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이십 대였다. 남들이 보면 별것도 아닌 일들이었지만 나는 이 일들이 꼭 해결되지 않더라도 시간과 함께 스러질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안 들었다. 출근길이었고 신입사원이었고 나는 전공과 다른 분야의 일을 맡았는데 그 일을 다 배우기도 전에 가장 일이 밀려드는 시기, 같은 팀 가장 큰 역할을 하던 사수가 예정된 연수에 들어갔다. 일은 해도 해도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사람들은 자기 것부터 해달라고 전화로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든 억지로 에너지를 짜내려고 하루에 네 잔씩 마시는 커피로 위는 너덜너덜해졌다. 같이 일하는 차장님이 먼저 이러다 어쩌면 자기가 과로사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고, 나는 그의 짐을 덜어주기는커녕 민폐가 되는 존재처럼 느껴져서 차장님의 얘기가 더 가슴을 파고들었다.
지하철이 승강구로 들어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회사에 죽기보다 가기 싫은데 가야 했다. 내가 이 직장을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건 지는 거니까. 배제되는 거니까.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그러나 나는 무사히 지하철을 탔다. 끝이 안 보이는 갱도 안에 갇힌 것만 같았다. 그 마음을 누구한테 이해시킬 수 있었을까? 남자 동기는 우리가 군대에 왔다고 생각하자고 했지만 나는 군대에 가보지 않아서 그 고통과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어 그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겉으로만 보면 나는 잘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옥 속에 있었다.
우리는 모두 살고 싶었다. 죽으면 게임에서 배제된다는 뜻이었다. 게임의 규칙이 아무리 모호하고 제대로 갖추지 못했더라도, 모두가 게임에서 계속 살아남고 싶었다.
-돈 길모어 <강물 아래, 동생에게>
캐나다의 저널리스트 돈 길모어에게는 괴짜 동생 데이비드가 있었다. 방랑벽이 있었고 밴드 활동을 했고 이따금씩 마약도 했지만 결국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아서 자리를 잡는 듯 보였던 시기에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죽는다. 혼란스럽고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안온하고 평화로워 보였던 날에 동생은 사라져버린다. 돈 길모어는 그러한 동생과의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한 역사를 재건하면서 자신의 사적 경험을 공적인 것으로 치환한다. 바로 중년의 위기다. 죽음에 대한 이끌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다.
모든 경험은 이처럼 아름다운 선율과 좋은 화음, 리드미컬한 흐름 같은 것을 유지한다. 그렇게 한순간 앞선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녹아들어 계속 선율이 흐르는 것이다.
그런데 자살하는 사람은 선율을 듣는 게 아니라 하나의 동떨어진 음만 듣는다.
-돈 길모어 <강물 아래, 동생에게>
지금, 현재의 순간에 매몰되는 건 여러 의미를 갖는다. 행복한 순간과는 다르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닥치면 그 시간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의 착시 현상에 사로잡힌다. 즉, 지금 이 고통이 나의 전부를 덮치고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도 미래의 밝은 희망도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 기이한 순간에 대한 이해를 나는 이제 비로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어떤 고통과 고난의 시간도 영원하지는 않다,는 전망을 반드시 가져야 견딜 수 있다. 그건 자연사로 가기 위한 통찰이다. 누구나 결국 죽는다. 그리고 그것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중년이 된 지금 이 시기를 지나 마침내 노년이 되어 그 쇠락과 퇴락을 감당하며 자연이 주는 죽음을 맞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한 영웅적 서사다.
이제야 알겠다. 들어오는 지하철을 바라보던 과거의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