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아주 눈이 컸다. 말이 잘 통하지 않을 때 그 눈은 습관처럼 반달이 되곤 했다. 때로는 못알아들어도 알아들은 척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리기도 했다. 강의 시간 그 큰 눈에 물음표를 품고 서툰 한국어로 열심히 해독하지 못할 기호같은 필기를 해대던 그 아이는 우리 학교로 유학온 재일 교포3세였다.  

나는 그 아이가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 아니, 솔직하게 나는 그 아이를 일본인이라고 여겼다. 묘한 이질감과 일본풍의 풍모, 그리고 서투른 한국어들 갈피짬 사이로 우리가 친해질 기회는 요원해 보였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나는 그 아이와 단둘이 될 기회를 얻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얘기했지만 다 알아들은 것 같진 않았던 그 아이는 또 활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그 때 잠시 그 아이가 같은 한국인이라는 기억을 떠올렸던 것도 같다.   

 

'추방당한 자의 시선'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아이가 다시 생각났다. 지금쯤 일본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바람대로 한국어 선생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지극히 요즘 일본 아이 같았던 그 아이가 하필 한국어 선생을 하겠다고 했던 대목도 묘한 대비를 이루며 떠오른다. 왜 하필 한국어 선생이었을까? 다시 이 책을 더듬게 된다. 

원래는 이산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인 디아스포라근대의 노예 무역, 식민 지배, 지역 분쟁 및 세계 전쟁으로 대부분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상을 강요당한 사람들의 의미로 확장된다. 식민지배와 제2차 세계 대전, 한국전쟁, 군사정권하의 정치억압 등으로 발생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자그마치 육백만에 육박한다고 한다. 재일조선인인 저자 역시 '의식적인 피차별자'로 살아갈 것을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요구하는 디아스포라다.  

이 책은 그런 저자가 런던, 잘츠부르크, 카셀, 광주 등을 여행하며 각각의 장소에서 접한 사회적 양상과 예술작품을 테마로 현대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유래와 의의를 탐색하고 있다. 그것은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근대'를 재해석하고 '근대 이후'를 탐구하는 여정이다.   

근대 국가의 틀로부터 떨어져 나가 방랑하는 디아스포라의 삶은 끊임없이 삶의 우연적 굴절과 그것을 통해 눈물흘리며 직시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회의를 통과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황이 단순한 굴욕주의적 감상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런던 교외 공동묘지 마르크스의 묘비는 어쩌면 이 방랑의 길에 하나의 이정표 같다. 

철학자들은 세상을 이런저런 식으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
마르크스

스물 일곱의 마르크스가 부르짖었던 것처럼 프리모 레비가 얘기했던 것처럼 이 디아스포라적 삶의 다중심성은 근대의 광신적인 내셔널리즘의 그 인위적인 '타자'의 설정과 그것을 향햔 무자비한 배척, 증오를 직시하고 그 틀을 해체하여 더 근원적이고 유연한 휴머니즘으로의 회귀의 물꼬를 트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은 이 책의 출발점이기도 하고 귀결점이기도 하다.  

특히나 재일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한 글자 한 글자 눈물로 들어와 박혔다. 단순히 재일교포로 뭉뚱그려 이해되는 그들의 모습에는  일제 식민치하에서 일본 신민으로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해방기 갑자기 무국적자로 버려졌다  일본과 남한의 국적을 선택하기를 강요당한 비애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했음에도 한국국적을 선택한 이들은 출입국시 번거로운 절차를 거듭 거쳐야 하고 참정권이 없다. 군사정권하 한국으로 유학했던 두 형들이 방북 문제로 투옥되는 고난을 겪은 저자는 과연 자신이 외국에서 위험한 일체 처했을 때 한국이 나서서 보호해 줄지 자신할 수 없다고 했다. 국경이라는 것은 실체적으로 와닿지 않는 느슨한 임의적 경계 같지만 막상 우리는 모국 바깥으로 나가면 그것의 삼엄한 위엄을 실감하곤 한다. 그럼에도 안도하는 것은 우리가 돌아올 곳이 있고 우리를 지켜줄 수도 있다는 막연한 국가라는 개념이 주는 든든함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인위적이고 조악한 가느다란 경계선에 또 인위적이고 모순과 허점 투성이이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개념 하나를 얹어 두고 있는 셈이다. 그것에서조차 거부당한 디아스포라적 삶은 그래서 항상 연약할 수밖에 없다.  

