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감기의 돌림노래에 관한 얘기다.
먼저 아이가 걸리고, 나으면서 나에게 옮겨붙고, 1주일 휴지기 후에
또다시 아이가 걸리고, 나으면서 나에게 옮겨붙고, 마침내 아빠한테까지 엉겨붙고,
마침내 오늘 아침 아이는 분노의 콧물세례를 온얼굴에 받으며 열심히 콧물을 빨아 먹고 있다. 

기억나는 건 정말이지 미친듯이 코를 풀고 미친듯이 뒤돌아 기침을 해대다 늑골까지 결림을 느끼며
잠시 공포감에 전율하고 있다 그나마 나를 살게 했던 일정과 약속을 목소리 하나로 다 취소하고(여보세요, 하나로 다들 수긍)
가까스로 회복좀 됐다 싶으면 또다른 가족이 걸려서 다시 칩거생활에 들어가고
이 스트레스를 사발면과 비비빅과 바밤바를 폭식하는 것으로 풀고 그나마 사이 사이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씨네21>에 연재된 '김혜리가 만난 사람 시즌2'의 인터뷰 기사 중 출판을 허락한 22인의 얘기가 담겨 있다. 김혜리는 이미 <그녀에게 말하다>로 구면이다. 역시 <씨네21>에 개재된 인터뷰 기사를 발췌한 것인데 전작은 뭐랄까, 인터뷰이들에게 슬며시 예의차리며 다가가 살짝 건드리고 온 듯한 미진함이 아쉬웠다면, 이번 책은 한사람 한사람의 삶을 인터뷰에 오롯이 녹아 낸 농밀한 밀도와 깊이가 빛난다. 특히나 그녀가 번역가, 문학평론가, 배우, 시인, 물리학자, 영화평론가, 음악가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한 분야를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하고 준비한 상태에서 그들을 만났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인터뷰이들에게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정형화되고 낭비적인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바로 속살을 드러내고 무장해제 하게하는, 그래서 독자들은 저만치 더 멀리, 더 깊이 그들에게 가 닿을 수 있게 하는 비장의 무기다.  

그들의 삶은  나의 그것보다 한층 밀도와 무게가 있었다. 나는 이 지구에 두 발을 디디고 산 것이 아니었다. 저 별을 올려다보며 꿈을 제대로 꾼 것도 아니었다. 삶을, 자신의 일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함과 경건함은 찰나와 순간에 우리의 전존재를 밀어넣고 숨쉬고 말하고 사랑하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그 어떤 책보다 생의 긍정적 에너지를 고양하는 탁월한 재능이 느껴졌다. 

제 가장 큰 이념은 웃음이고 그걸 포기하면 저는 끝입니다.
그것을 비판이고 반정부라고 말한다면 죽을 때까지 비판적이고 반정부적일 겁니다.
-김제동 

끊임없이 묻고 풍자할 권리를 역설한 그가 단순히 진보정인 정치색을 드러냈다고 오독했던 것이 미안했다. 그는 결국 웃음을 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근거없이 끼어드는 억압과 제재에 대한 저항이 정치적으로 읽힌다면 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런 그가 노대통령 1주기 추도식 사회를 봤다는 이유로 오늘 M-net 김제동 쇼에서도 결론적으로 사퇴하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결국 이 시대의 저들은 영원히 그를 오독하고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답답한 절망을 느끼게 된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마침내 수군통제사의 옷을 입고 그 갑옷의 무게와 그 갑옷의 깊이를 함께 느꼈다는 김명민의 고백도 남는다. 이순신을 이해하고 느끼고 마침내 그와 한몸이 된 것 같은 경지에서 그의 심리적 고뇌의 파고까지 들을 수 있었던 그가 자신감이 생겨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내가 하려는 것, 내 안에 있는 것만 생각나고 반면 불안하면 온갖것이 보이고 신경이 쓰인다고 했던 얘기는 바로 나 자신이 듣고 싶어했던, 그리고 들어야만 했던 바로 그 조언이다. 

저자가 시민의 각성은 기대하지만 인간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없어 보인다고 평했던 유시민이 민주주의를 정의한 대목도 흥미롭다.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욕망이 욕망을 통제하는 제도로 각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누군가의 권리가 침해당하면 격분하면서 연대하는 행위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가 강조하는 헌법은 바로 이 연대의식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연대의식도 기본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가적으로 발생한다는 논리로 이해된다. 이 정부가 민주주의가 뭔지 몰라 결과적 '계몽군주'를 자처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진단한 대목, 정치란 것이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기 위해 야수적 탐욕을 상대하며 짐승 같은 비천함을 감수하는 일이라고 재정의한 부분은  유시민만이 유시민이니까 할 수 있는 얘기다. 진보신당, 민노당의 주장들에 비현실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정의롭고 시련에 굴하지 않으며 좁은 길을 가는 것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는 고백은 그가 당면한 진보진영의 통합과 포용에 어떤 식으로 대처할 지에 대한 작은 기대를 가지게 된다. 

