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불쌍한 인간 두 종류가 있다. 무언가에 절대 취할 수 없는 사람, 무언가에 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
나는 후자다. 커피와 책에 취하지 않고는 살아낼 수가 없다.
일단 커피 얘기. 커피는 늦게 배웠다. 재수시절 등원 후 아침 문제풀이 비디오 끝에 머라이어 캐리의 Hero 뮤직비디오의
가사와 함께 사탕처럼 머금은 자판기 커피의 달콤함은 그 생활을 나름 견딜만할 것으로 때로는 즐길 수도 있게 만들어 주었다.
단 한 잔. 그것도 아침의 자판기 커피. 그걸로 하루를 유쾌하게 열고 기분좋은 노곤함으로 닫을 수 있었다.
대학교에 가서는 커피를 마실 필요가 없을 만큼 삶을 때로는 즐길 수 있었다.
카페인에 취하지 않고 명료하게 응시하는 세상은 헛된 기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정말 힘들지만 견디지 못할 만큼은 아닐 거라는 취업 담당자의 입사 축하 메일의 냉정한 고언은
직장 생활이 딱 그 만큼의 기대하에서만 유지될 수 있음을 예고한 것이었다. 사람과 돈을 상대하면서 나는 아주 자주
견딜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카페인을 들이켰다. 명료해지는 듯하지만 기실 메가리가 없어지는
그 환각에 기대어 마시고 또 마셨다. 남자들은 담배를 피고 그 옆에서 나는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고 이제는 비대한 기대 대신 과도한 체념이 버거워 커피를 마신다. 두 잔, 세 잔. 속이 쓰리고 뾰루지가
올라오고 사소한 지출이 쌓여 제법 존재감을 드러내고 그리고 또 그것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그 치사한 착취구조에 대한
찝찝한 느낌까지 더해졌을 때 나는 이제 카페인에 끌려가지 않고 그것을 절제하고 지배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래서 읽고 싶은 글들이 있다. 커피 끊기 성공 수기 같은. 그러나 과정이나 의욕을 기록한 글은 많지만 성공했다는 훌륭한
글은 없고 그것을 찾아 헤매다 보니 더 비참한 기분이 들고. 마침내 내가 발견한 것은 '생로병사의 비밀'!
커피야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그저 자신의 몸에 대한 대우와 예우를 강조하는 그 분위기가 왠지 상큼하다.
어제는 그 효과로 두 잔만 마셨을 뿐이고 ^^;; 브로컬리도 열심히 먹고 그래서 몸이 좀 가벼워진 것 같다고 괜히 합리화도 하고.
커피로 시간의 구획을 짓지 않으면 한없이 엿가락처럼 배배 꼬여 늘어질 것만 같은
그 묘한 두려움을 조금은 희석시켜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방금도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들어왔다는 사실.
발자크는 하루에 백잔을 마셨다니 좀 위안을 가져본다.
그리고 책. 그 어떤 것보다 책 중독은 관대하게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아니 오히려 권장되기도. 하지만 이것도 분명 시간과
돈과 그리고 실재를 양보, 또는 소비해야 된다. 우리는 아니 나는 책을 읽으며 종종 많은 것들을 방치, 회피한다.
나의 실제 삶을 살아가는 대신, 수많은 타인의 삶을 관찰, 엿보고 그들의 삶에 경도되거나 염증을 느끼거나 하며 그것에
취해있는 것도 일종의 회피에 대한 열정이다. 그러니 조금씩 쉬어갈 필요가 있다. 나를, 나의 삶을 돌아볼.
요즈음 심하게 책의 구입에 취해 있다. 나름대로 한 달에 오만원을 넘지 않고 다 읽지 않고는 추가 구입하지 않는다는
속이 빤한 원칙을 세웠지만 이미 무너지고 있다. 고작 20일인데. 아직 말일도 아닌데. 책이 주욱 밀려 있다.
중고서점도 원망스럽다. 꼭 지금 주문하지 않으면 누군가 휙 낚아 채 갈 것 같다. <의사소통장애>는 반값에 나와 있어
충동 구매했는데 읽을 것 같지 않다.-..- 왜 이런 책을 주문한 거지?



지금 읽고 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를 엄청 까대고 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란 대목에서 포복절도했다. 몸은 정말 솔직한 사람이다. 여러 작가의 사생활, 그리고 대표작들을 신랄하게 칭찬할 것 해주고 욕하기도 주저하지 않는다. 고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읽고 싶지 않아졌다.
치프킨이 도스토에프스키의 바덴바덴 도박기행을 소설화한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은 상당 부분 그에 대한 이해와 체념적 미화가 있는데 대비된다. 참 인상깊고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강추 강추!
그리고 완전 낚였다. 보통 군한테. 대머리 보통 군이 얄미워졌다.
커피 마시러 나가 영풍문고에서 스테디셀러 세일 30%에 광분하여 또 잊고 있었던 적립금 천원까지 써가며 모처럼 알찬 소비를 했다고 자부하며 게다가 이런 나중에 반전의 피박을 뒤집어쓸 고언까지 옆지기한테까지 해주며
"그게 말이얌. 사람들이 무조건 인터넷이 싸다고 생각하는데 아닌 경우가 많아. 오프가 더 쌀 때도 많다니까. 뿌듯하다. 뿌듯해!"
집에 와서 알라딘에 확인해 보니 반값행사하고 있다. 완전 떡실신했다.
그러니까 책과 커피에 취해서는 어떻게든 고것들의 비어져 나온 살을 코르셋으로 감추고 합리화해 보려고 참 무던히도 애를 쓰다 또 고것들한테 농락당하고 있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