재일 조선인 1세 시인 김하일의 얘기는 그 연약한 삶을 뚫고 나오는 그 처절한 모순적 개념에 대한 근원적 애정을 체현한다. 그는 한센병으로 손가락도 시력도 잃게 된다. 그러니 그가 혀로 점자를 핥아가며 우리의 역사를 읽느라 혀끝이 뜨거워졌다는 대목은 목울대를 울린다. 디아스포라적 삶이 근대의 국가적 개념을 부정하고 그 너머를 지향한다지만 결국 그들은 또 나라로 돌아오고야 만다. 이 책이 가지는 회귀적 모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회귀를 절통하게 이해할 수 있기에 그 모순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나의 개인적인 비극은 타인의 관심사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그토록 자연스러운 내말, 자유롭고 풍요하고 끝없이 온순한 러시아어를 버리고
이류의 영어를 해야하는 내 설움에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의 작가가 고뇌했던 것은 그 어린 님펫에 대한 도착적 성애가 아니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고국 러시아를 떠나 끊임없이 방랑하다 그 방랑지에서 죽어야만 했던 그가 가장 슬퍼했던 대목은 자신의 모어를 버려야 했던 사실이다. 하고 싶은 수많은 얘기들을 1차적으로 자신의 모어의 체에서 걸러 영어로 변환시키는 지점에서 그는 항상 고뇌했다.  

이제 그 아이의 얘기로 돌아와야 할 것 같다. 그 아이도 그랬을까? 그 아이에게 모어는 일본어였다. 저자의 설명을 빌리자면 모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익혀 자신의 내부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말"이다. 하지만 그 아이의 모국어는 한국어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신의 모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국어를 가르치고 싶다고 얘기했다. 할아버지의 나라쯤으로 여겨지는 모국이 그 아이를 불러낸 그 모호하지만 강렬한 힘은 근대 국가를 세웠던 그 무모하고도 위험한 동인이기도 했다. 디아스포라를 만들어 내고 또 그 디아스포라들을 끊임없이 손짓해서 불러내는 힘. 허구적이고 얄팍하다지만 또 그만큼 강렬하고 처절한 그 힘. 

대체 나라란 무엇이고 국민은 무엇이고 민족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의 유한성에 무한의 가능성의 환각을 덧씌운 것이 국가의 개념이자 애국자의 망상이라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가두고 또 우리를 나아가게도 한다. 이것은 또한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 내는 전쟁의 광신도들을 만들어 내고 그들의 프로파겐다에 차용되어 수많은 디아스포라의 행진을 가속화시킨다. 생산적인 질문들을 만들어 내지만 대안적인 해답이 다원적인 중심성이라는 모호성으로 감침질 되고 마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공고한 개념을 마구 흔들어 대는 이러한 독서는 언제나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산다는 것은 질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은 어쩌면 저 삶의 국경 너머에서 찾아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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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28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DMB 로 뭔가를 보는데 서경식 교수와 한 서독의 간호사였다가 후에 화가가 된 어떤 분에 대한 다큐가 나오더라고요. 디아스포라.

일본,러시아,독일..등등 그곳으로 가게 된 우리 이웃들에 대한 생각이 잠시 마음에 머뭅니다. 그리고 관동대지진, 강제이주, 간호사들의 차별등 그들은 그런 차별을 너무나 까닭없이 당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네요.

blanca 2010-05-28 10:36   좋아요 0 | URL
아, 그런 다큐를 보셨군요. 우리가 잊고 사는 것들을 때로는 되돌아 봐야 할 것 같아요. 저 지금 신경숙쌤의 <어디선가~> 읽다가 바람결이라는 용어 발견하고 거기에 동그라미 쳤어요. ㅋㅋㅋ 뭔가 아주 심오한 의미가 있나 싶어서요.^^;;

비로그인 2010-05-2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라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내몰리듯 외국으로의 유학을 떠나게 되는 것, 그래서 기러기 아빠를 만들어내는 것...그리고 또 그 이후의....
이것도 이젠 디아스포라라고 표현해야 맞을것 같네요.ㅠㅠ

blanca 2010-05-28 10:37   좋아요 0 | URL
마기님! 맞아요. 유학생들도 그렇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개를 마구 끄덕거립니다. 그런데 마기님 패션 센스 진짜 짱이시네요. 그리고 저도 저런 웨이브 머리 너무 해보고 싶어요. 저는 지독 곱슬이라 무조건 매직입니다용--;;