난 한번도 연기가 직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그걸 직업이라고 하면 왠지 자존심이 상해요. 
<마더>의 엄마가 도준이한테 "너는 나야"하듯이 연기는 나에요. 숨쉬는 것처럼.
-김혜자 

언제나 두고 온 자신의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매체에 스스로를 많이 노출하고 싶다던 고현정의 인터뷰도 좋았다. 그녀가 연기 신인 시절에도 노메이크업으로 온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오열하던 모습들, 미스코리아 출신임에도 예뻐 보이고자 몸과 얼굴 근육을 사리는 일에서 멀찌감치 물러서 있던 그 성실해 보이던 모습은 그녀가 정작 재벌가로 홀연 사라져 버렸을 때도 진한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언제나 연기를 참 잘했다. 그녀가 십 년의 공백을 뛰어넘고도 건재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연기자로서의 자질과 노력이 담보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채근하고 많이 노력하는 그녀의 진지함과 열성이 보기 좋았다. 그런 그녀지만 막상 촬영장에 구경나온 이가 안고온 아기를 어르고 달래며 내려놓을 줄을 몰랐다는 김혜리의 얘기는 왠지 애잔했다. 심지어 그 아기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고 고양이 그림까지 그려주는 모습에서 우리가 자주 잊고 마는 엄마로서의 고현정의 아픈 사연이 떠올라 콧날이 시큰했다.  

첼리스트 장한나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도 기억에 남는다. 그녀도 김혜자에게 연기가 그랬던 것처럼 음악이 곧 삶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독서 같은 '간접경험'이 아니라 40분 동안 비창을 연주하면 40분 동안 비창을 사는 거란다. 이 시간 동안 그녀는 그녀가 아는 평균치의 삶에서 느끼는 애절함보다 천만배의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에게 때로는 독서도 그럴 때가 있다고 삶 속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처절하고 농밀한 감정 속에 푹 젖을 때가 있다고 항변하고 싶어지는 것은 왜일까?^^ 우리도 책을 읽다 갑자기 그 속의 문자들이 매직아이처럼 떠올라 내 주변에서 뛰어놀고 살아 숨쉬고 만질 수 있는 경지까지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가장 그 사람다운 표정과 몸짓을 포착한 흑백 사진들과 인터뷰어가 그에 대한 개관으로 시작하여 질문과 답변을 고스란히 Q&A 형식으로 재연하다 에필로그처럼 덧붙인 추신들, 모두가 청아하고 간결하고 근사했다. 섬세한 촉수가 섹시하게 간지럼을 태우는 맛은 없지만, 그러기에 더욱 신뢰가 가고 인터뷰이들을 독대하고 그들의 고백을 경청하는 듯한 멋진 환각을 선물해 준 그런 책.  그래서 조지 가랫의 얘기처럼 진짜배기의 벌거벗은 진실에 가닿고 싶은 간절한 발돋움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은 책.  

시인 김경주가 말한 것처럼 눈을 감고 조용한 공간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책. 파도소리가 난단다. 정말이란다. 이런 얘기를 과연 누가 나에게 해 줄 것인가? 인터뷰의 마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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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1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2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0-06-02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혜자님의 말이 오늘 아침 정곡을 찌르는군요. 직업이니까 해야하는 사람과 직업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이 몰입해온 사람, 이렇게 나뉠 수 있는건가요?
마지막 줄의 김경주의 말은 시인 입에서나 나올 수 있겠지 싶고요.
인터뷰를 통해 저런 속내를 끌어낼 수 있는 저자의 능력 역시 보통은 아닙니다 새삼스런 얘기겠지만요.
책 소개 감사합니다.

blanca 2010-06-02 09:10   좋아요 0 | URL
hnine님 반갑습니다. 김혜자 같이 자신이 하는 일을 자신과 동일시 하는 사람을 보면 저는 그 누구보다 러워요. 예, 시인이 대우받지 못하는 시대에서 시인의 속내를 들으니 참 좋으면서도 안타깝더라구요. 이래저래 여기에 나온 사람들은 하나하나 다 부러운 면면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인터뷰의 대상으로 선택된 것이기도 하겠지만요.

stella.K 2010-06-02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급끌림입니다. 이런 인터뷰집이 있었군요. 제목이 무슨 사회과학계열쪽 같기도 하지만.^^

blanca 2010-06-02 16:06   좋아요 0 | URL
제목이, 좀^^;; 스텔라님, 옆에 두고 야금야금 읽기 참 좋아요. 관심가는 사람부터...

비로그인 2010-06-02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배기 삶을 사는 진짜배기들의 책이로군요?!

blanca 2010-06-03 16:14   좋아요 0 | URL
마기님...이런 책 한번씩 읽어주면 좀 열심히 살게 되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0-06-03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기의 돌림노래... 분홍 공주님이 콧물 맛나게 먹던가요? 아하하~~~
전 고현정 씨 정말 좋아합니다. 그런데 아이들 얘기 들으면, 마음 한구석이 짠해요.
아이를 참 사랑하는거 같은데, 그 아이들 한번 만나게 안 해주는 전남편도 대단하구나 싶어요.

blanca 2010-06-03 16:15   좋아요 0 | URL
저도 스무 살까지 못만난다는 대목이 참 가슴아프더라구요. 얼마나 보고 싶을까요? 저는 엄마잖아요,라고 했던 얘기들도...고현정은 뭔가 있어 보이고 실제로 뭔가를 간직하기 위해 노력하는 배우 같아요.

마녀고양이님, 저 어제 개표 방송 보고 가위눌리고 흑흑. 오늘도 계속 슬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