수도 있다는 말, 누구나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린 자녀들에게 가정이라는 은밀한 울타리에 기대어 무한하고 내밀한 권력을 휘두르고 때로는 학대하는 많은 부모들을 알고 있다. '무에서 사랑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들이여, 자신의 아이들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라는 인용어구들은 자식을 낳음으로써 부모로 존중받고 대우받을 자동의 권리를 부여받는 것이 아님을 얘기한다. 아이들은 무기력하고 무력한 존재들이다. 세 아들을 무참히 방기하고 하인의 손에서 자라게 내버려 두고 그들의 재산을 갈취한 카라마조프가의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는 하나의 알레고리다. 정도의 차이를 감안하고서라도 우리는 부모의 의무와 연약한 아이들을 지키고 보호해 주어야 할 기본적인 책무를 잊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모두의 양심의 현현 같은 존재인 막내 알료샤가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교조적인 연설을 하는 장면은 빈약한 결말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작가가 일관되게 애정어린 눈길을 보낸 아이들에 대한 존중에 한번 더 강렬하게 방점을 찍어준 것으로 이해해도 괜찮을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이들을 사랑했다. 아이들의 고통이 방치되는 것을 보고 무신론을 주장한 이반의 모습은 그것과 상통한다.  

 

지극히 윤리적인...

이 소설은 존속살해를 다루고 있지만 지극히 윤리적이기도 하다. 악덕이 반드시 행동 차원에서만 징벌될 것인가, 하는 그 예민한 윤리의식은 마침내 사유와 욕망의 것으로까지 확장된다. 나쁜 생각, 즉 저 사람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그 욕망마저도 때로는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유죄이자 존속 살해범일런지도 모른다. 인간은 약하고 비열한 존재다. 하지만 그렇기에 또 더없이 고결한 존재로의 도약이 가능하기도 하다. 내 안의 악마를 응시하는 행위는 그래서 소중하다.  

영원한 재판관은 그대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그대에게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2권 p.90)

P.S. 방대한 분량, 대사를 통한 사건 전개, 때로는 너무 인위적이고 전형적인 인물들로 인해 1권을 종반부까지 읽어도 2권을 흔쾌히 잡기 힘든 책이다.--;; 서머싯 몸이 왜 그렇게 도스토예프스키를 주는 것 없이 미운 놈이라고 욕을 해댔는지 조금 수긍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만 참으면 안구가 씻겨 나가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흐릿한 안경알을 닦고 갑자기 세상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라고까지 과장할 수도 있다. 어느 지점에서 고민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다 나온다. 세상사가 답답하고 사람들에 환멸이 들 때 천천히 읽어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다만 더운 열대야의 밤에는 완전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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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8-24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드디어 읽으셨군요. 짝짝짝~~~~~ ^^
정말 힘들게 읽고 엄청난 감동이 밀려오지만 요렇게 리뷰를 잘 쓰는 건 아무나 못해요.
지금은 예전에 경험한 감동의 물결만 남아 있을 뿐...

blanca 2010-08-24 20:56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이 독서토론회에서 읽으셨다고 꼭 읽어 보라고 했던 댓글 덕택입니다. 사실 지루하다는 평이 많아서 망설였었는데 결국은 읽고 지나가야 할 것 같은 강박 때문에. 예....감동이 어느 순간 정말 쓰나미처럼 밀려오더라구요^^

비로그인 2010-08-24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열린책들에서 나온 붉은색 표지(이건 예전 버전이라던가..하는)의 책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책을 좀 찾아 손에 들으니, 한참 열심히 읽던 기억도 나고 하네요 ^^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이 다양하게 울리는.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공평한 시선을 갖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파편으로 이뤄진 것 같지만 하나로 거대하게 묶여 깊은 뿌리가 있음을 가늠케 하는 것이 계속 찾아 읽게 하는 그 무엇은 아닐까 하고요..

blanca 2010-08-24 20:58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정말 놀라운 책이었어요. 말씀대로 인간을 총체적으로 해부한 것 같은. 나라는 존재를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예전에 문학샘이 줄치며 읽었다고 몸을 부르르 떠는 시늉을 해서 다 같이 엎어져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 선생님의 마음을 조금 알것도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0-08-24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대단한 리뷰예여, 블랑카님...
나두 읽어야 하는데.

인간 관계의 원초에는 부모 자식 관계가 있죠. 결국 부모 자식 관계에서 인간의 극단적인 면을 볼 수 있는거 같아요.

blanca 2010-08-24 21:00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맞아요. 근데 참 더운데 읽기는 힘들기는 하더라구요--;; 제가 안읽고 꽂혀 있는 책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ㅋㅋ 참고 읽었는데 역시 왜 사람들이 그렇게 카라마조프 운운하는지 알것도 같았어요. 당분간 책 안읽고 눈좀 쉬려구요. 오늘은 우산 없어서 아이랑 비맞다 집에 와서 이쁜 핑크색 우산도 질렀답니다. 단순해지려고 해요^^

꿈꾸는섬 2010-08-24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참 리뷰 잘 쓰세요.^^
교양수업때 이 책 읽고 분석하고 시험봤던 기억이 있긴 한데....블랑카님 리뷰 정말 좋네요.^^

blanca 2010-08-24 21:01   좋아요 0 | URL
우아! 그런 수업이 있었어요? 되게 부담스러웠을 것 같아요. 대학교때 읽으셨다니 대단하세요. 저는 그때 제대로 책도 안읽고 다녔던 것 같은데. 시험이라. 등장인물들 이름 써내라고 하면 참으로 난감해질 것 같아요^^;;

꿈꾸는섬 2010-08-25 00:13   좋아요 0 | URL
ㅎㅎ백지 주시고 아는 거 모조리 쓰라던데요.ㅎㅎ
그땐 참 빼곡하게 썼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하나도 생각이 안나요.ㅠㅠ
알리딘 서재에도 그렇게 빼곡하게 쓰면 좋을텐데 그게 안되요.ㅠㅠ

2010-08-24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4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4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7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pjy 2010-08-25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윤리적이라는게 이상향으로 생각이 듭니다^^;
윤리적이어서 인간적이라고 하겠지만,실제론 참 비윤리적이어서 너무너무 인간적이라는 생각하니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입맛에 맞게 선택할 수 없고, 자식이 원하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부분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립니다..
이 책을 저는 과연 읽을수 있을까요^^?

blanca 2010-08-25 18:22   좋아요 0 | URL
pjy님 저도 요새 인간이 참 사악하다는 걸 느껴요...체념을 배우고 기대를 낮추는 게 나이듦의 과정인 것도 같아 참 쓸쓸하기도 하구요. 이 책. 솔직히 아주 재미있지는 않아요--;; 그래서 강추라는 말은 차마. 그래도 그 이상의 소득이 분명 있으니 시간이 좀 많이 나고 여유가 되실 때 시작해 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