비로그인 2010-05-28 10:50   좋아요 0 | URL
'트위스트 펌' 인데요, 곱슬머리에게는 딱입니다.
저도 맨날 볼륨매직 했었는데,,,요거 재생시간이 짧잖아요.
ㅋㅋ일부러 유행에 역행하는 게 저의 패션 노하우?랄까요~~푸하하~

blanca 2010-05-28 10:53   좋아요 0 | URL
마기님, 저 그럼 진짜로 트위스트 펌하고 대문 사진에 사자머리 올릴 지도 몰라요. 재생시간 얘기에 완전 혹합니다. 저 진짜 담달에 할까봐요 ㅋㅋㅋ 유행을 선도하시는 것 같은데요.^^

비로그인 2010-05-28 11:10   좋아요 0 | URL
처음 하시는 거니까 좀 굵게 해달라 그러세요.
처음부터 너무 빠글거리면 스스로가 감당이 안되어요.ㅋㅋ
저처럼 가운데 가르마 하시면 더 어울리실꼬예요.
트리트먼트랑 에센스로 잡아주면 이뻐요.

유행 따라가지 않는 것...남들이 하는 건 일단 피하고 보는 것.
그냥 이거다!싶은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
남들의 평가를 너무 무시하면 안된다는 것.
색을 교묘하게 조화시키는 것.
뭐 제 머리속에는 여러가지가 맨날 날아다닙니다만....
제일 중요한 팁은~~
나의 단점을 커버하고 장점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노하우를 연구하는 것!
결론적으로...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패션을 잡아라!!!

비로그인 2010-05-28 11:17   좋아요 0 | URL
참~~이 헤어스탈은요, 그 자체가 야~하기 때문에....
다른 부분을 좀 수수하게 매치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엑서세리가 번쩍번쩍하고 화장이 진하면...정말 못봐주거든요.
ㅋㅋ제가 왜이리 참견이랍니까?ㅋㅋ

기억의집 2010-05-28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글 너무 멋져요. 디아스포라의 가장 큰 딜레마가 언어였네요. 저도 언어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편인데.. 이 글 읽으면 추방당한 자들의 언어에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나의 모국어를 하지 못한다는 괴로움은 어떤 것일까요?

blanca 2010-05-28 10:38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그전에 작가의 DNA 글 읽고 얼마나 좋았던지 몰라요. 어디선가 꼭 써먹고 싶은 얘기였어요. 게다가 스티븐 킹이라니.

언어라는 게 진짜 묘한 것 같아요. 아직 저는 이 모국어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쓰지 못하는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0-05-2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여, 블랑카님 만큼 리뷰를 쓰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왜 항상 감탄하게 만드세여? 아하하---

blanca 2010-05-29 14:37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제 기분을 업시키는 기술을 가지고 계신듯 해요^^;; 저는 오늘 청소를 아주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헤이즐넛 티백 커피를 마시고 있어요. 감기도 많이 좋아졌지만 선거 홍보물을 보다 갑자기 우울해 졌어요. 선거 끝나고 할 얘기가 많아질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0-05-30 10:58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저는 선거에 엄청나게 야당이 패하면, 2년간 뉴스도 안 보고 정치판 이야기도 안 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머....... 고민한다고 변할게 없으니 당분간 묻는 수 밖에요. ^^

꿈꾸는섬 2010-05-28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블랑카님의 글을 보며 늘 어쩜 이리 짜임새 있게 구체적으로 게다가 감동까지 주는 글을 쓰실 수 있을까 늘 부럽습니다.^^

blanca 2010-05-29 14:38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정말 감사합니다. 꿈꾸는 섬님 가족도 저희 가족도 항상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온통 감기가 헤집고 가니 가족들이 다 골골합니다.

프레이야 2010-05-29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리타, 모국어에 대한 나보코프의 구절들이 인상깊었던 책이에요.
요즘 전 언어를 다시 잘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이건 뜬금없이 좀 다른 얘기지만요,
사랑하는 사람의 언어를 배워라고 하는 아랍의 격언이 있답니다.
우리는 타자의 언어를 왜 이리 잘 알아듣지 못하는 걸까요.
오해, 갈등, 싸움.. 아, 그게 따지고 보면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요.

blanca 2010-05-29 14:3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맞아요. 언어! 얼굴 맞대고 조목조목 설명해가며 얘기해도 결국은 오해만 남는 경우도 있고. 그래도 이런 언어가 있어 프레이야님과 좋은 인연도 맺을 수 있는 거니까 감사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