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젖잖아요. 이리 줘요. 내가 할테니."
한 때는 참 예뻤을 그러나 지금은 삶의 고충들이 가득 괴인 눈매의 청소부 아주머니는 나의 우산을 낚아챘다.
그 축축한 우산을 꼼꼼히 잘 접어 비닐봉지에 넣어 건네는 그녀를 다시 한 번 보았다.
나는 눈을 맞추고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주머니는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괜히 뭉클했다. 아주머니가 너무 예뻐서 너무 친절해서. 게다가 빗방울이라니.
모든 사물을 모든 현상을 어리어리하게 그 테두리를 묘하게 번지게 해서 보여주는 빗방울이라니. 
젖어도 괜찮은 손이 있다니. 젖으면 안되는 고운 손이라도 가진 것처럼 나를 우쭐하게 해주다니.

가난한 대학생이 개구쟁이 초등학생과 투닥거리며 벌어놓은 돈에서 어버이날 선물을 택할 폭은 넓지 않았다.
삼만 원짜리 가판대 넥타이. 게다가 너희들은 구석진 곳에 삶의 신산함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하필 바로 또다른
고운 아주머니 옆에 누워있었다. 어슬렁대는 나를 아주머니는 불렀다.
"손님, 선물 고르세요?" 손님이라니. 내가 그 가판대에서 넥타이를 몇 개 헤집어 볼 명분으로 충분하다.
"네. 아빠 선물 고르려구요."
"아버님이 사람들 앞에서 프리젠테이션 할 일이 많으신가요? 아니면..."
그 아주머니는 너무나 정성껏 몇 개의 넥타이를 자신의 옷 위에 대보며 어리버리한 대학생을 최고 고객으로 대우해 주었다.
아주머니와 내가 벌인 소박한 패션쇼의 끝에 낙찰된 그 황금빛 넥타이.
그 삼만 원짜리 넥타이는 아직도 가장 중요한 행사에
행운의 부적처럼 아버지와 동행한다.
 

소위 감정노동을 오년 간 하고 퇴직하면서 가장 많이 남은 아쉬움은 가장 자연스럽게 흘러 나와야 할 감정을
인위적인 틀 안에 구겨 넣어 억지로 끄집어 빼는 듯한 그 껄쩍지근한 과정에 대한 염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더 친절하지 못했음이었다.
나는 조금 더 친절해도 괜찮았다. 이 역설 앞에서 이 설명할 수 없는 회한은 내가 때로 무례함을 응징하고자 했던
과욕을 부렸음에도 결국 남은 것은 통쾌함이 아니라 항상  어쩌면 내가 무의식중에 먼저 건드렸을 수도 있을
상대의 허점에 대한 하지 못한 사과였다.  참 이상했다.
왜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남는 것이 항상 더 해대지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아니라 
가장 무례했던 사람한테조차
넘치게 베풀지 못한 친절함에 대한 아쉬움일까.  

45년의 연구와 공부 뒤에 얻은 다소 당혹스러운 결론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라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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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3-02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더 친절하자, 좋은 글 감사해요.
3월! 비온 후라 날이 좀 흐리지만 상쾌하게 시작해요^^

blanca 2010-03-02 13:45   좋아요 0 | URL
제가 그렇게 못하니까 다짐하려고 썼어요.^^우중충한 날씨지민 프레이야님도 행복하게 하루를 마감하셨으면 합니다.

마녀고양이 2010-03-0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에게 가능하면 방긋 웃고 친절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르게도 생각합니다. 가끔 누군가에게 좀더 잘 해야 한다는 압박이 저를 짓눌어요.
너무 가까운 누군가, 조금 멀어진 누군가에게는 조금더 무심해도 좋다.... 이런 생각도 합니다.

blanca 2010-03-02 13:47   좋아요 0 | URL
착한 사람 콤플렉스 저도 있어요. 사실 이 안에 친절에 대한 강박도 포함되는데 사실 저 친절했어야 한다는 아쉬움도 이것의 일환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어요. 너무 무례한 사람한테는 대응하지 않는게 나을 수도 있더라구요. 어려워요-..-

저절로 2010-03-0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들어진 신'의 작가인 리처드 도킨스는 이타주의를 다윈주의적 실수, 다행스럽고 고귀한 실수라고 한 구절이 떠 오릅니다. 자연이 양육강식의 정글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타'를 인간의 유전적 경험속에 남겨둔 것은 분명 기쁘게 빗나간 실수가 아닌 '까닭' 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생존이유 말입니다.

blanca 2010-03-02 13:48   좋아요 0 | URL
아....다윈주의적 실수. 다행스럽고 고귀한 실수. 이 용어가 참 좋네요.

꿈꾸는섬 2010-03-03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소중한 말이에요.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자. 기억해두겠습니다.^^

blanca 2010-03-03 14:17   좋아요 0 | URL
꿈꾸는 섬님은 글만 봐도 친절하실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